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초조해하지 말라 2
본문: 시편 37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37편에서 다루는 상황, 시편 기자가 마음에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은 악한 자들(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악행을 하고 그들이 형통한 세상 속에서 의인들(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부정형의 명령과 이유들로 주어진 말씀들이었고, 오늘은 긍정형의 명령과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부정형에서는 특별히 불평하거나 분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부정형의 명령은 악인들의 형통에 대해서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말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악인의 형통은 아무리 길어봐야 이 땅에서 살 동안입니다. 그것이 정말 실제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면 우리도 추구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데 우리에게 좋아 보인다면 그것은 이겨야 할 유혹일 뿐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버티고 이겨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의 현재는 온전히 미래를 위해 희생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사실 이런 생각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고행의 삶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긍정형의 명령과 이유 “하라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

“여호와를 의뢰하고”(3절)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5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7절) “여호와를 바라고”(34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3절) 힘든 상황에서 불평, 불만, 분노, 시기, 질투를 버리고 대신에 우리가 가져야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원래 이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쉽게 말하는데, 어떤 상황 속에 있을 때 ‘내가 이런 사람이 맞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부부 상담을 보면, 많은 경우에 아내와 남편은 자신이 잘한 것만 기억하면서 자신이 크게 잘한 것은 없을지 몰라도 그렇게 나쁜 아내나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평가가 아니라 반대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들어봐야 합니다. 대부분은 상대방은 전혀 다르게 같은 일을 보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우리가 좀 깊이 생각해 봐야합니다. 때로 우리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한 번씩 믿음의 행위를 하는 것이 내 전체의 삶을 대변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일은 하나님 믿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혹은 반대로, 믿음이 없는 것을 당연한 것,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악인들의 악행이나 형통을 보면서 불평하고 분노하고 시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련이 없을까요? 분명히 관련이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만날 때 상황이 충분히 그러하니, 나는 분노하고 시기 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다, 이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나에게 그 정도 자유는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업을 하면서, 부부나 자녀와의 관계에서,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다양한 상황을 만납니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이 이런 죄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죄를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련이 없을까요? 그런 상황을 허락하신 것이 하나님이시고, 그 상황을 통해서 선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영광 돌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상급을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죄를 짓는 것, 믿음 없음을 보이는 것을 직접적으로 “하나님 미워!”, “하나님 못 믿겠어!”라고 말해야 죄 짓는 것이거나 불신의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악한 자들의 악행에 대해 불평하고 분노하거나, 혹은 그들이 결과적으로 얻는 형통한 길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 즉 불신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평과 시기나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그런 생각을 한 번하고 그런 마음을 한 번 먹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력하게 “믿습니다.”라고 주문처럼 외우는 것도 진정한 신뢰는 아닙니다. 실제로 내 길(상황, 삶)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5절) 믿음의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 앞의 상황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맡기다”는 말은 원어적으로 ‘굴리다’입니다. 다윗은 마치 짐을 지고 있던 사람이 짐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그 짐을 굴려 보내서 더 이상 자신이 짐을 지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불평과 시기가 나올 수 있는 그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비슷하게 말했습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가 염려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내가 죄를 선택하지 않으면 금전적인 손실이 있을 수 있고 평판에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 뒤에 내 입장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서 거짓말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적으로 맡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못미덥기도 하고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전적으로 맡기지는 못할 때가 많고, 전적으로 맡기지는 않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할까요?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5-6절)

다윗은 아주 단순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그분께서 행하십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한 것들, 그래서 선택한 것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은밀하게’가 아니라 ‘빛같이’ 드러내실 것입니다. 밝은 곳에서 네가 선택한 것이 맞았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할 것 없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분으로 내가 그분을 믿었다면, 끝까지 나를 돌보시고 인도하실 것도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지옥에서 건져내신 그분을 믿는다면 지금 이 땅에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분을 믿는다면 맡겨야 한다. 내 생각에 이게 더 좋은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워보이고 융통성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맡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나보다 지혜로우시고 강하신 것을 안다면, 그분께 맡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굳게 마음먹고 “하나님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할 때, 즉시 뭔가 상황이 달라지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바라고”(34절)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7절) 기다려야 하고 기다릴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결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9~11절)

다윗은 지금 구약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기억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속 받을 자들은,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악한 일을 통해 형통해 보이는 악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본문의 11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약속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원리는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릴 자들은 지금 악한 일을 통해 잘 되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보는 것’을 자주 언급합니다. 지금 우리가 흔들리는 이유가 ‘보는 것’ 때문이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보는 것이 내가 믿는 것과 다릅니다. 악행하는 자, 악과 타협한 자들이 더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자세히 보아도’ 그 악인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라는 말입니다(35~36). 지금 악인은 의인 치기를 계획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악인을 치는 날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12~13절)

악인들의 눈에 그들의 계획이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보이고 그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고 그들의 활은 부러지리로다”(14~15절)

악인들의 계획은 궁극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를 나타내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이런 일들을 작게나마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는 이런 통쾌한 일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시면서 하셨던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합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은 항상 계획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더디게 보일 수도 있지만 결코 하나님은 늦지 않으십니다. 그 약속은 결코 거짓되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16절은 다시 한 번 이 땅에서 우리가 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소유가 적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풍부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체의 전부는 아닙니다. 실체는 이렇습니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그들은 환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나,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17~20절)

악인이 가진 풍성한 것은 사라질 것이지만, 의인이 가진 적은 소유는 영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실체입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악인들이 많이 가진 것 같고 의인들이 적게 가진 것 같지만 실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없어질 것이 많은 것보다, 영원한 것을 가진 것이 더 낫습니다.

악인의 풍부함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 얻는 것이지만, 의인의 적은 소유는 의로운 행위의 결과입니다(21). 그들의 궁극적인 결과는 이렇습니다.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22절)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결국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될 실체입니다. 지금은 감춰져 있습니다. 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라

“선을 행하라”(3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27절) “그의 도를 지키라”(34절)

기다린다는 것은 수동적인 일입니다. 때로 우리는 기다린다는 말을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고 맡기는 것도 그냥 손을 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에 있어 그 결과에 있어서 염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30~31절)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두고 그에 따라 말하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적지만 은혜를 베풀고 주는 사람들입니다(16, 21, 26). 그들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27, 29). 또 그들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십니다(28, 32~33). 하나님께서 의인들을(믿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 이들)을 보호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3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34절)

22절의 결론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할 이유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악인의 형통함을 분명히 보는 것처럼 그들의 멸망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현실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미래만 보면서 지금을 온전히 포기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사실 맞습니다. 미래의 복이 현재의 어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우리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할 수 있다면 좀 고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기에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하십니다.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3절)

선을 행하는 자(하나님께 신실한 자)에게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성실하심을 나타내시고 그들을 돌보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23절부터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23~24절)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붙드십니다. 때로 그들이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완전히 무너지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25~26절)

다시 말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무조건 이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 끼라도 굶게 되거나, 자손이 복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일반 원리를 말하는 것이고, 다윗 자신이 그것을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다윗은 여기서 ‘자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선을 행하는데 있어 내가 당하는 어려움도 그렇지만 자녀가 당하는 어려움도 생각하게 되면 유혹은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녀들도 돌보실 것이라 말합니다.

37~40절에서 다윗은 주변을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결국이 어떠한지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변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을 보십시오.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것이 진리가 아닙니까? 정말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긴 자가 그 삶의 끝에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내 인생의 최대 실수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성실로 먹이시고 돌보십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선을 행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도전

시편 37편의 말씀은 한 마디로 ‘제발 초조해하지 말라’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믿음과 달라도 초조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그 계획에 따라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초조해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두렵습니다. 지금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합니다. 지금은 오히려 세상의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 같고 그들이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이니 안달이 나고 초조합니다.

 

그럴 때,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며 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라는 것이 시편 37편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명령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4절)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자들의 형통함을 볼 때, 유혹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나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즐기고 누리는 것을 나도 즐기고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나의 기쁨이 이 세상의 것에 있으면 앞서 언급한 모든 명령들에 순종하려는 노력은 참 공허하고 무거운 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나온 자들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여 내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산 자들입니다.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말한 자들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따르면, 우리가 발견한 이 가치에 비하면 이 세상의 것은 배설물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을 믿는 사람들처럼 살고 있을까요? 왜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실체인 것처럼 살고 있을까요?

결국 이 땅에서 믿는 자들의 삶은 불신과의 싸움입니다.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사실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믿는 자라고 말하는데 믿는 자들이 믿지 않음과 계속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믿지 않음과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 있고 보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나를 유혹합니다. 여기 더 편하고 쉬운 길, 행복한 길, 기쁨의 길, 만족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하나님 안에 우리의 기쁨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족케 하시며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사실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이 이 땅에서 이뤄지고 있는 그 일이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하나님이 마음의 소원을 이뤄주신다는 그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우리에게 좋은 것이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내게 온 것을 좋아하고 있다면 속고 있는 것입니다.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그분의 시간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며 기쁨으로 그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