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그리스도인과 교회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8-9절

설교자 : 조정의

벧전 3:8-9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지금까지 베드로전서 말씀을 통해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삶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종할 것과 사환들에게 주어진 명령, 아내와 남편이라는 관계에서 구원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특정한 대상에 대해 말씀을 해왔다면 이제는 마지막으로 “너희가 다”라는 구절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구원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본문 말씀은 짧은 구절이지만 분명하게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즉 ‘교회 안에서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교회를 대항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즉 ‘교회 밖에서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교회가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와 목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교회 안에서의 삶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8).

여기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서로 간에 반드시 가져야 할 5가지 미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제자들까지 계속해서 성도들에게 했던 명령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다시 다섯 가지로 모아서 성도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석가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임의로 뽑은 미덕들이 아니다. 손의 다섯 손가락처럼, 그 미덕들은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며 서로 협력한다. 그 모든 것의 비결은 은혜의 사랑이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사랑, 불쌍히 여김을 반영한다.” 이 다섯 가지 미덕은 한 손에서 뻗어나간 손가락처럼 하나의 중심에서 흘러나와 서로 하나가 되는 미덕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강한 동력과 동기가 됩니다.

이제 그 다섯 가지 미덕이 무엇인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연합(“마음을 같이 하여”)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방에서 설거지 하나 하는데도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제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어머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장모님이 오시면 또 그분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주방을 셋이서 사용한다면 큰 싸움이 나겠구나 싶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생각이 다 다릅니다.

성도간에 연합한다는 것은 획일적인 하나를 만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의 분명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됨의 아름다운 모델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자 독립적으로 완벽하신 분이고 각자 주권과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의 뜻을 위해 세분이 완벽하게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마지막 날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하십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연합을 이루시는 것처럼 구원받은 우리들이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를 하나로 묶어주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 한 성령 안에서 한 세례를 받았고 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또한 그 하나님 안에서 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가 당연히 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엡 4).

베드로는 2:9에서 그 하나됨의 목적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분명한 목적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7).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미덕입니다. 하나님이 연합하신 것처럼 우리도 연합을 이뤄야 합니다.

공감(“동정하며”)

공감한다는 것은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고통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우리는 이렇게 감정을 나누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우리를 한 몸으로 비유하는데, 한 몸이라면 더욱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발이나 손을 다쳤는데 그 부위만 아프고 다른 몸이 멀쩡한 것이 아닙니다. 이가 아파도 밤새 잠을 못자지 않습니까. 한 부분이 아프면 몸 전체가 힘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한 지체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그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 우리는 마땅히 공감의 미덕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감정을 공감하고 서로 나누기 위해서는 관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sympathize)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히 4:15).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함께 공감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에 대해 체휼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성도는 한 몸된 원리에 따라 감정을 공유해야 합니다. 말세에 이렇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말세의 특징이 바로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느끼고 살아가는데 바빠서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교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우리는 성도간의 감정을 공유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구역집회를 통해 성도들이 서로 삶을 나누게 하고 있습니다. 지체들과 삶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미덕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사랑(“형제를 사랑하며”)

이 사랑은 가족으로서 느끼는 끈끈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여러 미덕 중 사랑이 가장 핵심적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공감하기도 어렵고 연합하기도 어려우며 동정이나 겸손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없이 형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벧전 1:22).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자연스레 솟아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생겨나는 본능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히 2:10).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이 말씀을 주목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부인하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동력이 됩니다.

저는 저의 힘으로가 아닌 저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그 사랑의 구체적인 특징이 나타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자랑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 사랑은 이러한 삶의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동정(“불쌍히 여기며”)

이것은 상대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이해해주며 나아가 용서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미덕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도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긍휼(불쌍히 여김)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불쌍히 여겨, 새로 더해진 성도가 있을 때 자신의 물건을 팔아서 부족한 성도의 필요를 공급했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엡 4:32).

이것은 앞에서 제시했던 미덕들보다 더욱 힘든 것입니다. 특별히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교회 안에는 함께 하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정말 함께 있고 싶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원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 네 번째 미덕, ‘불쌍히 여김’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그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에게 악한 것이 있다면 그가 현재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만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기억하십니까? 만달란트 빚진 자로서 자신이 용서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 가능합니다. 나에게 악하게 구는 그를 생각하면 용서하기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그보다 많은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용서하셨다는 것, 내가 더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반복적으로 짓고 있는 죄들을 어떤 형제가 나에게 짓고 있다면 내가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 아들의 보혈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도 용서를 받은 자로서 서로 용서하는 것이 마땅치 않냐고 말씀하십니다.

겸손(“겸손하며”)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겸손은 위대합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고 싸우고 있을 때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부르지만 서로 누가 크냐고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따라야 할 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우리 모두는 이 예수님을 겸손히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가져야 하는 미덕입니다.

성도들은 한 목적을 가지고 연합되어야 하고,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감정을 나눠야 합니다. 또한 피차 뜨겁게 사랑해야 하고, 서로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히 낮추고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구원에 합당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2. 교회 밖에서의 삶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9).

이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미덕을 잘 드러내고 있다면 오늘날처럼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많은 욕을 먹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욕먹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연합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불쌍히 여기거나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을 온전히 순종한다 하더라도 세상은 교회를 미워할 것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진리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교회가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반드시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되갚는 것’이고 해야 할 것은 ‘축복’입니다.

되갚는다는 것은 복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되갚아주고 싶어합니다. 복수를 완벽하게 할 때 후련함을 느낍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우리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세상의 원리에 반합니다. 절대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것이 당연하다, 나에게 그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수는 악을 풍성하게 늘리는 일입니다. 절대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에 대해 교회는 되갚는 것으로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서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설교를 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4). 사도 바울도 동일한 명령을 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교회가 반드시 할 일은 ‘축복’ 즉 복을 빌어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수많은 모욕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영의 천사들을 ‘오라’ 한 마디만 하시면 끝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예수님을 감히 모욕했던 수많은 이들에게 보복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입을 여셔서 하신 말씀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였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신 모습입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님이 바로 오늘 이 명령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신 분입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의 본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악을 악으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선을 베푸는 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럴 때 악이 종식되고 선이 선포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정의와 공의를 실현시키는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우리는 세상의 위협과 모욕 가운데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이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 선을 행하는 책임만 있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축복의 방법으로 4가지를 제시합니다. ‘사랑하라’(요 13:34), ‘기도하라’(마 5:44), ‘감사하라’(롬 1:8), ‘용서하라’(눅 17:4)가 그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3. 삶의 이유와 목적

우리는 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 이유와 목적이 다음 말씀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9)

우리가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는 티켓이나 얻고 이 땅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고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주님은 자신이 가신 그 길을 동일하게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미덕들이 모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부르심에 따르겠다고 동의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도 되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이기도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직원이 충성스럽게 일할 때, 성도가 서로 사랑하고 연합할 때 그들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님이 제시하신 길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동시에 우리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까. 구원의 목적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복인 것입니다. 이 복은 영혼의 구원과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 성도간의 행복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 막사에서 함께 군생활을 하는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 병사가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데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다른 병사가 있었습니다. 욕을 하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진흙이 묻은 군화를 던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그는 진흙 묻은 군화를 잘 씻어 말려서 다음날 주인 곁에 가져다 두었다고 합니다. 그를 괴롭혔던 병사는 부끄러워했고 그 일로 몇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어찌보면 나약하고 연약해 보이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바보 같다고 할 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크신 권능과 영광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왜 그런 처절한 죽음을 택하셨을까요? 그분이 그렇게 하심으로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덕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길을 걸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세상이 손가락질 하더라도 이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님의 본을 따라서 이 길을 함께 걸어가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