제목 : 고난을 받는 교회는 들을지어다
본문 : 요한계시록 2장 8절~11절
설교자 : 이병권
계시록 2장과 3장은 주님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편지를 받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러 지역에 있었던 교회들, 그리고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뭔가 다른 특별함이 보이십니까? 다른 여섯 교회에 비해서 분량이 좀 적습니다. 4절밖에 안됩니다. 서머나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 다른 교회에 비해서 적은 것, 왜일까요? 그들을 향한 사랑이나 관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서머나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 짧은 이유는 책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 중에 두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았는데 서머나 교회가 그중에 하나입니다. 주님께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 우리 교회가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서머나 교회의 특징으로 생각해본다면 그 비결을 ‘고난’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일곱 교회가 모두 고난 가운데 있기는 했지만, 서머나 교회는 특히 더 심한 고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받았던 고난을 알기 위해서는 서머나 도시의 특징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머나는 일곱 교회 도시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도시입니다. 현재 터키의 3대 도시인 이즈미르가 당시의 서머나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중에 복음을 들었던 사람을 통해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56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번성하는 항구가 있는 상업 도시이자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유명한 경기장과 도서관, 그리고 공공 극장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서머나는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된 도시였기에 때문에 도시설계가 되어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교통이 좋았기에 과학과 의술로도 이름을 알리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시민들은 서머나를 ‘아시아의 으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부유하고 번성했던 만큼, 그리스도인이 살기에는 힘든 도시였습니다. 이름 있는 여러 신전들이 있었는데, 키벨레, 제우스, 아폴로, 아스클레피오스,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고 혼합 종교와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도시입니다. 무엇보다 서머나는 AD26년에 열 개의 다른 후보 도시들을 이기고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을 건축하는 도시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서머나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모든 시민은 황제를 위한 신전에서 분향을 해야 했고 분향을 한 후에는 시민으로서 의무를 수행했다는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황제 숭배는 종교라기보다 정치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분향을 하면서 ‘가이사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투옥되거나 유배되고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를 거절했고 그에 따른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서머나 교회의 상황이 이러했습니다. 고난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우리는 편안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라고 하면,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는 교회는 들을지어다! 라는 말이 별로 공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받는 고난은 생명을 위협하는 고난이었는데 내가 겪는 이 정도의 어려움을 고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그때와 같은 극심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겪고 있는 어려움과 힘든 사연들을 알게 되면 참 마음이 답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별일 없이 그냥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정말 힘들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고난의 크기와 종류가 다를 뿐입니다. 고난에서 면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제라도 그런 고난이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입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고난을 받는 서머나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고난을 받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받는 교회에게 먼저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계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원래 어순대로 하면 ‘내가 안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한 번 상상해보겠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사도 요한이 보낸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조심스럽게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모이고 보니 생사를 알 수 있는 성도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집니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어떤 고난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서머나 교회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려집니다. ‘내가 안다’ ‘너희가 당하는 환난과 궁핍을 내가 알고 있단다.’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를 거절했고 그로 인해 시민의 자격을 잃었기에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고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경제적으로 궁핍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데 있어서 유대인의 “비방”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교회를 적대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절한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그들의 눈에 가시와 같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유대인들은 교회를 비방하며 로마의 관리들에게 고발하기도 합니다.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던 서머나에는 크고 영향력 있는 회당이 있었는데 교회를 적극적으로 핍박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러 거짓으로 교회를 비방하고 교회가 황제 숭배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로마는 황제 숭배를 거절하는 것을 엄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럼에도 특별히 유대교에 대해서는 그 종교를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황제 숭배에서 제외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졌을 때는 황제 숭배에서 제외되었지만, 유대인들의 비방으로 인해 교회는 더 이상 그러한 권한을 얻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투옥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비방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 2:9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유대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은 ‘비방자’, ‘거짓 참소자’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이 하는 일이 사탄이 하는 일과 같았습니다. 비방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4)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 진짜 유대인이라고 말씀합니다(롬2:28-29).혈통적인 유대인들이 자신을 유대인이라 생각했지만, 자칭 유대인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들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교회를 비방함으로써 사탄과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상황이 이러했습니다. 내가 이런 상황에 있었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고난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서머나 교회는 극심한 고난 중에도 그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사실 너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부를 가진 자란다!’
서머나 교회는 경제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했습니다. 그들이 겪는 고난은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가게 했습니다. 더 주님을 바라보고 더 의지하게 했습니다. 영적으로 더 충만하게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고난과 교회의 거룩은 반비례의 관계를 보여 왔습니다.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교회는 깨어있었고 교회의 거룩함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사라지고 안락함을 누리면 누릴수록 교회는 타락해갔습니다. 사람의 죄성으로 인해 이러한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기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까? 고난으로 인해 거룩함을 지키고 깨어있기가 더 쉬운 때입니까? 아니면 안락함으로 인해 잠들기가 더 쉬운 때입니까? 지금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부요하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할지도 모릅니다. 고난을 피하기 위해 쉽게 타협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 고난을 피하는 교회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이 서머나 교회에 하신 명령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첫 번째 명령입니다.
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만약, 고난이 여러분을 찾아와서 들어오려고 문을 두드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고난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난을 보고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가 고난을 만나게 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우리 가까이 있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계 2:10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사탄을 마귀로 바꾸어서 말씀하시는데, 강조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적은 마귀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공격은 계속 될 것입니다. 마귀는 서머나 교회의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고 서머나 교회는 십 일 동안 환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서머나 교회가 앞으로 받게 될 고난을 미리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다음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걱정 말아라, 내가 너를 보호하겠다’ 이런 말씀을 하셔야 되는 거 아닐까요?
매 맞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으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까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있는데 맞을 걸 알고 기다리면 더 힘들지 않을까요?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고난을 받고 있는 교회에게 왜 앞으로의 고난까지 말씀하신 걸까요?
우리가 욥의 고난을 생각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당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욥이 고난 받기 전에 하늘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습니다. 욥이 받은 고난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욥의 고난은 사탄이 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그 능력을 자랑하며 날뛴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욥에 대해서는 그의 생명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장차 받게 될 고난은 어떠합니까? 교회 전체가 아니라 몇 사람으로 범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에 있어서도 십 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혹독한 고난의 시간이 되겠지만, 제한된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까지도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성장시키시고 우리 삶의 불순물을 제거하시며 더욱 주님을 닮은 자로 연단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합당한 자로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십 일의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십 일 후에 십일 일이 있습니다. 열한 번째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어지는 또 하나의 주님의 명령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어쩌면 이 명령이 우리에게 좀 특별하게 들릴 수 있고 부담스러운 명령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머나 교회는 이 명령이 특별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주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 충성에 대해서 주님은 생명의 관을 약속하십니다. 경주에서 승리한 선수에게 주는 월계관을 비유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충성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충성할 때 그 충성은 우리를 세상과 구별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 철학과 논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사상과 관습이 아니라 주님께 충성하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래서 충성은 믿는 자의 특징이며, 교회의 거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는, 그 빛을 발하며 그 맛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충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합니까?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조차도 충성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주님이 먼저 가신 길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는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 길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고난으로 포장되어 있는 길입니다. 편한 길이 아닙니다. 가는 사람이 많은 길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두 명령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죽도록 충성하라.
이 명령에 대해 기쁨으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처음이며 마지막이요”(8)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영원하며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창조되기 전에 계셨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주권자이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나의 삶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주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은 고난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고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처음이며 마지막이신 주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고난조차도 그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고난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우리는 주님만 두려워하면 됩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죽도록 충성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8)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고난을 받으셨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이 친히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기에 우리도 주님처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라는 안전장치가 있기에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셨기에 그리고 그 충성의 결과가 어떠한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에 우리가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생각할 때 고난 중에도 충성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고난 가운데 충성할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영광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고난으로 심고 영광으로 거두는 것입니다. 충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고난을 받을 때는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어둡게만 보일 수 있지만, 고난이 가져오는 훗날의 영광을 생각하고 고난 너머를 바라보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우리가 아멘으로 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생명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우리의 생명을 빼앗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이 그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영원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십니다.
계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본문에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할 때, 강한 부정어를 사용해서 그럴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고난으로 인해 첫째 사망을 겪을 수는 있지만 둘째 사망은 절대로 경험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무시무시한 둘째 사망, 그 고통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된 믿음을 가진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고난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이 입증될 것이고 이기는 자로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 가운데 충성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일이면, 목숨을 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만큼 가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목숨을 거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목숨을 거는 것처럼 여러분이 애정을 쏟고 시간을 쓰고 힘을 다해 수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충성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입니까? 그 대상이 주님이 아니라면, 주님이 명하신 일과 관계없다면 헛된 일입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헛된 것에 충성하고 가치 없는 일에 충성하도록 합니다. 그러고는 정말 가치 있는 일에는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듣는 이야기가 어떠합니까? 적당히 라는 말입니다. 적당히 믿고 적당히 섬기고 적당히 충성하고 적당히 살라고 합니다. 우리의 충성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고난을 피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적당히 사랑하셨나요? 우리가 주님을 적당히 사랑해도 될까요? 힘들지 않을 만큼 고난이 없을 만큼 적당히 충성하면 되는 걸까요? 서머나 교회는 적당히 하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를 말할 때 같이 언급되는 인물이 있는데 폴리캅 입니다.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고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폴리캅의 순교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폴리캅이 처형장으로 들어왔을 때 총독은 그의 명성과 나이를 생각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맹세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석방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욕하라.”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지만,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분은 내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은 명령을 거절한 폴리캅을 협박하기 시작합니다. “내겐 맹수들이 있다.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너를 그 우리에 던져버릴 것이다.” 맹수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가운데 폴리캅이 말합니다. “맹수들을 부르십시오!” 맹수들의 협박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화형으로 위협합니다.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너를 불태울 것이다.” 그러자 폴리캅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잠시 타다 소멸되는 불을 가지고 위협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악한 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심판과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지체하십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을 속히 하십시오.”
그렇게 폴리캅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폴리캅은 주님의 명령 그대로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잠시 타다가 사라지는 불은 폴리캅의 충성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서 건져주신 주님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까? 우리를 살리시려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려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죽음에 있던 우리를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먼저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기에 우리가 그 생명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충성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피하는 교회가 아니라 고난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