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거듭나야 할 사람(들) 1
본문: 요한복음 3장 1-21절
설교자: 최종혁
요한복음 3:1-21에 기록된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배우고 생각해 보게 될 주제는 ‘거듭남’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한다고 반복에서 말씀하셨고(3, 7절) 같은 의미로 성령으로 난다는 표현도 사용하셨다(5, 6, 8절).
‘거듭난다’는 말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은 많이 사용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나는 것하고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사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에 가깝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시 태어난다’고 말할 때는 지금과 동일한 태어남(출생)을 다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인생을 다시 산다거나 혹는 리셋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많이 달라져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 때, “다시 태어났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새출발하고도 같은 의미다.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은 다른 종류의 태어남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다시’는 ‘반복’이 아니라 ‘또 다른’의 의미다. 무언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거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거듭남’에서 ‘거듭’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아노텐)은 ‘다시’를 의미하기도 하고 ‘위로부터’(요 3:31)를 의미하기도 한다. 의미는 문맥에 따라 결정된다. 예수님은 ‘다른 출생’을 말씀하고 계시기에 ‘위로부터’의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니고데모는 ‘다시’로 이 단어를 이해했다.
‘다시’로 번역을 하든 ‘위로부터’로 번역하든,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은 다른 종류의 출생이지 같은 출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영적인 출생이 거듭남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3절).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의 선포다. 3절에서는 “사람이”라고 하셨고, 7절에서는 “너”가 아니라 “너희”라고 말씀하셨다. 절대적 진리를 니고데모에게 적용해서 하신 말씀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은 5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15, 16절에서는 “영생을 얻는 것”이며 이는 또한 17절 이하에서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는 표현이다. 참된 삶에는 참된 생명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거듭나야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거듭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을 전무후무한 사기꾼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정신나간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절대로 흘려들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미 거듭났다고 확신하거나 확신하지 못하거나, 혹은 관심이 없더라도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요한복음 3:1-21에 기록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대화(사실 대화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에서 우리는 거듭남과 관련된 여러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누가 거듭나야 하는지, 누가 거듭나게 하는지, 거듭남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 그리고 거듭남의 결과는 무엇인지 등과 같은 질문에 답해주기 때문이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면 이미 매우 익숙한 말씀이지만, 오늘부터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볼 것이다. 먼저 오늘은 “누가 거듭나야 하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보자.
오늘 말씀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시작되는데, 이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바로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거듭나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정확히는 니고데모 같은 사람도 거듭나야 하는 사람이다. 그럼,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1절)
니고데모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첫 단서는 “그런데”다. 니고데모는 여기서 처음 언급되지만, 앞의 문맥과 상관없이 등장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2장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표적을 행하셨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마술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속임수가 아닌 실제였다는 면에서 그렇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재밌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들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믿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는 면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요한은 ‘표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의 의미를 명시한 것이다.
그렇게 갈릴리에서 첫 표적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셨다. 예수님 뿐 아니라 명절을 지키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성전은 말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제물로 쓸 짐승을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는 사람들로 인해 성전은 장사하는 시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거룩한 열정으로 행동하셨다. 짐승들을 내쫓고 돈을 쏟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소리치셨다(요 2:16).
그러자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한 예수님께 표적일 보일 것을 요구했다(2:18).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옳고 그름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있는지만 물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표적이 그들에게 최종적인 표적으로 주어질 것을 말씀하셨다(2:19).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 후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유월절과 무교절로 이어지는 중요한 명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다른 표적들도 행하셨다. 요한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의 표적을 행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2:23을 보면 그런 예수님의 표적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 모두가 구원 받는 믿음을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모두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을 다 믿지 않으셨다. 표적을 보고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면에서든 호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 뿐이다. 그리고 니고데모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한 말 때문이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그 이유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언급했다. 니고데모의 말을 보면 그저 하나의 표적에 큰 감명을 받아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표적”이라고 말할 때 복수형을 사용해서 최소한 둘 이상의 표적임을 암시했다. 직접 목격한 것일 수도 있고 들은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9장에서 살펴봤던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의 말이 떠오를 것이다. 그는 맹인이었던 자신의 눈을 예수님께서 뜨게 하신 것은 분명한 메시야의 표적임을 알고 이렇게 말했었다.
요 9:32–33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지적인 믿음 혹은 사실에 대한 인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치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같다. 물론 이 맹인은 훨씬 더 긍정적인 태도로 이런 말을 했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와 만났을 때 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예배했었다(요 9:35-38). 그의 지적인 믿음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와 만나셨을 때, 구원 받는 믿음이 되었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바로 그런 지적인 믿음(인정)의 단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나이다”라고 말했고 심지어 주어도 ‘나’가 아닌 “우리가”였다. 아마 니고데모는 표적을 행하며 대중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커져가던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이 궁금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위치를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저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물어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몇 명의 사람들(아마 다른 바리새인 동료들)과 논의를 한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표적들을 통해 객관적인 결론으로 말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인정했던 것이다. 다만 9장의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처럼 거기서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특히 자신을 구원할 메시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분명히 긍정적인 모습이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과 관련된 어떤 경험을 통해 호감을 가지고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사실 여기서 더 나아갔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히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
히브리서의 저자가 말하는 자들은 멀리서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대충 알았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었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들을 경험했다. 그 일들을 함께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구원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됨을 보장하지 않았다. 니고데모를 비롯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소위 믿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오늘날 그렇게 예수님을 아는 사람, 딱히 예수님을 나쁘게는 생각하지는 않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도 예수님을 부정하지는 않으니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교회는 나오고 있으니까 어쨌든 지옥에는 가지 않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전히 그들에게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적인 동의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경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니고데모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바리새인”이었다는 것이다. 성경에 익숙한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에 부정적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외식하는 자”(위선자)라고 호되게 질책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포하셨는데, 특히 13-15절에서는 그들이 하는 일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3:1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없음) 1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천국에 자신이 들어가지도 않고 또한 들어가려는 자들도 막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이끌고 있었다. 마태복음 23:33에서 예수님께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며 그들을 정죄하신 것은 결코 과한 표현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자가 되어 하나님의 양떼를 지키고 돌봐야 했던 자들은데,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삯꾼들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양치기 개가 아니라 늑대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 그들은 사탄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뱀이었고 독사의 새끼였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바리새인들의 실체였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자들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에 대해 말하면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했다(빌 3:5). 바리새인인 것은 부끄러워서 감추거나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고 자랑할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종교적으로 봤을 때, 그들은 당대에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는 “분리(구별)된 자”를 의미한다. 그들은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과 모든 면에서 분리되기를 추구했다. 특히 율법에 있어서 그들은 타협하지 않고 그 명령을 지키려고 했다. 그들은 율법에 있어 가장 엄격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23장에서 그들을 책망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하시면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23:2-3).
실제로 그들이 어떠했는지를 차치하면, 그들의 율법에 대한 열정은 인정할만 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열정이 내면보다는 외면에 집중되었고, 결국은 마음이 어떤한지는 관계없이 겉으로만 거룩하고 의롭기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년에 한 번 금식하는 사람보다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사람이 더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조금 헌금하는 사람보다는 많이 헌금하는 사람이 더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골방에서 기도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데서 기도해야 더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의, 다르게 말하면 자기 의에 집중하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준으로 서로 판단하며 정죄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최고의 엘리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이다.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요한복음에서 그가 보인 모습을 보면 니고데모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려던 사람은 아니었을 듯하다. 다만 그 자신이 먼저 그런 종교에 물들어 있었고, 그것을 진리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믿음을 지켜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천국에 어떻게든 천국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조금만 더 노력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앞으로 10년 정도만 지금처럼 혹은 지금보다 조금 더 열심히 십일조를 하고, 금식도 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에도 계속 올라가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기도도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니고데모는 최선을 다해 그런 삶을 살았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바리새인이 6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 6000명 중에 가장 뛰어난 바리새인이 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었던 이유도 그가 이런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리 해도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두렵고 답답해서 예수님을 찾아 왔을지도 모른다. 사실 많은 종교인들이 이렇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렇게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것 뿐이다. 어쨌든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 신이 그 노력은 인정해주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는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아예 그것은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종교인들에게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아무리 노력해서 다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고 그래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고 해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종교적 행위, 도덕적 행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셋째로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이 말은 그가 유대인의 최고 통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의 구성원이었다는 의미다. 요한복음 7:45-52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 내에서 이루어진 토론이 기록되어 있는데, 니고데모가 거기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산헤드린은 당시 로마에 의해 지배 당하던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고 70명의 공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70명 중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등 이스라엘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종교 지도자들이 포함되었다. 유대인이 정치적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가 바로 산헤드린 공회였던 것이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 중 하나였다.
여기에 더해 니고데모는 부유한 사람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 보면 그가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예수님을 장사할 때 니고데모는 엄청난 양의 향품을 가지고 왔는데(요 19:39), 이는 당시 왕들의 장례에 쓰일 정도의 양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가 가진 재산에서 얼마나 차지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 정도의 재력을 가졌던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을 뿐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서 봤을 때도 충분히 성공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돈과 권력을 모두 지녔던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돈이나 권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다. 이는 10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칭하셨다. 이 말은 우리가 “국민 OO”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의미하는 바와 유사하다. 국민 배우, 국민 가수, 국민 타자 등의 표현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어떤 분야에서 국가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사람을 지칭한다. 니고데모가 바로 이스라엘의 국민 선생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안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탁월했던 성경 교사, 가장 명망있는 성경의 전문가가 바로 니고데모라고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다.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도 니고데모가 최고의 권위자였을 것이다.
우리는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물은 것 때문에(4절), 그를 좀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네가 이건 알아야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율법에 대한 그의 지식은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으로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는 없다. 성경을 아무리 잘 알고, 창세기 1:1에서 계시록 22:21까지를 다 암송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바늘에 찔리면 피 대신 말씀이 나오고, 모든 상황에 적절한 성경 말씀을 알고 있고, 그 말씀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어도, 단지 그 지식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간단히 정리하면 니고데모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두의 부러움을 살만한 완벽한 스펙을 가진 사람이었다. 니고데모가 젊은 사람이었다면 일순위의 신랑감이었을 것이다. 외적으로 봐서는 누가 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 최소한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니고데모였다.
그렇다고 니고데모가 외적으로만 괜찮고 내면은 엉망이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는 매우 예의있고 정중했다.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인데, 예수님을 “랍비여”라고 높여 불렀다(2절).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해 교만하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배우는 학생의 자리에 둔 것이다.
니고데모는 또한 객관적인 사실과 추론의 결과를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열린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의 이야기에 등장했었던 바리새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상황을 거기에 끼워맞추려고 했었다. 어떻게든 증언을 부인하려고 했고, 사실을 말하는 자에게 분노하여 욕하기도 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고, 정직한 결론을 내렸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은 약 400년간 침묵하셨고 어떤 이적이나 기사도 행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통해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그것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결론 내렸다.
물론 이 말이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 인정하고 믿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는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아무 근거도 없이 결론내리거나, 귀신의 왕을 힘입어 이런 이적들을 행한다고 모함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명백한 결론을 니고데모는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굳이 예수님을 찾아올 정도로 겸손하기도 했다. 2절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다고 말한다. 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는지, 굳이 요한이 여기서 밤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추론들이 있지만, 모두가 다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밤이 니고데모의 영적인 어둠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런지는 나중에 천국에서 요한에게 물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니고데모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간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낮에는 바빠서 그랬던 것인지도 나중에 천국에서 니고데모에게 물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니고데모는 위험을 무릎쓰고 예수님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9장에서 봤던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예수님께 적대적이었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계속해서 예수님과 싸웠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다. 그 무리에 속해 있던 니고데모였고, 더구나 산헤드린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하는 일이 더 눈에 띌 수 있다는 것도 니고데모는 알고 있었다. 요한복음 19:38에 따르면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님을 장사했던 또 다른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유대인이 두려워”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숨겨왔다고 말한다. 니고데모도 그런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기고 그는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이다.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고려하면, 니고데모는 그가 이룬 모든 것, 가진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불안함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게 맞는 것 같는데, 단지 예수님의 확인을 원했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공허함과 불안함이 그에게 가득했기에 다른 해답을 찾아 예수님께 나아왔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니고데모는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답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을 찾아오는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진심으로 대해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는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자주 사용하셨던 표현이다.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며 그렇기 때문에 집중해서 들어야 함을 강조하시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니고데모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사람은 거듭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이고, 부자이면서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불렸던 니고데모도 예외는 아니다. 예의 있고, 정직하고, 겸손한 니고데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했던 것이다.
가끔씩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뭔가가 너무 잘못되어서 이제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도 바로 잡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그렇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전혀 그런 상황에 있지 않았다. 누구도 니고데모에게 “넌 다시 태어나야 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나도 너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이 니고데모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같은 말씀을 다른 사람, 특히 세리나 창기와 같이 사회적으로도 죄인으로 인정 받았던 사람에게 하셨다면, 아마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죠. 저 같은 사람은 고쳐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은 죽어야 해요. 다시 태어나야 해요”와 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을 가장 완벽한 삶을 산다고 인정받을만했던 니고데모에게 하셨다. 왜일까? 그도 마찬가지로 고쳐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그도 다시 태어나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거듭나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사람”이다. 사람은 거듭나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한다.
문제는 니고데모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고 얼마나 율법에 순종했느냐가 아니다. 그가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도 문제가 아니다. 그가 얼마나 인격적으로 훌륭한지도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죄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성경은 정확하게 이렇게 말씀한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곧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이 말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죄로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야 한다. 거듭나지 않아도 괜찮은 죄 없는 사람은 없다. 가장 종교적인 사람, 가장 많이 아는 사람, 가장 성공한 사람, 가장 부한 사람, 가장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새로운 출발을 해도, 실제로 몇번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우리는 육으로 태어나는 이상 죄인이다.
따라서 새로운 생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거듭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니고데모를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사랑하셔서, 불쌍히 여기셔서 하신 말씀이다. 사람은 거듭나야하고 따라서 니고데모도 거듭나야 했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거듭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아마 우리 중에는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이다. 정점에 있는 사람은 아니어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들이 있다.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훨씬 인격적이고 겸손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남에게 베풀며 사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아는 사람도 있고, 우리가 볼 때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럼에도 나는 괜찮을까라며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나 어떤 성취도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거듭나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야 한다. 아직 스스로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지금 상태로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는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 내가 거듭났는지가 중요하다. 내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고 최소한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찾아와야 한다.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만나주실 것이다.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 확신이 무엇에 기초했는지 점검해 보기 바란다. 내가 니고데모와 같은 삶을 살았기에 거듭났다고 착각하면 안된다. 교회의 예배에 잘 참석했고, 봉사도 열심히 했고, 헌금도 빠지지 않았으니 거듭났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난 괜찮은 사람이니까,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사람이니까 거듭났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런 것들은 거듭남의 열매는 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거듭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가장 뛰어난 교사이며 구별된 삶을 살았던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어쩌면 나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실지 모른다. 나의 확신이 나의 행위에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행위에 있는지 분명히 점검해 봐야 한다.
그리고 감사해야 한다. 다음에 배우겠지만, 내가 잘해서 거듭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남에 내가 기여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거듭났다면 감사하는 것이 첫번째 반응이 되어야 한다. 어버이날에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녀들처럼 그렇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