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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의 잘못된 예로는 우화적인 성경해석이나 영해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대표적인 영해의 예는
구약의 성막의 여러 가지 부분들을 그리스도와 억지로 연결하려는 해석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막이 상징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성막의 밧줄이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며
성막의 휘장의 홍색천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해석하는 것에는
“억지스러움” 혹은 “불확실함” 등의 영해의 폐해가 존재합니다.

상징과 비유는 전체적인 그림이 보여주는 것이지
상징과 상징하는 대상의 모든 디테일이 일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우 같다”라고 말할때
여우의 전반적인 특징 (아마도 우화 속에서) 간사하고 요망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여우의 모든 디테일, 즉 꼬리가 있고, 네발로 걷고, 음식을 산채로 먹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이러한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상징적인 의미들도
전체적인 그림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이지
상징의 모든 디테일이 상징의 대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숲을 간과하고 나무에 집착하여 생기는 해석의 문제는
비단 영해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올바른 강해설교를 위한 관찰 및 해석의 과정 속에서도
얼마든지 “숲을 보지 못하는 성경해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주로 이러한 해석은 서신서보다는 역사서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예1) 창세기 50장 15-21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많은 설교자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참된 용서”라는 주제로 설교를 합니다.

주로 이런 개요를 가질 수 있습니다.

1. 용서할 수 있는 힘

1) 하나님만이 재판장되심을 인정 (19절)

2)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해 (20절)

 

2. 진정한 용서의 모습

1) 용서를 뛰어넘는 자비 (21a)

2) 용서를 뛰어넘는 위로 (21b)

개인적으로 이러한 해석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먼저,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해봅니다.

“창세기의 중심내용이 무엇인가?”

 

창세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1-2)
하나님께서 천지를 심판하신 심판자이시며 (7-9)
인간이 죄를 범하였을 때 (3-6, 11)
계속해서 노아 (6-10), 아브라함 (12-25), 이삭 (21-27), 야곱 (25-50)을 택하시어
그들과 언약을 당신 스스로 맺으시고 그 언약들 (노아-9/아브라함-15/17)을
사람들의 온전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지키시는 모습이
창세기 전반적인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특별합니다 (창 17:4-8)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러한 놀라운 언약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창 15:13-16).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놀라운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가는 지
출애굽기부터 여호수아까지 그 언약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생생한 역사적인 기록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욱이 이 아브라함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새 언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한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이
그 안에 담겨있음을 신약성경 (벧전 2:9-10)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심을 가지고 다시한번 창세기 50장 15-21절을 살펴봅시다.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을 주격으로 이 본문을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당신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요셉을 선택하셨습니다. 그에게 어렸을때부터 꿈을 보여주셨고 (37)

형들이 그를 해하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50:20a).

요셉이 시위대장의 집에 팔려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하사

범사에 형통케 하시고 (39:3) 요셉을 위하여 그 집에 복을 내리십니다 (39:5)

억울하게 옥에 갇히었을때 하나님은 요셉을 떠나지 않으니고

항상 함께 하사 범사에 형통케 하십니다 (39:23).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위하심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요셉을 삶의 모든 부분에 함께 하심으로 요셉을 통하여 지키신 것입니다.

그 언약의 약속대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심입니다 (50:20b).

요셉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이용하시는 이유를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창 50:24)

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경험한 모든 험한일들, 형들의 죄악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허락하셨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며

당신이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것입니다.

전자와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전자는 단순히 요셉이 했던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요셉이 용서했으니 우리도 용서하자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숲을 보지못하는 성경해석입니다.

창세기가 기록된 목적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요셉의 용서처럼 우리도 용서하라고 기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어떻게 당신의 뜻을 이루셨는지를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자처럼 창세기 50장을 가지고 우리는

요셉의 용서의 예를 우리들의 삶에 용서의 본으로 적용할 수 없는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는 전자도 좋은 교훈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진정한 용서의 모습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자의 해석은 창세기 50장의 중심내용이 아니라

그 중심내용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전자가 나무를 세밀히 살펴보고

그 나무에 대하여 바른 관찰을 보여준 것이라 말씀드릴 수 있지만

숲을 온전히 반영한 해석은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자칫 전자와 같은 해석을 강조하여 사용하다 보면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이 성경의 본문에서 멀어지고

핵심내용인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이 간과되기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더 분명한 말씀은 잠언과 서신서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창세기 50장은 그런 용서의 좋은 예로서 사용되기에 충분하지만

본문자체가 용서를 위해 기록되었다고 하기에는 “억지스러움,” “불충분함”이

존재합니다.

예2) 마태복음 4:18-22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첫 번째 예에서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바를 말씀 드렸으니

두 번째 예시에서는 간단하게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석1)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제자의 자세

해석2)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심

저는 해석2를 본문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경우

한번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3번에 걸쳐 부르시고 나서야 온전히 예수님을 좇는 것을

공관복음을 비교하여 살펴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복음서 전반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였으며

계속해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믿지 못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평범하고 이해와 믿음이 부족했던 자들을

당신의 12사도로 삼으시고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사랑하시고 섬기심으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때에 기둥으로 삼으시어

몸 된 교회를 강력하게 세우시는 모습을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들을 선택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주인공이시며

그들의 순종하는 자세가 중심 내용이 아니라

그들의 부족함과 관계없이 그들을 제자로 삼아주신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이

본문의 중심 내용인 것입니다.

해석1 처럼 즉각적인 순종을 우리는 교훈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본문 자체가 즉각적인 순종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의 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가르치신 부분들이 있으며

제자로서의 삶의 마땅한 바에 대하여 서신서들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분명한 가르침에 대한 예시로 사용되기에 충분하지만

본문 자체가 제자의 즉각적인 순종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억지스러움,” “불충분함”이

존재합니다.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줄 아는 균형잡힌 성경해석

성경이 기록된 목적에 맞게

그리스도중심의,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이

우리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묵상할때에 강력하게 자리잡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