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실까?
본문: 사사기 6장 1절 ~ 40절
설교자: 이병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몇 가지 비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공기와 같습니다. 너무 당연하고 익숙해서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햇볕이 따가울 때 그늘이 간절해지면 그때서야 생각이 납니다. 내가 필요할 때 그 때만 찾을 뿐입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배우자와 같습니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줍니다. 빼놓고는 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누구보다 나에게 중요하고 누구보다 나와 가까운 사이입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배우자와 같을 때도 있지만 나무나 공기와 같을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일상적인 일이 되어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는 나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도 아닌데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신경이나 쓰고 계실까?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나와 함께 하실까?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 멀리 계시는 것 같고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분 같을 때도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실까요? 때로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의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지금 나에게 벌어진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지금의 현실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같이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이런 어려움이 있는 걸까?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왜 내 기도를 외면하실까? 의심이 생기기도 하고, 여러 생각들이 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다행히 이런 생각과 고민을 했던 것은 우리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기드온입니다. 주일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300명의 군사로 수많은 적을 물리친 큰 용사입니다.
그런데 사실 기드온은 처음부터 큰 용사라고 불릴만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심했고, 겁이 많았습니다. 계속 의심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부인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드온이 어떻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과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나타내시면서 겁쟁이 기드온을 큰 용사로 빚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의 현실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어떻게 함께하심을 나타내셨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기드온의 오해를 제거하셨습니다. 기드온이 자신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는 장면입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13)
기드온이 하는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상들이 경험한 기적들, 애굽에서 나온 놀라운 일들이 지금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버리신 것이다.
기드온은 지금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떠했기에 기드온이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1)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은 칠년 동안 미디안 족속에게 이스라엘을 넘겨주십니다. 그래서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데,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백성들은 산에 웅덩이나 동굴같이 숨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미디안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5) 미디안이 장막을 가지고 왔습니다. 장막을 가져 온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이스라엘 땅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뿌리를 뽑겠다는 겁니다. 그들은 짐승들을 이끌고 와서 닥치는 대로 먹어치웁니다. 수많은 사람과 짐승들이 마치 메뚜기 떼와 같았습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않았고 가축들도 빼앗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생활은 갈수록 더 궁핍해져갔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7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에 기드온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기드온의 이 말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14)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여기서 지금 누가 말씀하고 있나하는 것입니다. 분명 기드온 앞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었는데, 지금은 여호와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이르되’라고 기록되다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었다가 다시 ‘하나님의 사자가 이르되‘라고 기록됩니다. 구분 없이 같은 대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 다시 말해 여호와의 보내심을 받은 자가 동시에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보낸 자가 하나님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심부름으로 누군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심부름을 간 그 누군가가 바로 제가 됩니다. 우리 논리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말이 되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면서 오히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여기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기 전에 구약에서 종종 나타나셨던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가 가서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었고 그 응답으로 너를 보내노라. 너는 내가 보내는 용사다. 옛적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처럼 지금 이 세대의 모세는 바로 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 하셨고 그들의 악을 다루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생각하는 그 문제를,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그 어려움을 기드온에게 해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16) 미디안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메뚜기 떼와 같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이 그 많은 수를 대항하여 싸우는 일이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여러분, 이 한마디면 되지 않습니까? 내 앞에 있는 어려움들, 답답한 상황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너무 지치고 힘들고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한마디면 버틸 힘이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에 커다란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상황은 변하지 않지만 그 상황을 다르게 보는 힘이 생깁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문제를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현실을 만날 때 그 때에라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힘들지만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 어려운 상황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해되지 않는 그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시며 그 뜻대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어떻게 함께하심을 나타내셨습니까?
둘째로 하나님은 기드온의 우상을 제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명령하십니다.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25) 기드온 집안을 생각해보면 기드온이 이 명령을 따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그 성읍의 유력한 자였습니다. 기드온을 처음 소개하는 장면에서 기드온이 사는 성읍 ‘오브라’가 아버지 요아스에게 속하였다고 말씀합니다(11). 또한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단도 요아스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이 제단”이라고 말씀합니다. 요아스는 성읍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요아스가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먼저 바알의 제단을 없애고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에 대해서 기드온은 어떻게 합니까?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27)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가서 말씀하신 대로 행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두려워서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이 일을 했지만, 자신의 집안이 섬기던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그들 주변의 적, 미디안 족속을 물리치기 전에 먼저 그들 가운데 있는 적, 우상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가장 먼저 없애야 하는 적은 바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있는 우상을 먼저 제거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기드온은 그가 행한 일로 인해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그 위기는 요아스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한 아들을 변호하며 성읍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편에 서는 일을 하게 만듭니다. 기드온이 순종함으로 얻은 어려움이 오히려 그 집안의 복이 된 것입니다.
그 순종으로 인해 그와 아버지의 집은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됩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이 일로 인해 별명이 생깁니다. 그것은 “여룹바알”입니다. ‘바알이 그와 다툴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드온은 바알과 다투는 자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우상을 제거했고 기드온의 순종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는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하심을 나타내시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없고, 그런 일을 경험할 수 없다면 조용히 나 자신을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가?
나는 그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나는 기꺼이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의 최우선 순위에 하나님을 두고 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다양한 방법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움이 앞서고 여러 생각들이 나를 복잡하게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 말씀대로 그냥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용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십니다. 나는 단지 그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여러분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그 복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어떻게 함께하심을 나타내셨습니까?
셋째로 하나님은 기드온의 의심을 제거하셨습니다. 드디어 이제 싸울 때가 되었습니다. 7년 동안 참았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했고 기드온은 백성들을 모읍니다. 미디안과 전쟁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모여 기드온을 리더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후에 지금 이 중요한 시점에서 기드온은 무엇을 합니까?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37) 기드온은 하나님께 표징을 구합니다. 하나님이 이 기적을 행하시면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지 알겠다고 말합니다.
이 요청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게 하시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기드온에게 표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 표징을 보고나서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한 번 더 기적을 요청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행하시기를 구합니다.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에는 이슬이 내리기를 구합니다.
여러분이라면 기드온의 이 요청을 듣고 어떻게 했겠습니까? 저라면 기드온이 자고 있는 잠자리에만 이슬이 넘치도록 내리게 하면서 ‘이 일을 너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겠다’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와 같지 않으십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은 기드온의 요청을 또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십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행하신 이 일은 은혜입니다.
그럼 우리도 이러한 은혜를 구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기드온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의 요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의심을 제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것을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반복해서 했던 말에서 잘 나타나있습니다. 36절과 37절에 이렇게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미 말씀하심 같이”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그 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미 말씀하신, 기록된 성경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기드온처럼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며 믿을만한 다른 것을 구한 것처럼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더 분명한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확신을 얻으려고 뭔가 특별한 일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족함 그대로, 불안함 그대로, 믿지 못하는 그 마음 그대로,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나와 함께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구하십시오.
무엇을 구할까요? 기적을 구할까요? 아닙니다. 내가 확신할 수 있도록 기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 없이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십시오. 꾸밈없이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아와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9:24) ‘하나님 제가 믿습니다. 하지만 저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런 솔직한 고백이, 그런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기적이나 뭔가 특별한 경험이나 사람이나 무엇이 되었든지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믿음의 기초를 둔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원하는 대로 특별한 기적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 일을 통해서 믿음이 든든해지기보다 또 다른 기적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의심은 기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의심된다면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 하나님께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그 의심을 제거해주실 것입니다. 믿음을 허락하시며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기드온을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기드온은 큰 용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할 수 없다고 하며 계속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기드온은 사사들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그 어떤 사사들보다 더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라고 부르셨습니다. 왜일까요?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12) 기드온이 큰 용사인 것은 기드온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용기와 그의 재주와 그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그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큰 용사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큰 용사라고 말하기에 부끄러운 자들입니다. 큰 용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주 넘어지고 반복해서 실수하고 또 다시 그릇 행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늘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붙드시고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 사실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놀라워서 감동하며 그 뜨거운 마음으로 더 주님을 위해 살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그 은혜로 다시 주님을 위해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 나의 환경이 아니라, 나의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의심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부족한 자를 통해서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