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죄를 용납하는 관용에서 돌이키기

최종혁 · 2024.12.24 · 요한계시록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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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관용’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기준을 낮추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었던 선을 더 확장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권리를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용납하는 모습으로 관용은 드러납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봐도 남에게 선을 베풉니다. 성경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명령할 정도로 관용을 중요한 덕목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관용에 대해서 생각할 때 주의해야할 것은 나의 기준보다 더 상위에 있는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내가 낮추거나 확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선이고 그 밖에 있는 것은 악입니다. 사람은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적용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모습을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용을 베푸실 때도 자신의 기준을 옮기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냥 용납하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기준을 옮기면서 관용을 베풀었습니다(20절). 그들은 에베소 교회와는 다르게 그 행위에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19절). 하지만 죄를 용납하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세벨이라는 거짓 선지자를 그들 가운데 용납했고, 그는 사람을 꾀어서 행음과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행음과 우상 숭배는 사실 당시 두아디라 도시에서는 ’문화‘ 정도로 여겨질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지탄 받을 만한 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세벨의 가르침에 미혹된 자들은 그런 것들이 정말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죄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더 열린 마음을 가진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들이 있습니다. 죄에 관대한 문화가 생겨났습니다. 관대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죄인이 되는 일들이 이 사회에 만연합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세상에서 죄인이 되지 않으려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 되고 있습니다. 혹은 그런 핑계로 자기 욕심을 따르고 자기 편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혼란한 빛을 세상에 비추고 있으니 세상은 빛을 빛으로 보지도 못합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주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23절). 사탄의 깊은 것에서 빠져나오라고 하십니다(24절). 내 삶을 점검하고 죄에 관용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을 혼란하지 않게 비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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