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문구로 대표되는 교회(혹은 복음)의 배타성일 것입니다. 해당 문구 자체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극단적일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방식도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그런 이유로 지금은 그런 식의 전도는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전달 방식에 있어 지혜가 부족했다는 점을 제외하고 문구 자체만 봤을 때 사실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며(행 4:12), 그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계 20:14-15).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누구든 듣기 싫어할 불편한 진실인 것입니다.
이 불편한 진실 앞에서 모든 사람은 선택을 해야합니다. 복음은 듣는 자의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복음이 불분명하게 전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는데, 마치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너무 급하게 할 것 없고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일주일 중에 하루 정도만 자기를 부인해도 괜찮고, 어쨌든 노력했으면 된 것이라고 위로하기도 합니다. 복음에 분명히 응답하지 않았는데도 교회에 나오고 있으면 ‘성도’라고 부르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야 교회에 계속 나오고 그래야 믿고 구원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정작 그렇게 ’성도’가 된 사람들은 진짜 성도가 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성도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메시지 자체가 바뀐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죄와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복음에서 빠집니다. 죄는 그저 현실의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심판도 실제로 벌어질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저 강한 경고를 위해 그렇게 표현되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이유가 사라집니다. 단지 예수님은 힘든 세상을 사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그런 일을 겪으신 분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여러 사상들이 가미되기 합니다. 그래서 환경 운동을 위한 복음이나 페미니즘을 위한 복음 같은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복음을 사람들이 더 잘 듣게 하기위해 노력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마치 우리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 받지 못할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것을 거기에 더하거나 빼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넣고 싫어할만한 것을 뺍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신 복음에서 무엇을 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불필요한 어떤 일을 하셨다는 뜻이며 무엇을 더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놓친 어떤 일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복음은 있는 그대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하는 자는 복음에 대한 확신 가운데 성경을 통해 드러난 확실한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복음이 사람을 변하게 해야지, 사람이 복음을 변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며 영혼들을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