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경이로운 여호와를 경외하라

본문: 시편 111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11-113편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115-117편은 모두 “할렐루야”로 마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이 시편들의 주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 중간에 있는 114편은 출애굽에 대한 찬양인데, 이 시편이 포함된 113-118편은 ‘애굽 할렐’로 묶여서 유월절에 불려졌던 찬양이었다.

이 애굽 할렐을 앞뒤로 둘러싸고 있는 시편 111편과 112편, 그리고 119편은 모두 답관체(이합체, 알파벳 시편)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찬양(예배)에 있어 하나님의 구원과 말씀의 중요성이 함께 강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11편과 112편만 보면, 이 둘은 저자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같은 저자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다는 사실이 명확하다. 둘 다 동일한 형식(답관체)으로 비슷한 길이로 기록되어 있고, “여호와를 경외함”이 내용의 핵심이다. 111편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내용이고 112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내용이다. 오늘은 111편을 ‘경이로운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자.

111편에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다.

111:2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111:3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111:4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111:6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111:7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111:8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여기에 5절과 9절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신 구체적인 일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1절의 서론과 10절의 결론, 그리고 2-9절의 본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론은 여호와는 그 하시는 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 여호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서론과 결론은 그 여호와께 합당한 반응을 말한다. 서론은 공적인 예배(입술의 예배)를, 결론은 사적인 예배(삶의 예배)를 말한다. 그리고 “할렐루야”로 시작한 말씀은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라는 선언으로 마무리되어, 이 시편의 주제가 찬양(예배)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서론(1절)

111: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의 시작을 여는 “할렐루야”는 답관체 형식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마지막 행의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는 답관체를 따른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명령은 합당하며, 그 찬양이 영원히 계속될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 시편은 바로 이 찬양(예배)에 대한 시편이다.

“할렐루야”는 한 단어처럼 들리지만 “할렐루”와 “야”가 합쳐진 표현이다. “할렐루”는 찬양하라는 명령이고 “야”는 여호와를 줄인 표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쩌면 “할렐루”보다는 “야”일 것이다. 누구나 찬양은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연주의가 지배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지금도 그렇다. 사람들은 대상이 달라졌고 그 대상을 부르는 말이 달라졌을 뿐, 항상 무언가를 찬양한다. 예배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은 과거 다양한 우상의 신전을 세워 우상숭배를 했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자기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것을 찾아다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바친다.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자신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우상숭배인지 모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다. 사람이 만든 무엇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유일한 참된 예배의 대상이기에 찬송하라는 명령에 유일하게 합당한 목적어는 하나님이시다. ‘할렐루’ 다음에는 항상 ‘야’가 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먼저 자신이 그렇게 할 것을 말한다(1절). 여기서 “감사하다”는 고마움을 표현한다는 의미보다는 공적으로 어떤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물론 그것이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인정’ 혹은 ‘고백’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에서의 ‘간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사는 혼자할 수 있지만 간증은 혼자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 한다.

여기서도 그렇다. 저자는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 간증하며 예배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성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다. 즉, 공적인 예배의 상황을 배경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런 예배를 “전심으로” 드리겠다고 말한다. 마치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던 사람들처럼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 시간에 다른 재밌는 일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끌려와 있는 사람처럼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다.

“전심으로” 예배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 말의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다. 피곤한데 어쩔 수 없이 어린이날이 되어서 가족들과 놀이동산에 간 아빠는 그 시간을 ‘전심으로’ 함께 하지 못한다. 놀이동산에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하자는대로 최소한으로 무언가를 하면서 빨리 집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몸은 그곳에 있지만 마음은 전혀 그곳에 있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그 아빠가 회사 사장이고 등산을 좋아해서 휴일에 직원들을 산으로 불러 모았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 시간이 너무 좋을 것이다. 등산이 얼마나 좋은지 계속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이 지금은 억지로 나왔을지 모르지만 결국 좋아하게 될거라는 착각도 한다. 전날부터 등산 코스를 준비하고 등산 장비를 준비하고 먹을 것을 준비하면서 들떠있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혹시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봐 여유분까지 준비하면서 혼자 뿌듯했을 것이다. 그는 ‘전심으로’ 등산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전심으로 할 때는 기쁨이 있고 자발성이 있다. 적극성이 있고 열정이 있다. 여기 시편 기자의 모습에도 그런 태도가 보인다. 그냥 드려지는 예배에 같이 하겠다, 빠지지는 않겠다 정도가 아니라 “내가” 여호와께 감사하겠다고 말한다. 마치 예배에 내가 없으면 예배가 진행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적극성이 있는 것이다.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의 모습이다.

때로 공예배가 너무 ‘의식(예식)화” 되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진짜 문제는 나에게 있다. 공예배에도 여전히 개인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공예배라고 해서 관련된 사람들만 예배하고 나는 자리만 채우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예배가 드려질 때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배 시간에 뭐라도 한마디 해야만 전심으로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장소로 기쁘게 나의 발걸음이 향하는지를 봐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시간을 내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한다. 그냥 시간이 되어서 교회를 가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의미 없는 형식만 남은 (예배라 할 수 없는) 예배가 된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이 말씀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시편 107-150>, 907-8. “어떤 사람들은 전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찬양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 가운데도 ‘반심으로’ 드려지는 찬양과 건성으로 하는 헌신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전적으로 합당한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알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전심으로 예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의미다. 정말로 그렇다. 전심으로 예배하지 않는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그는 애초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심과 다르게 전심으로 드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가 많다. 어떻게 해야할까? 본론인 2-9절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이 그렇게 전심으로 여호와를 예배하고자 하는 동기 혹은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본론(2-9절)

111:2–6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3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4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5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6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말한다.

2절은 그 일들이 크시다고 말한다. 위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건축물들을 보면서도 위대하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어떻게 바다 위로 그 크고 긴 다리를 만들었는지, 어떻게 바다 밑으로 터널을 만들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크고 높은 건물들도 그 존재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낸다. 스마트폰 같은 기기가 이제는 흔한 것이 되었지만,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상상 속에만 있던 것이었다. 여전히 우주에 무언가를 날려 보내고 심지어 거기에 사람이 타 있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인간이 한 ‘큰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비하면 먼지와 같다고 말하는 것도 과대평가다. 그 깊이를 다 알지도 못하는 바다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우리는 겨우 달에 갔다 왔을 뿐인데,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셨다. 우리가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레고로 조그만 집을 만들고서 스스로 뿌듯해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너무나 크다. 하나님이 그렇게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3절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다고 말한다. 여기 사용된 표현은 왕에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왕의 영광과 위엄이 그 하는 일에 드러나는 것이다.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이런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으로서 애굽을 심판하셨다. 이 존귀하고 엄위한 일을 통해 하나님은 바로가 아닌 자신이 진정한 왕이며 의로운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4절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기이한 일, 놀라운 일이란 의미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일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다. 하나님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주와 생물의 정교함은 정말로 시간과 확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맛있는 음식이 식탁 위에 차려져 있는데, 이 음식을 요리한 사람이 없다는 전제로 그 사실을 설명하려면 불가능한 설명을 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요리 재료가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적절한 양이 적절한 순서로 배합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누구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한 우주와 생물에 대해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오늘날의 진화론이다.

불가능한 창조의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기적이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창조가 아닌 구원에 대해서 말한다. 구원 역시 창조와 마찬가지로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기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모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6절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 즉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 이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매추라기 등을 주셔서 먹이신 사건을 지칭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 즉 가나안 땅을 주셨다.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기업으로 줄 것을 약속하셨었다. 출애굽 사건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스러워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전 언약하신 것을 이루신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제로 이루셨다는 사실은 그 말씀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증명한다.

111:7–9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8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9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행하신다. 이스라엘의 속량은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고 정의로운 분이시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4절의 하반절이 말하는 것처럼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운 분이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과 언약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이스라엘의 속량에 분명히 드러났다.

2-3절에서 하나님은 크고 존귀하고 엄위한 분이셨다.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살피시고 돌보시고 그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신다.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 어떤 인간의 통치자도 이렇게 하지 못하고 하지도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렇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9절 마지막 행이 말하는 것처럼 거룩하고 지존하시다. 그 무엇과도 같지 않은 경이로운 분으로서 우리가 경외해야할 분이시라는 의미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런데 2-9절에서 두 가지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런 경이로운 일들을 하실 때, 그것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셔서 사람들로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111:4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제정하셔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에게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셨다. 유월절을 지키면서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그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했다. 그래서 해가 가고 세대가 바뀌어도 그들은 계속해서 출애굽을 단지 조상들의 역사, 옛날 이야기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경험한 사건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111:6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통해 그의 능력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은 자신들보다 강한 여러 민족을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고 현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하나님이 얼마나 강한지만 드러내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리셔서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이미 하나님을 알긴 하지만 더 알아야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경이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다 깊이, 보다 높이, 보다 넓게 알아야 했다. ‘하나님이 최고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왜 그런지, 어떻게 그런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그런 찬양을 드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2절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111:2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개정개역의 ‘기린다’로 번역해서 기억한다는 뉘앙스를 주는데, 사실 그보다는 무언가를 ‘추구하다’ 혹은 ‘연구하다’는 의미다. 즉,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그런 큰 일들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다 연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이로운 일을 행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는 연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연구하기도 하고 특별계시를 연구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연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알리신 것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알고 싶어서 하는 연구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두려움과 또한 사랑하는 자로서 즐거움을 가지고 하는 연구다. 뭔가 책을 잔뜩 쌓아두고 하는 연구도 있겠지만, 그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성경을 통해 그리고 내 삶을 통해 묵상하고 되집어 보는 연구일 수도 있다. 어떻게든 더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온맘의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노력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우리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참된 것이 되게 하는데, 그 하나님을 잘 모른다면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전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더 아는 것이 불필요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알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경이로운 하나님을 더 알게되면 그만큼 더 하나님으로 인해 놀라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그 경이와 사랑이 우리 예배에 새로운 동력이 된다. 하나님을 더욱 경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경외는 공적인 예배 뿐 아니라 삶의 예배도 바르게 드릴 수 있게 한다.

결론(10절)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삶을 지혜롭게 살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지혜와 훌륭한 지각을 가지고 예배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올바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살아갈 수 있고 그런 사람이 시편 112편이 말하는 복있는 사람이다.

결국 여호와를 경외하는 찬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그로 인해 보다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입술과 삶으로 계속해서 드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전

하나님은 그 하시는 일들을 통해 경이로움을 나타내신다. 과거에도 그러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 그렇게 해서 자기 백성에게 자기를 알리시고, 합당한 예배를 받으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그런 하나님의 일들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것이 첫째로 할 일이다. 가장 먼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연구라고 해서 학교에 들어가서 대단한 공부를 해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야한다는 말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 받을 때 들었던 ‘복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전부인 경우가 있다. 거기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 정도가 신앙의 전부다. 물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식이 누군가에게는 그 정도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한다. 그래야 보다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 말씀을 열심히 듣는 것도 필요하고, 성경 학교에 참석하는 것도 필요하다. 성경도 읽고 성경을 가르치는 책도 읽으라. 또한 성경에 따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책도 읽으면 좋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계속해서 꾸준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연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좋다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내신 책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도 없다.

때로는 성경을 읽는 것이 즐겁고 꿀송이처럼 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내 기분에 따라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당연하게 밥을 먹듯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 밥 먹을 기분이 아니라고 1달씩 굶는 경우는 없다. 기분과 상관 없이 필요하기 때문에 밥은 먹는다. 말씀은 더욱 그렇다. 대충 일주일에 한두번 설교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내가 드리는 예배도 대충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지 않으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그런 예배를 드리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말씀 외에 하나님의 하신 일을 연구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이 있었지만, 구원 받은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이스라엘에게는 유월절이 주어져서 출애굽을 기억하게 하였다면, 나에게는 주의 만찬을 통해 십자가를 기억하게 하셨다. 주의 만찬은 그저 일주일에 한번 모여서 손톱만큼 빵을 먹고 한 모금의 포도주스를 마시는 행사가 아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니 그렇게 해야 한다. 그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식을 준비하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 희생과 사랑을 묵상하고 떡과 잔을 대해야 한다. 형제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내 삶에서 일하고 계신다. 내가 무심코 지나가는 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이고 기적이다. 그러니 내 삶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번 주, 이번 달, 이번 해에 베푸신 구원에 대해서 계속해서 묵상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루 하루를 그냥 보내지 말고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부지런히 연구했다면, 다음으로 할 일은 그로 인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이 예배가 정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전심으로 예배드리기로 결심해야 한다. 입술의 예배와 삶의 예배가 함께 드려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말과 행하시는 일이 일치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우리의 말과 삶에 동일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가 말로 드리는 공적인 예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적인 예배는 습관처럼 드려지기 쉬운 요소가 있다. 형식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고 그것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반복적으로 하는 일은 그 중요성을 잊고 대강하게 되기가 쉬운데, 공예배도 그럴 요소가 충분한 것이다. 매주 같은 시간 비슷한 장소에 앉아서 비슷한 일을 하다보면, 그냥 아무 생각없이 습관처럼 그 일을 하게 되기 쉽다. 딱 우리가 드리는 공예배가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예배를 드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정말 문제는 나다. 내가 경이로운 하나님을 평범하게 만든 것이 문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크지도 않고 존귀하지도 않고 엄위하지도 않다. 실제로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랑스럽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나에게 괜찮은가. 내가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면, 정말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대충 누가 나와서 앞에서 예배하면서 예배 시간만 채우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 시간에 잘 앉아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배했느냐가 중요하다.

예배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삶이든 말이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모두 중요하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크심과 사랑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경이로운 분이시다. 경이로운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하나님을 연구하여 더 알고 전심으로 그분을 예배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