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온유한 자, 모세 2
본문: 민수기 12장
설교자: 최종혁

 

모세는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옛언약의 중보자다. 그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사역 뿐 아니라 성품까지도 인간으로서 닮아 있었던 사람이었다. 예수님에게서 찾아 볼 수 있고 또한 모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중보자의 성품은 바로 온유함이다.

온유함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힘(자원, 권리, 재능 등)을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려는 마음의 태도로서 겸손과 관용과 마음의 평안으로 특징지어진다. 온유함은 오래 참음, 열린 마음, 사려 깊음, 배려, 양보 등의 열매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런 온유함을 원하신다. 특별히 상대적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더욱 온유함을 추구하라고 하시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온유하기 위해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온유함은 우리 죄의 본성, 즉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려는 우리의 욕망과 직접적으로 대치되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더욱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온유함은 우리 모두가 언제든 끝까지 추구해야할 성품이다. 어느 한 순간 나는 온전히 온유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할 시점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온유한 태도를 가져야 하고 시험이 왔을 때 그런 온유함을 드러내야 한다.

온유하지 못함의 예시가 미리암과 아론이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들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자리,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사용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나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관용이 이들에게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불안했다. 자신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예언하는 일에 다른 사람들도 참여하게 되자 이들은 자신들만의 또 다른 특별함을 추구했다. 그것을 얻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다른 이유를 내세우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시기하고 반역을 일으켰다.

이들이 내세웠던 이유는 모세가 ‘구스 여자’ 즉 이방인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거짓은 아니었고 그들에게 그런 충고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온유함 가운데 모세에게 자신들이 생각한 바를 전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원했던 것은 모세가 지도자로서 바로 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세만 가지고 있던 지도자로서의 특권을 원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2절)

그런데 왜 모세만 특별하냐!는 결론이다. 왜 우리에게는 모세와 같은 특권이 없느냐!이다. 미리암과 아론이 직접 이 말을 모세에게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모세가 절대 모르게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뒤에서 하는 말들이 다 그렇다.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결국 그 사람이 듣게 말한다.

모세도 이들의 말을 결국 들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는 어떻게 반응할까? 모세의 반응을 통해 온유한 자의 모습을 배워보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너희는 뭐가 잘났냐면서 대항해서 싸우겠는가? 어떻게 형, 누나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며 구석에 가서 울고 있겠는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세력을 불러 모아 이들을 축출하겠는가? 모세는 이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모세의 침묵

이들의 비방에 대해 모세의 반응이 나올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좀 의외의 말씀이 이어진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절)

모세가 들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다고 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듣지 못하시는 말도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단지 듣기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말에 대해서 무언가 행동을 취할 것임이 예견된 표현이다. 또 하나의 의외의 표현이 나온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3절)

굳이 여기서 모세가 온유하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두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2절에서 미리암과 아론의 말이 주장했던 것처럼 모세 자신이 자신을 높였던 사람은 아니었다. 미리암과 아론은 마치 모세가 “하나님이 나하고만 말씀하시니 내가 당신들의 리더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모세는 그렇지 않았다. “이 사람”은 강조의 표현이다. 그들이 비방하고 있는 이 사람, 백성들 위에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는 이 사람 모세는 사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11장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그의 영을 부어 주셔서 모든 백성이 선지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겠다고 하셨을 때 “제가 누구기에 바로에게 가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냅니까”,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정말 지도자로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의 지나친 겸손에 진노하기도 하셨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는 것처럼 자신을 더 높이고 특권을 독차지하고 하려던 사람이 아니었다.

둘째로, 이 말은 모세의 반응을 알려주는 힌트가 된다. 누나와 형의 비방과 반역의 말에 모세는 온유함으로 반응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온유함 가운데 말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시편 37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잘 기록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초조해하지 말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장에 얻기 위해 안달하며 더 나아가 화를 내지 말라. 37편 말씀을 보면 반복되는 말씀이 있다. “불평하지 말라”, “시기하지 말라”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1,7,8절)

특별히 시편 37편은 악인들이 잘 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인데, 사실 꼭 악인들만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린 이런 죄를 범할 수 있다. 불평하고 시기하고 더 나아가 분노하는 것이다. 미리암과 아론에게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모습이다.

이런 것들 대신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습이 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3,5,7,34절)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라는 말이다. 이런 자가 온유한 자다(시 37:11).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다.

모세가 여기서 보여주는 모습이 그렇다. 모세는 자신을 향한 비방의 말 때문에 초조해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분노하지 않았다.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 자신의 특별함을 내세우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곧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변호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4-5절)

마치 하나님은 싸운 아이들을 혼내는 선생님이나 부모처럼 세 사람을 따로 회막으로 부르신다. 회막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 임재를 드러내신다. 그리고 모세를 두고, 아론과 미리암을 또 따로 부르셔서 그 두 사람에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6-8절)

하나님은 1-2절에 기록된 미리암과 아론의 말과 태도에 대해서 지적하신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나 우리나 똑같다”는 전제 아래 그러니 당연히 우리도 같은 리더십,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는 너희와 다르다”고 하시면서 따라서 너희가 모세에 대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실 때 환상이나 꿈을 사용하셨다. 뭔가 다른 매개체가 있었던 것이고 그만큼 ‘덜’ 분명했다. 하지만 모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었던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에게 하나님은 대면해서(입에서 입으로) 즉 직접 말씀하셨다. 그리고 은밀한 말(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로 하지 않고 명백하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에게 자신의 뒷모습을 보이시기도 하셨다. 마치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세와 말씀하셨다(출 33:11).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고 십계명을 받아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나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었다(출 34:29-35). 모세는 후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 선지자셨다(행 4:22).

하나님은 미리암이나 아론에게도 말씀하셨지만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모세는 여러 선지자 중의 하나가 아니라 매우 특별한 직책을 부여 받은 언약의 중보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내 종”이라고 하시며 그 특별함을 강조하시고 그를 비방하는 것은 “두려워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신다.

미리암과 아론은 이런 차이를 모르고 있었을까? 그들도 알았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차이를 원하지 않았고 모세와 같은 특권을 원했던 것 뿐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그들이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는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모세 자신은 이런 차이를 모르고 있어서 가만히 있었을까? 자신을 방어하고 변호할만한 능력이 그에게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사실 모세 스스로가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너희들이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지팡이를 주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라고 하셨느냐? 200만 명이 넘는 남녀노소를 광야에서 이끌고 있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십계명을 받아온 자가 누구냐? 내가 그렇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을 때 백성들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타락하게 했던 사람이 누구냐?

모세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리암과 아론을 몰아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온유한 자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기다렸고 하나님은 모세의 편에 서서 모세를 변호하셨다. 그리고 이 모습은 온유하신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다. 욕을 당하셨지만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셨지만 위협하지 않으셨다. “나한테 이렇게 한 너희들, 전부다 지옥행이야! 내가 부활하면 전부 각오해.”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대신 공의로 심판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셨다.

이것이 모세에게서 볼 수 있는 첫 번째 온유함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을 내세워서 싸우기 보다 평안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기다렸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미리암과 아론을 꾸짖으신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형벌을 내리신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9-10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떠나셨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떠났다. 그리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피부가 하얗게 되었다. 처음 그가 모세를 비방할 때 ‘구스 여자’ 즉 피부가 검은 이방인과 결혼한 것에 대해서 언급을 했었는데, 미리암은 그에 대한 대가로서 피부가 하얗게 보이는 병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미리암만 나병에 걸리게 되었을까? 비방한 것은 미리암과 아론이지 않은가? 그 해답은 1절에 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에서 “비방하다”는 사실 여성형이고 단수의 동사다. 즉 비방한 주체가 여자인 미리암이었다는 말이다. 미리암이 주도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미리암이 아론과 함께 모세를 비방했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리더십에 대한 반역에 대한 대가로서 그 반역의 리더였던 미리암에게 궁극적인 책임을 물으신 것이다. 그래서 미리암에게 직접적인 형벌을 내리셨다.

 

모세와 아론의 중보

아론은 즉시 미리암에게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고 원인도 알았다. 그래서 모세에게 말한다. 단순한 말한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께 기도하듯이 모세에게 말한다.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도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10-12절)

아론은 심지어 모세를 ‘주’라고 부르면서 미리암을 위해 기도한다. 이제 아론은 자신과 미리암이 했던 일이 어리석은 일이고 하나님 앞에서 죄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도 정확히 깨달았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뿐임을 알고 있다.

모세는 또 다시 선택의 순간에 왔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침묵으로 답하고 하나님을 기다렸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그런데 이들이 이제는 모세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돕고 싶겠는가? 아마 여기서 침묵하고 싶을 수도 있다. 당신들이 했던 일을 생각해 보라며 쏘아 붙이고 싶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렇게 하신 일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하냐며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거절할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 내 마음이 좋지 않으니 나중에 생각해 보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세는 이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모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한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13절)

모세의 기도는 짧고 간결하다. 뭔가 아직 꺼림직하고 별로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급박하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드린 것이다. 모세는 부르짖었다. 기도의 내용에도 보면 “하나님 그를 고쳐주소서”라는 짧은 기도문 사이에 원어로는 “제발, 지금”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두 번이나 들어가 있다. 의역을 하면 “하나님, 제발 누나를 좀 빨리 고쳐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이다. 모세는 자신을 비방했던 미리암을 위해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혹시 예수님이 생각나는가? 예수님도 자기를 못 박고 옷을 나눠 제비 뽑는 자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이 모세가 보여준 온유함의 두 번째 모습이다. 자신의 힘을 자기를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남을 위해서는 기꺼이 사용한다. 그것이 설령 당장에 자기가 원하는 것과는 다를지라도 그렇게 했다. 모세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낮추며 평화를 추구했다. 이것이 온유함이다.

 

하나님의 응답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버지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가 이레 동안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 이에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그 후에 백성이 하세롯을 떠나 바란 광야에 진을 치니라”(14-16절)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평생을 그렇게 격리되어 살아야 했지만, 일주일로 형벌을 줄이셨다. 바로 미리암을 낫게 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하나님은 일주일의 시간을 통해 죄에 대한 결과를 미리암이 감당하게 하셨다. 그렇게 이 사건은 끝이 난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모세가 했다고 하면 딱 맞는 것 같다. 힘만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을까? 부당한 비방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고 비방한 자를 심판하고 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모세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는 하지 않았다. 가장 확실하고 정확하게 일하실 하나님께 맡겼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도전

모세는 왜 마땅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에서 왜 자기 힘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반대로 미리암과 아론, 그리고 우리는 왜 그렇게 우리 권리를 내세우고 싶을까?

질문을 바꿔보자. 내 권리를 내세워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당신의 힘을 사용해서 당신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고 더 영광 받으시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모세는 중보자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멸하시겠다고 할 때도 그는 중보의 기도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며 섬기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레위 자손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죽였지만 동시에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온유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알고 있고 기대하는 ‘온유한 모습’만을 보여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진 것을 보고 채찍을 만들어 사람들을 쫓아내셨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하신’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강력하게 선포하셨다. 하나님이 높임을 받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이 반대의 선택을 더 잘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데 내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침묵한다. 내 삶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드러나시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이 모욕당하고 무시당할 때는 참으로 온유하다. 그런데 내 억울함은 풀고 싶다.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내 권리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것을 위해 내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싸우고 다툰다. 갈등을 만든다. 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복수를 꿈꾼다. 그것이 마땅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인 것이다.

모세가 자기 권리를 내세워서 자신을 위해 싸우지 않았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약속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유함의 비법이 있다. 어떻게 온유할 수 있을까? 그냥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정말 죽을 때까지 분노를 삭히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 노력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좀 더 긍정적인 방법이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믿고 의지하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신뢰하는 것이다. 이상한 말 같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온유하지 못하다. 내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 때, 하나님은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나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언제나 최선이다.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한다.

 

롬 12:17-21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온유함 가운데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믿음에 하나님은 언제나 응답하신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을 하나님이 들으신 것처럼,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억울함과 어려움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가 아니라 약속이다. 그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믿고 내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사용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온유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