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교회에게 필요한 여러 중요한 일반적인 신앙의 원리를 짧은 권면과 명령의 형태로 기록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특별히 더 필요한 교훈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모든 교회에게 필요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 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련의 명령들 끝에 바울이 강조한 것은 ‘말씀’에 따른 삶입니다.
살전 5:20–22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여기서의 예언은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설교에 가장 가깝습니다. 오늘날은 설교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많은 설교가 쏟아져 나옵니다. 예전 같으면 한번 선포되면 끝이었던 것이 이제는 녹화가 되고 영상이 남아서 언제든 원하는 설교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설교의 가장 큰 특징이어야 하는 ’권위’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권위가 그 안에 있습니다. 설교자는 아무런 권위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듣는 자들에게 설명해주고 그들이 그 말씀에 반응할 수 있도록 돕는 성령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때 비로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권위있게 선포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듣는 자들은 절대로 “예언을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비록 연약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그 말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을 무겁게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여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에 은사 있는 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오늘날에 설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가 많은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많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문제는 오늘날의 그 많은 설교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입니다. 정말로 그 설교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 의도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 설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설교도 있습니다. 그래서 분별력 있게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들을 말씀과 안들을 말씀을 ‘내’가 나누게 됩니다. 내가 말씀을 골라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씀만 듣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습관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말씀의 권위가 줄어듭니다. 듣다가도 별로 듣고 싶지 않으면, 그냥 듣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렇게 ’예언을 멸시’하게 되는 위험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아무 설교나 들으면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이니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설교는 무익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들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길(말씀하시길)”과 같은 표현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이는 사극 같은 데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어명이요!”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들으라는 것입니다. 내용이 내 맘에 드는지, 내가 지금 들을 기분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중요하고, 그렇다면 나는 들어야 합니다.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들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선한 것을 취하고 악한 것을 버리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