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막연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막연하지만 그런 소망조차 없다면 오늘을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소망이란 것이 참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 사람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현실이 될 확률이 매우 낮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다릅니다. 우리는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될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바란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단순히 그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 될 것을 우리 눈 앞으로 가져옵니다. ‘얼마나’ 믿든 근본적인 미래의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삶은 달라집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보이는 것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든지, 믿음의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살든지입니다. 믿음으로 얼마나 선명하게 보는지에 따라 지금의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고향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언뜻 이 말씀은 보여 ‘준’ 땅으로 읽기 쉽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어느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여 ‘줄’ 땅입니다. 하나님은 아직 어느 땅이라고 특정하지 않으신 상태에서 아브라함에게 일단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어느 땅인지를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지금 엄청난 결단의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정도의 나이에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때가 바로 ‘믿음’이 일해야할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나아갔습니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약속의 땅을 선명하게 그의 눈 앞으로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어리석고 말도 안되는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믿었고,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히브리서 저자의 코멘트는 참 감동적입니다.
히 11:15–16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나중에라도 아브라함은 돌아가려면 돌아갈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소망을 따라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칭하셨고, 그렇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나의 지금 믿음의 삶은 어떤지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나의 삶에 따라 하나님이 나의 이름으로 불려지실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지, 사람들에게 어떤 하나님으로 드러나고 계실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이름이 하나님께서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이름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한걸음을 내딛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