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거둘 때가 이르렀다

본문: 요한계시록 14장 14-20절

설교자: 조정의

영화 ‘데스티네이션’에서 알렉스는 수학여행을 가려고 친구들과 함께 비행기에 탔다가 잠시 잠이 든다. 이륙한 비행기는 공중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발하여 모두 사망하게 되는데,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리고 꿈에서 본 일이 하나둘 실제로 일어나면서 주인공은 난동을 부리며 비행기에서 내린다. 그리고 주인공 없이 출발한 비행기는 꿈에서 본 것처럼 공중에서 폭발한다. 

만일 우리가 미래를 볼 수 있다면 현재의 선택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계획하신 미래를 분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형성과 부흥, 멸망과 회복이 예언되었고 실현된 역사가 됐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구체적으로 예언되었고 말씀하신 그대로 이뤄졌다. 요한계시록은 교회가 휴거된 이후 이 땅에 일어날 미래를 예언한다. 그전까지 성경의 예언이 빠짐없이 모두 실제로 일어났으니, 종말에 계획하신 일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은 종말에 반드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종종 추수에 비유한다. 추수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언제 어떻게 추수하실 것인지 요한이 본 환상을 통해 분명히 보기 원한다. 그리고 미래를 본 사람으로서 현재 확실히 달라진 삶을 살기 원한다: 심판주와 화평을 누리라. 구세주를 사랑하고 죽기까지 따르라. 불타버릴 세상에서 내려라. 

1. 누가 심판하시는가?(14절)

지금까지 살펴본 계시록의 심판들(일곱인, 일곱 나팔 심판)은 모두 아버지 하나님께서 두루마리에 기록하신 그대로 어린양 예수님께서 집행하신 것이었다. 앞으로 남은 심판들(일곱 대접 심판: 16-17장, 최후 심판: 19:11-21)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실행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직접 말씀하셨다(요 5:22).

요한이 본 환상 속에서 심판자의 자리에 누가 앉아계시는지 보라: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14절).  

흰 구름은 하나님의 쉐카이나(현현) 영광과 자주 동반한다(출 40:34; 왕상 8:11; 마 17:5). 구름 위에 계신 인자와 같은 이는 항상 성자를 가리키는데(계 1:13),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부르기를 즐기셨다(요 3:14). ‘사람의 아들’이란 의미를 가진 인자는 예수님이 인성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단지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성을 가진 분으로서 하늘 보좌에 앉아 영원한 권세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말해준다. 선지자 다니엘은 환상 중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 아버지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것을 봤다(단 7:13-14). 머리에 금 면류관은 전쟁의 승리자가 쓰는 화관으로, 통치자로서 세상을 정복하신 주님의 주권을 보여준다. 

우리는 주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 주목하여 봐야 한다: 예리한 낫(14절). 낫은 추수할 때 사용하는 예리한 도구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할 때 추수 이미지를 자주 사용했다(렘 51:33; 호 6:11). 특별히 선지자 요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는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욜 3:13). 정확히 본문이 묘사하는 추수 장면과 같다.

예수님이 심판하신다. 구원자로 오셨던 예수님은 지금 통치자시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은 지금 심판하는 자리에 좌정하셨다. 세상의 모든 악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고, 악인은 주님 손에 의해 반드시 처벌받을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공정한 심판을 원한다. 선하게 사는 이들에게 복이 임하길 바라고, 악한 자들에겐 그에 상응하는 벌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문제는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판결받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통치의 자리에 오르시기 전에 구원자로 오신 것이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계 5:9). 당신이 심판을 면하는 유일한 방법은 심판주와 화평을 이루는 것이다. 재판장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영원하신 왕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용서하고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신다. 하지만 끝까지 반역자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자는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아들에게 입 맞추라(시 2:12).

2. 언제 심판하시는가?(15-16절)

요한은 이어서 또 다른 천사를 봤다(15절). 천사는 성전(하늘)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 곧 심판주 예수님께큰 음성으로 쳤다: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15절).

곡식’이라는 말 때문에, 어떤 사람은 14-16절의 추수는 의인을 불러 모아 상주시는 것을, 17-20절은 악인에게 진노의 심판을 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마 13장). 하지만 ‘다 익었다’는 표현의 문자적 의미가 ‘메말랐다,’ ‘시들었다’이기 때문에 알곡이 잘 여물었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상해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신속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사는거둘 때가 이르렀다고 심판주께 보고하며 속히 행동할 것을 간청한다. 

구름 위에 앉으신 이 곧 가장 높은 곳에서 그 발아래 있는 만물을 모두 심판하실 예수님께서 곧바로 행동하신다: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16절). 일차적으로 이는 16-17장에 나오는 일곱 대접의 심판을 가리킨다. 주께서 땅에 마지막 진노를 쏟으셔서 적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더욱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신속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가 심판하실 날이 “도둑 같이 오리라”고 말한다(벧후 3:10). 언제 심판하실 지 아무도 모른다.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 24:36). 하지만 심판의 날을 맞이하는 이들에게 그날은 갑작스러울 것이다. 예수님은 노아의 홍수와 비교하며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날은 매일 가까워지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망각하고 방심하여 세상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믿고 태평하게 살다가 그날이 기습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주께서 심판하실 미래를 아는 자들은 모르는 자와 똑같이 살 수 없다. 주가 불살라 버릴 땅에 미련을 두고 살 수 없다. 주가 책망하실 세상에 속한 것에 애착을 가지고 살 수 없다. 심판받을 악을 마음껏 행하며 살 수 없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명령하며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요구한다(벧후 3:11-12). 추수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거둔 열매를 가지고 결산한다는 것을 기억하라(고전 3장). 우리 삶도 불로 태워질 것인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공적만이 남는다. 구세주를 사랑하고 죽기까지 충성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직 그러한 삶만이 주님 앞에 영원히 남아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기 때문이다(벧전 1:7).

3. 어떻게 심판하시는가?(17-20절)

요한은 또 다른 천사를 봤다(17절). 그도 성전에서 나왔고 예리한 낫을 가졌다. 그리스도의 심판을 집행할 수행자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천사제단으로부터 나왔다(18절). 이 천사도 심판을 수행할 종이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라는 말과 제단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이 공의를 부르짖는 성도의 간절한 기도 응답이라는 사실이다. 

계시록 6장에는 제단 아래 하나님을 위해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주소서’라고 부르짖는 장면이 나온다(계 6:9-10). 계시록 8장에는 천사가 금향로에  ‘모든 성도의 기도’를 담아 제단에 바친 후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아 심판을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임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구하는 성도의 기도 응답이다(마 6:9-10).

불을 다스리는 천사예리한 낫을 가진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외쳤다: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18절). 다시 한번 추수의 비유로 심판을 묘사한다. 여기서 ‘익었다’는 표현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악이 그 한계에 미쳤다는 것이다.

포도의 추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낼 때 종종 사용됐다(사 63:1-6; 욜 3:13). 계시록 14장 10절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라는 말을 사용했고, 본문에서도 19절을 보면 천사가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졌다고 말한다. 

당시 포도주 틀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생생하고 참혹한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을 것이다. 돌을 파서 만든 큰 웅덩이와 작은 웅덩이가 좁은 통로나 관으로 연결되어 있고, 큰 웅덩이에 추수한 포도를 가득 담으면 추수꾼들이 발로 밟아 짓이겨 포도즙을 내는데, 그러면 좁은 관을 통해 낮은 지대에 있는 작은 웅덩이로 포도주가 모이는 방식이었다.

포도송이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라. 이것은 하나의 과장된 표현이지만, 20절에 말하는 것처럼 실제로 그들이 성 밖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틀에 밟힐 때, 가 흐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 피는 말 굴레에까지 닿는다(머리에 씌우는 장비). 그리고 그 피는 천육백 스다디온까지 퍼진다. 스다디온은 고대 그리스도의 길이 단위인데, 천육백 스다디온은 약 300km에 달한다. 단에서 브엘세바, 전체 팔레스타인 땅에 해당한다. 또한 이 숫자는 상징적으로 42 x 102으로 땅의 사방,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고 볼 수도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쓰여진 유대인 문헌 에녹 1서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100:3): “말들이 그 가슴까지 죄인들의 피에 잠긴 채로 걸어 다니게 될 것이다.” 이는 지상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예수님이 친히 오실 때 최후로 땅에 행하실 심판을 연상하게 한다. 성경은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라고 예언했다(계 19:15). 그날에 적그리스도가 땅의 모든 임금들과 군대들을 동원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인데, 그리스도의 검에 죽은 사람의 시체가 땅에 가득하여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를 채운다고 말했다(계 19:21).

그리스도의 심판은 국지적이지 않다. 전 세계적이다. 심판의 대상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다. 심판의 강도는 최강이다. 심판주와 화해하지 않은 모든 산 자는 죽는다. 온 땅이 피로 가득하다. 형벌의 기한은 끝이 없다. 멸망한 영혼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함께 영원히 불못에 던져진다(계 19:20). 이것이 구세주를 거절한 모든 사람의 ‘데스티네이션’(운명)이다.

이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처럼 살 수 없다.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고 거절하는 사람을 망하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끔찍한 사고를 당하게 될 것을 우리가 미리 안다면 분명히 달려가서 경고할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직장 동료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밟혀 죽어갈 것을 불쌍히 여기라. 그들을 구하라.

날마다 중보하라.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주님이 원하신다(벧후 3:9). 기회를 찾아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성령이 가르쳐주신 말씀을 전하라(요 16:8). 임박한 심판을 대비하고 구세주를 따르는 삶이 얼마나 복되고 값진 삶인지 보여주라. 고통 중에 더욱 빛나는 믿음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소망을 말하라. 마침내 주를 만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