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살아 있다는 이름보다 참된 생명으로

최종혁 · 2024.12.25 · 요한계시록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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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3장의 말씀을 읽을 때면 항상 생각하게 되는 것이 만약 주님께서 지금 우리 교회에게 편지를 쓰신다면 뭐라고 하실까입니다. 그러면서 이 편지들을 통해서 나를 돌아보고 우리 교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회개해야할 것이 없는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분명 한계는 있습니다. 제 지식의 한계가 있고 분별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개개인에 대해서 다 모를 뿐더러 심지어 저 자신에 대해서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저 보는 것에 기초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정말로 ‘아십니다’. 주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때로는 정말 큰 격려가 되는 사실이지만 때로는 그 때문에 두렵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시편 139편의 다윗처럼 당당하게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시 139:23), 아담처럼 숨고 싶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어떻든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절). 예수님은 교회들에게 편지하시면서 이 표현을 그래도 긍정적으로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아닙니다. 사데 교회는 감추고 싶은,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시고 드러내십니다.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절)

사람들은 사데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렇게 볼만한 요소가 충분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세련되고 뜨거운 찬양, 심금을 울리는 설교, 풍성한 교제가 그 교회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이 교회에 방문한 사람들이 이 교회가 살아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가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죽어 있었습니다. 세련되고 뜨거운 찬양은 있었지만 그때 뿐이었습니다. 설교는 심금을 울리지만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풍성한 교제는 예수님이 없어도 상관 없는 세상 속의 교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렇게 책망하셨던 유대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고 오직 형식만 남아있던 그 종교와 교회가 똑같아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깨어나라고, 지금 그나마 남아 있는 생명을 굳게 하라고, 회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되기’가 아니라 ’하기’에 집중하다보면 이렇게 본질을 잃고 껍데기만 남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껍데기를 붙들고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 안타까운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선 순위는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더 사랑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신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목할 때 주님도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세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았다고 칭찬하시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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