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회개한 자의 교훈(시 32)
본문 : 시편 32편
설교자 : 최종혁
표제를 보면 ‘다윗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에 총 13번의 마스길 표제가 등장하는데 ‘지혜,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지혜와 교훈이 담긴 노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8).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그와 같은 경험을 하는 백성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한 시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32편과 시편 51편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둘다 회개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뒤에 회개하면서 쓴 시입니다. 다윗은 거기서 주님께 자신을 회복시켜 달라고 말하면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51:13)라고 말합니다. 이 시편 32편이 바로 그가 회복된 이후에 사람들에게 교훈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쓴 시편이라고 봅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상황입니다. 시편 32편은 죄로 인한 괴로움과 회개로 인한 즐거움에 대해서 극명한 대조를 통해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생애 중에서 그 두 가지를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우리야와 밧세바의 사건인 것입니다. 32편의 배경이 어떤 사건이었든, 이 시편은 다윗의 경험에 기초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 정직한 자가 어떻게 죄의 문제를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그리고 이 교훈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모두 죄를 지으며 살기 때문입니다.
선포(1~2절)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2)
다윗은 먼저 복이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간결하게 선포합니다. 누가 행복한 자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행복을 누리고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힘들 때 누군가 격려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할 때 행복해 합니다. 자녀가 잘 자랄 때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크고 작은 행복들이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가치를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행복은 가장 궁극적인 행복입니다. 다른 어떤 행복과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에 대해서 말합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가치있는가 라고 말할 때 대답할 그 행복입니다.
시편 32편은 사실 구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볼 때 약간은 특별합니다. 구약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는 대부분 시편 1편과 같이 긍정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본으로 삼아야 할 길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복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진리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그런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항상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32편은 어떻게 죄인인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진정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은 사람, 자신의 죄가 가려진 사람,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 사람에 대해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뒤에서 설명합니다. 먼저 3번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죄에 대해 다윗은 3가지의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해서 하시는 일에도 3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죄에 대한 것은 “허물”, “죄”, “정죄”(죄악)입니다. 이것은 죄의 여러 측면을 생각하게 합니다.
“허물”이라는 말은 배반, 배역, 반역, 배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어느 편에 있다가 그 편을 떠나 다른 편에 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연히 혹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는 반역이라고 합니다. 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서 이 땅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편’이었습니다. 그것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 ‘죄’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인간은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나’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결국 그 말씀을 어기면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편에 있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과 라이벌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사탄이 먼저 그 편에 섰고, 우리도 거기에 동참했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죄를 범한 사람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합니다(롬 5:6~10, “연약할 때에”,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흑암의 권세에 있다고 말합니다(골 1:13). 본래 빛이신 하나님의 편에 있어야 할 자들이 어둠의 권세인 사탄의 편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입니다.
“죄”는 성경에서 죄를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서,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기준이 있는데 거기에 미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이 있는데, 우리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 혹은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최대한 노력을 해도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는데, 사실 우리는 그런 노력을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목표로 두고 그곳에 이르려고 하기 보다 자신의 다른 기준을 세우고 그곳에 이르려고 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자기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적당한 거짓과 갈등은 삶의 활력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따르면 죄인이 아닌 사람들은 많습니다. 누구도 죄인일 사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법을 만들고 그 기준에 따라 죄를 판단하여 사회 질서를 세웁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분의 기준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유죄입니다.
“정죄”(죄악) 첫 번째 죄에 대한 표현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초점이 있고, 두 번째 죄에 대한 표현이 ‘하나님의 법’에 초점이 있다면, 세 번째 죄에 대한 표현은 ‘우리’에게 초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 혹은 죄악은 ‘비틀어진, 일그러진’의 의미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뒤틀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10대의 반항적인 아이들의 태도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런 태도를 가진 아이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부모님이 말하는 것은 다 싫고 따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존경이 없는 것이고, 심사가 뒤틀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이 죄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고 자신들의 원하는 것만 얻으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마음이 멀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동기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안락만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대해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고 표현했는데(빌 2:15), 비슷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원하는 것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것이 곧 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를 범했다’ 혹은 ‘죄인이다’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냥 내가 무언가를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그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대적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고 그분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기 전이나 구원 받은 후나 죄는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후에 죄 때문에 지옥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죄는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려는 고집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주관자이시고 심판자이십니다. 구원 받은 자에게는 그분이 아버지가 되십니다. 죄는 언제든 가벼운 문제일 수 없습니다.
누가 이런 크고 심각한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있어 가장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가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 진정 복이 있는 자,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1,2절에서 우리가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해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 잘못이 100%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관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내 입장에서 내가 잘못한 것을 다 알고 이제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면 되는 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난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내가 죄를 범한 대상,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의 잘못을 용서해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죄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야 해결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3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허물을 사함” ‘사한다’는 말은 ‘들어 올린다’, ‘벗겨 낸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의 짐을 벗겨 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지고 있던 죄의 짐을 벗기셔서 우리의 죄가 우리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동과 서는 무한히 멉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렇게 멀리 옮기셨습니다.
“죄를 가림” ‘가린다’, ‘덮는다’, 혹은 ‘감춰둔다’, ‘숨긴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하나님께서 그냥 무작정 덮어 두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납하셨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도 없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실 때, 그것을 멀리 옮기시고 그것을 다시 보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죄를 다시 꺼내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하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잊어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동일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인이었는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면 그 죄를 더 이상 들춰내고 우리에게 불리하게 그것을 사용하시지 않으십니다. 만약 우리의 죄를 기록하는 종이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록을 지우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용서 받은 죄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수치를 당할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가리셨기 때문입니다.
“정죄하지 않음” 이 말은 우리의 죄를 죄로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를 의롭게 여기셨던 것처럼,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들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온전히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죄든지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그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전혀 우리와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시고 다시는 우리에게 불리하게 그 죄를 끄집어 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 영원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을 행복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십니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동기는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그분의 보혈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죄의 문제)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하나님의 해결방법: 은혜)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화목제물: 예수님)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칭의)”(롬 3:23-26).
하나님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피에 기초해서, 믿는 자들이 매일의 삶에서 범하는 죄들을 용서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이것이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신 약속이고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베풀어 지지 않았습니다.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바로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에서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설명합니다.
경험(3~5절)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3).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는 것, 즉 자백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다윗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드러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좋아하지만 그것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대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습니다. 입을 열게 되어도 일단은 빠져나갈 길을 먼저 만듭니다.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의 일에 했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해서 간음하는 죄를 범한 후에 다윗이 바로 그것을 자백하고 회개 했습니까? 그러지 않습니다. 그는 그 죄를 숨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잘 안되자 결국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는 또 다른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죄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죄를 죄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사한 마음입니다. 죄를 죄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 자백이고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3-4). 다윗은 자신이 계속해서 죄를 계속해서 숨기려고 했을 때 자신이 당한 고통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윗은 아마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종일 신음했고, 그 뼈가 쇠했습니다. 한 여름의 타는 듯한 더위에 메마른 땅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어 완전히 말라버린 것과 같은 상태가 자신의 상태였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쇠약은 육적인 쇠약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셨던 하나님의 손, 사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셨던 하나님의 손, 배고플 때 먹이고 쉼이 필요할 때 쉬게 하셨던 그 하나님의 손이 지금은 자신을 계속해서 누르며 괴롭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다윗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를 베푸시지만, 죄를 그냥 모른 척, 없는 셈치지 않으십니다. 절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사랑이 없어서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훨씬 유익하기 때문입니다(히 12:5-13).
하나님의 징계에 다윗은 결국 올바르게 반응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5). 1절에서 사용한 죄에 대한 3가지 표현을 여기서 그대로 다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허물, 죄, 죄악을 말합니다. 다윗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동안 숨기려 했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고 죄를 죄로 인정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윗의 죄를 아시고 모르시고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어떤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서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일입니다.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회개하는 자의 죄를 하나님은 ‘곧’ 사하십니다. 실제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서 그의 죄를 지적했을 때에 다윗은 바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회개했고 하나님은 바로 그를 용서하셨습니다(삼하 12:13). 마치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기다리시고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용서가 허구가 아닌 실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할 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숨기려 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그 죄를 드러내시고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죄를 드러내고 인정하면 하나님은 오히려 그 죄를 숨기시고 용서하십니다. 이것은 죄 문제의 해결이고, 다윗이 그 경험을 통해 배운 교훈입니다. 다윗은 이 교훈을 다른 자들과 나누길 원합니다.
권면(6~11절)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6). 경건한 자라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도 그가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그냥 죄에 둔감해서 아무렇지 않게 살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 죄는 누구나 지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죄를 감추려고 하면서 계속해서 두려움 가운데 살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합니다. 죄를 감추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 주 앞에 나가 죄를 자백하고 용서의 기쁨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언제가 ‘주를 만날 기회’일까요? 그런 날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죄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책망하는 그 때가 바로 주를 만날 때입니다. 그렇게 하는 자들이 복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그들의 은신처와 보호와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시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셀라)”(6-7). 죄를 하나님께 가져온 자에게 이런 복이 있습니다.
8-9절에서 다윗은 비유를 들어 이 교훈을 강조합니다. “내게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죄는 우리의 교만함과 고집을 포함합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만나기 전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것도 그의 교만과 고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회개하지 않는 자를 “무지한 말이나 노새”와 같다고 합니다. 강제로 따라오게 하지 않으면 따라오지 않는 그런 짐승과 같습니다. 그런 자에게는 어떤 즐거움도 없습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슬픔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0-11). 회개하여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약속입니다. 확신 가운데 나갈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악인에게는 이런 기쁨과 확신이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이제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자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놓을 자들을 위해 이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죄지 말라,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가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자들이 가장 행복한 자들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식의 시작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적용해보면 “진정한 행복의 시작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할 수 있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기쁨, 관계 회복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참 안타까운 것은 이미 큰 용서의 기쁨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삶의 죄에서 돌이키지 않아 지속적인 관계 회복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과의 관계는 신경도 쓰지 않을 정도로 무뎌 지지는 않았습니까? 언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죄에 대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까? 언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기도를 하셨습니까? 그것이 참으로 오래 되었다면, 어쩌면 내가 죄를 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죄에 둔감해 진 것일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죄책감에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자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다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기뻐하고 행복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죄인이라는 확실한 사실 하나일 것입니다. 회개한 자로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즐거움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