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만물의 마지막,” 곧 바울이 경고했던 그 “말세”를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말세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통하는 때”입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 자신과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그 능력은 부인하는 시대입니다(딤후 3:1-7). 경건을 추구한다는 명목 하에 껍데기뿐인 종교생활과 형식적인 신앙을 유지하는데 급급하고 정작 알맹이는 보잘것 없이 쪼그라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 말씀에 대한 갈급함은 고갈되는데, 하고 있는 종교활동은 늘어납니다. 문제는 항상 그 중심에 있습니다. 중심이 메마른 신앙, 마음이 미지근한 신앙은 형식적으로 흘러가며 회칠한 무덤처럼 외식주의로 변질됩니다. 내 마음을 차지하는 수많은 세상의 유혹과 염려들을 쫓아내지 않으면, 반대로 영화롭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이 내 안에 가득 차지 아니하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아무리 훌륭한 프로그램과 활동을 한다 해도 말세의 극심한 영적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4:8) 바로 앞에 주어졌다는 것은 참 흥미롭습니다. 교회는 말세를 지나면서 점점 더 외로움을 겪고 있고 심지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심각한 교제의 빈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고 명령합니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전제조건처럼 말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초반에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적 사역, 복음에 대해 강조하고(1:1-12) 그 결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며 살것을 명령합니다(2:9-10). 그리고 가장 먼저 주어진 명령이 오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그리고 오늘 핵심 명령인 “정신을 차리라”(be clear minded)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신” 혹은 “마음”은 4장 1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 즉 육체의 극심한 고통인 사망에 이르기까지 죄와 치열하게 싸워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을 생각해볼 때 교회가 외로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서로 진실로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죄와 치열한 전쟁을 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또한 따라오는 명령인 “근신하라”(be…self-controlled) 역시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삶(6절)을 방해하는 여러가지 요인들 가운데 온전히 나의 삶을 통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모든 정욕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개인이 죄와 싸우는 것이 서로 사랑하지 못해서 생기는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을까요?’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성도의 영적 상태를 육신의 건강과 비교하여 생각해보고, 교회가 각각의 다양한 영적 건강상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모두가 아주 건강이 좋지 못하여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라면 어떻겠습니까? 모두가 입원해서 당장 자기 스스로 먹거나 입거나 화장실을 다닐 수 없는 상태라면 말이죠. 그들을 돌봐줄 수 있는 극소수의 의사들이 그들을 돌보기 위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회진을 돌아도 그들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일 모든 성도가 각자의 신앙의 경주를 제대로 가지 못하고 항상 죄에 져서 낙심한 상태라면, 영적으로 심각한 질병 가운데 처해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고, 죄에 무감각하며, 예배가 무미건조하고, 세상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여력 자체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편지하면서 다른 형제의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때 스스로를 살펴보고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명령하면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갈 6:4,5)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아주 명확합니다. 각각 자기 자신을 살피고 “각각 자기의 짐을” 지지 않으면 서로의 짐을 질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자기 짐 짊어지기도 버거운 사람이 남의 짐을 들어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죄와 싸우고 있다는 점은 어떤 면에서 서로에게 엄청난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죄와 싸우는 하나님의 군사들이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잡아먹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으로 한 믿음을 가지고 한 소망을 바라보며 이미 죄와 사망과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힘 입어 승리가 보장된 이 전쟁의 수많은 전투를 치열하게 치르고 있습니다. 이 영적 전장에서 성도는 서로에게 전우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싸움을 우리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만큼 서로가 처한 전쟁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고 공감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암환자에게 큰 동기를 부여하고 많은 공감대를 가져오는 사람은 똑같이 암을 겪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암환자에게 정말 강력한 위로와 격려와 큰 힘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암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낙심하고 좌절하여 자포자기한 암환자는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공감대를 충분히 가지고 있어도 위로가 되기 보다는 절망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성도 개개인이 치열하게 죄와 싸우는 것은 성도가 서로를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져옵니다. 낙심하고 넘어진 성도가 있더라도 그를 붙잡아 일으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발휘됩니다. 그가 죄와 치열하게 싸울때 그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서 비롯되는 힘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먼저 “정신 차리고 자기를 철저히 통제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자신의 간증을 통해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철저하게 죄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삶은 같은 것을 경험하는 성도들에게 참된 도전과 권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장에서 흙 하나 묻지 않고 상처 하나 남지 않는 병사가 없듯이, 죽을 때까지 어떤 바이러스도 침입할 수 없거나 건강상의 변화가 전혀 없는 사람이 없듯이 죄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롭고 완승을 거두어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는 신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죄에 대하여 철저하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싸우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모든 성도를 궁극적으로 일으키시고 계속해서 싸울 수 있게 힘을 주시며 최후 승리를 거두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그 분 안에서 더더욱 신자는 개인의 신앙의 경주를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죄와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보다 더 강렬하게 성령의 소욕을 갈망해야 합니다. 성도를 사랑하려면 그래야 합니다. 전우를 사랑하여 그를 붙들어주기 원한다면, 목적지까지 그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함께 이끌고 가기 원한다면 그래야 합니다. 교회가 외로움에 빠진 첫 번째 이유는 교회가 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거룩하라’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뜨겁게 살아있는 신앙에서 떠나 미지근하고 죽은 것 같은 신앙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참 교회는 그 도덕적 경건함에 있어서 세상과 확연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이상히 여겨 비방”할 정도로 교회는 세상에서 돋보였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었고 소금처럼 썩어가는 세상에 뿌려졌습니다. 오늘날은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참 어렵습니다.
음란과 정욕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술취함과 방탕함에 매여있습니다. 향락과 우상 숭배에 빠져있습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신자도 좋아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대로 신자도 살아갑니다. 말과 행동에 있어 육신의 정욕이 시키는 대로 계속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냉철하게 말해서 ‘정말 구원받은 자인가?’라는 의문의 발자국을 남기는 삶을 사는 신자가 셀 수 없이 많은 오늘날 입니다.
심각한 영적 손상을 입고 있으면서 다른 성도를 사랑하고 서로를 격려하여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돕는 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 올바른 길이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죄와 멀어져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으면서 남을 그렇게 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외로움에 빠진 교회가 그 외로움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시급한 것은 다시 한 번 잊혀진 명령 ‘거룩하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는 백성이 되라고 명받았습니다(디도서 2:14).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특별합니다. 성도가 나누는 사랑은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본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한일서 3:1)
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 한 가족인 우리만이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잘 도울 수 있습니다. 같은 처지와 상황에 있으면서 같은 대적과 싸우고 있습니다. 한 소망을 가지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한일서 3:2-3)
그래서 이 소망을 가지고 장차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우리는 그분의 깨끗하심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 소망을 찾는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요한은 계속 “우리”라는 표현을 씁니다. 네, 그렇습니다. 교회가 함께 이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각자가 죄와 치열하게 싸워 그리스도의 힘과 지혜로 승리해야 하고, 다른 성도를 격려하고 권면하여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교제이며 섬김입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합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병들 수 있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경주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싸움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칠 때까지, 의의 면류관을 주실 하나님이 나타나실 그날 까지 우리는 전진해야 합니다. 그러니 다시 힘을 내서 일어납시다. 다시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무장합시다. 나를 철저히 통제하여 죄와 치열하게 싸웁시다.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분을 따라 거룩함을 추구합시다.
외로움에 빠진 교회, 그들이 회복해야 할 것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뜨거운 열정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형제 사랑의 연료가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