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낸 무리”라는 뜻을 가진 에클레시아가 말해주듯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무리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는 유명한 말처럼, 교회 역시 아직 성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항상 부정적인 사람이 있고, 직설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도 있으며,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 사람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과 몰래 나누는 사람도 있습니다. 쉽게 분노하는 사람이 있고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말하는 데 있어서,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배려가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덜 성숙된 부분이 다른 성도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성도에게 상처를 받는 일은 드물지 않은 일이며, 성도에게 받은 상처는 성도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반하기 때문에 더 깊은 아픔을 가져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보다 더 오래 기억되기도 하고 해결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시간이 해결해준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다가 때때로 다시 떠올라 성도의 친밀한 관계에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성도에게 상처를 받은 순간, 우리 마음 속에서 여러 가지 강력한 생각과 그에 따른 감정이 생겨납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면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 부분이 보이지 않나?’ ‘자기 자신은 얼마나 잘한다고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 맞나?’ ‘저렇게 말하면 내가 상처받는 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내 진심을 안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만가지 생각과 판단이 복잡하게 일어나는 내 마음을 정리해줄 수 있는 분명한 원리가 없다면 우리는 쉽게 우리 육체가 원하는 강렬한 욕구를 따라 상황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고스란히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로 인해 상처받는 순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분명한 성경적 사실이 있습니다. 그 사실들을 기억할때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떨쳐내고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성도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면 다음 10가지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어떠한 사랑으로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셨습니까? 대신하여 죽으실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피로 당신을 사신 것입니다. 요한은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실 정도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그 성도에게 받은 상처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자리잡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을 사랑하셨던 그 크고 풍성한 사랑을 그 성도가 동일하게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으로서 그 형제가 당신에게 빚진 몇푼의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십시오. 당신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를 자기 피로 씻어주사 당신을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 아래 당신 마음에 뿌리내리고 있는 그 성도에 대한 미움을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받은 자비와 용서를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받은 은혜를 헤아려보십시오. 그 성도의 죄를 덮을 만큼 충분히 받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18:33)

 

2. 하나님께서 그 성도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성도로 인해 상처받을 때, 쉽게 우리는 그 성도를 평가합니다. 덜 성숙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도 하고, 그 성도의 부족한 면들을 증오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성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결국 성도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평가로 귀결됩니다. 성도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그 성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평, 불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이 그 성도 안에서 이정도 밖에 일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도 화가납니다.’

성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기까지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당신은 절대로 의문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미리 정하셨고, 부르셨으며,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롬 8:30).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 성도 안에서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3.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통하여 당신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성장하기 위한 아픔이 존재합니다. 성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한 데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함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성장이 필요하며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 상처를 남기듯, 성도는 성도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서로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잠 27:17). 쉽게 말해 “상처”는 다른 말로 하면 “성장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실을 분명히 확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 “모든 것” 안에 당신이 받은 상처도 포함될까요?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성도와 부딪혀서 생긴 상처, 갈등, 어려움, 그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최악의 재앙 속에서 욥은 친구들의 잔인한 질책을 받아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온전히 굴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들에게 쫓겨나는 과정 속에서 시므이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깨우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상처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당신 안에서 지금 당신을 더 거룩하게 빚으려고 적극적으로 당신의 중심을 만지고 계십니다. 그 성도의 연약함이 당신을 다루는 도구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 도구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 것입니까?

 

4. 하나님께서 나의 연약함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상처 받은 사람은 피해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나는 결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무고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말에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성도에게 상처를 남기는 사람도 드물게 있지만, 상처는 일방적으로 생기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또 쌍방과실이 아니더라도 나 또한 그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성도의 연약함이 나를 거룩하게 빚어가는 도구가 되는 것처럼, 나의 연약함으로 다른 성도를 구원에 이르도록 만드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당신 역시 어떤 성도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처를 받는 순간, 당신은 어쩌면 그 성도의 잘못에 대해 심각한 판단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5. 하나님만이 당신이 믿고 신뢰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성도에게 받은 상처가 더 심각한 이유는 성도를 믿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이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고 해서도 안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별일 아닌 것으로 더 심각하게 싸우는 이유도 바로 그 신뢰의 문제에 있습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만큼 배신감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CCM가사 중에 “사람은 믿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할 존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참 명쾌하고 통찰력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사람을 신뢰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 안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불필요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에만 가져야 할 신뢰와 믿음을 사람에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실수합니다. 사람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망가질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럴 수 있는 존재”가 죄인인 사람입니다. 나 또한 이럴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만 믿고 신뢰하십시오. 실망과 배신감을 가져올 수 있을 만큼 사람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같은 사람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러니 당신의 믿음을 사람에게 온전히 두지 마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는 오직 실수 하지 않으시고 변함 없으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6.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명령은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서 예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상처받을 때 우리는 “바로 이 때가 예외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

내게 떨어지는 유익을 위해 성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잘해주니까 그래서 잘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라도 사랑하라”(마 5:44)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사랑합니다. 특별히 주 안에 있는 형제 자매를 우리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받았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주님은 당신을 언제나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멈추실 때가 있으십니까? 당신이 죄로 낙심할때,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에 가당치 않은 죄로 삶을 더럽혔을 때, 주님이 당신을 향한 은혜와 사랑을 거두어 가셨습니까? 만일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멈추지 않고 당신의 삶에 차고 넘치도록 쏟아져 내리고 있다면, 당신이 성도를 사랑하지 않고 성도에게 분노하고 성도를 정죄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당신이 상처받은 그 순간에도 너무나 명료한 명령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신실하게 부어주시는 사랑이 당신을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강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은 내가 성도를 돌아보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은 범죄한 성도를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 6:1). 바울은 이어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바로 위에 언급한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사랑은 단지 내게 상처 입힌 사람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려는 노력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물론 오래참고 온유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을 포함합니다(고전 13:4-7).

나에게 상처를 입힌 성도의 잘못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면 사랑은 단지 덮어버리는 것, 잊어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바로 잡아주는 것까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단지 잊어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내어주시기까지 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죄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성도의 사랑 역시 그 죄에 대한 권면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 성도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 태도에 담긴 죄의 문제를 지혜롭게 온유하게 사랑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으로 사랑을 다 쏟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녀의 실수와 잘못을 바로 잡아주는 훈계와 징계는 부모가 감수해야 하는 어렵지만 필수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징계 하지 않는 것은 사실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사랑이 아닙니다. 나의 편리함을 위해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죄 역시 반드시 사랑으로 바로 잡아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령한 자들에게 그 죄를 바로잡아 줄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상처 받았다면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사랑해야 합니다. 당신은 그 성도의 죄에 대해 겸손과 온유로 바로잡아 줄 수 있을만큼 그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서로 사랑하라”는 법을 성취해야 합니다.

 

8. 하나님은 내가 자신을 돌아보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갈라디아서 말씀의 뒷부분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사실 상처를 받을때 만큼 감정적 정신적 고통을 절감할 때는 없습니다. 배신, 증오, 분노…등 글로 읽을 때와 직접 이러한 감정을 느낄때는 다릅니다. 정말 그 순간만큼 아픔을 경험할 때가 없습니다. 그 때가 바로 나 자신을 돌이켜 볼 중요한 때입니다.

나도 다른 성도에게 그와 같은 상처를 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되는 때입니다. 죄를 범하여 나에게 상처를 준 성도를 보면서 나 또한 동일한 죄를 범한 적이 있는지 돌아보고 만일 그랬다면 이와 같은 고통을 누군가에게 경험하게 했다는 사실에 상한 심령을 갖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혹 그런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앞으로 이와 같은 아픔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죄의 대가라는 사실에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멀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 받은 순간, 우리는 이러한 기회들을 쉽게 날려버립니다. 당장 내가 받은 상처에 집중하고 내게 상처준 사람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 내가 범하지 말아야 할 죄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성도를 불쌍히 바라보지 못하고 교만이 가득차 성도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9.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상처가 깊어지면 사람들은 보통 소홀해진 관계를 내버려 두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회복시키고자 하는 소원도 없고 해결하려는 의지도 사라집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에 있으니 몇몇 성도는 그런 관계로 지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라고 말합니다. 건물의 비유를 가지고 건물과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쌓아 올려진다고 말하고(엡 2:22),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된다고 말합니다(엡 4:16).

물론 모든 성도와 같은 깊이의 친밀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관심사에 따라, 기호에 따라, 성향에 따라 서로 더 잘 맞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 교회의 지체로서 점점 그 연결지점이 희미해지고 하나됨에서 멀어지는 성도가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동일한 크기의 친밀함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친밀함이 점점 사라지는 성도가 있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성령께서 그 성도와 나를 하나로 묶어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엡 4:2)과 평안의 매는 줄은 바로 그 하나됨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해 최선을 다해 우리는 하나됨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사귐을 가질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간절히 구하신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10.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상처 받았을 때 우리는 보통 나의 상처를 공감해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상처 받은 사람이 가장 자주 범하는 죄가 비방입니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직접 찾아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유하게 해결하기 보다는 제삼자를 찾아가 상처 준 성도에 대한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쏟아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상처받은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사람보다 당신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 안다, 내가 다 알고 있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어떤 위로보다 강력한 격려와 힘이 됩니다.

아무런 잘못없이 억울하게 도망다녔던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히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주님은 아십니다. 당신이 당한 그 상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참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위에 언급된 것들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인 “사랑하라”와 “용서하라”에 순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당신과 당신에게 상처 준 성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힘을 더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당신이 당하는 억울함과 깊은 상처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계시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이 두신 아름답고 기쁘신 뜻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수만가지 생각과 판단들을 다 그 뜻 아래 굴복시키면 나를 괴롭히는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고 그 뜻 안에서 깊은 사랑과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상처로 인해 쓴뿌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장통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도록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부당한 슬픔을 당한 분은 없습니다. 그분의 입에, 그분의 행실에 더러운 악은 조금도, 아주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찢기시고, 상처입으셨으며, 맞으시고, 죽임당하셨습니다. 그 억울함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 고통을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의 죄가 그분에게 상처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습니다”(벧전 2:23). 그분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상처주는 사람을 욕하거나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의 나음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상처를 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그 길을 동일하게 걷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에게 상처줄 사람은 많습니다. 상처 줄 일이 앞으로도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 때마다 주님은 먼저 걸어가신 그 길을 제시하십니다.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십니다. 욕하시겠습니까? 나도 똑같이 상처를 주겠습니까? 비방하시렵니까? 관계를 끊고 무시하며 살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당신 대신 상처 입으신 주께서 당신에게 기억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사랑했는지 잊지 말아라”

“내가 너를 사랑한것처럼 너에게 상처 준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내가 너와 그 사람 안에서 주권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준 명령 ‘사랑하라’를 잊지 말아라.”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 사람을 세워주라.”

“그래서 하나가 되어 나를 세상에 드러내라.”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상처 받았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