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생각할 때 오늘 같은 말씀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서 보면 어차피 구원 받을 자들이 구원 받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구원 받지 못하는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간절하신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듣지 않으려는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시기하고 부러워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이방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계속해서 손을 벌리셨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그렇게 하셨습니다.
누구도 감히 반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참 냉철하기만 하신 분 같은데, 그런 분께 이런 간절함은 참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둘을 같이 이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간절함은 가식이나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절대적인 진리인만큼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도 진리입니다.
이 간절함에서 더욱 마음에 와닿는 것은 하나님은 마치 이스라엘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것을 찾는 비유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집니다. 목자는 백 마리 양 중에 한 마리를 잃었을 때,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를 찾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입니다. 잔치 비용이 양 한 마리보다 훨씬 더 들텐데 그렇게 합니다.
어쨌든 ‘양’이라는 생명이 있는 존재이니 값을 따질 수 없다고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은 여자의 비유는 더 이상합니다. 한 드라크마를 부지런히 찾다가 결국 찾아낸 여자는 마찬가지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즐깁니다. 이유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것 뿐입니다. 단순히 잃어버린 돈을 찾은 것이라면 말도 안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그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찾으십니다. 그리고 찾으실 때 크게 기뻐하십니다. 이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아들이 있다고 해도 그 아들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아들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를 하나님은 각각의 가치로 보시는 것입니다. 아무나 100명 구원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정말로 한 영혼 한 영혼의 특별한 가치를 보고 있는지, 그래서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는 간절함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어차피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안주하여 오히려 하나님과 같은 간절함 없이 영혼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차피 구원 받을 사람은 받으니까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이 나에게 있기를 구합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보시고 한 영혼의 멸망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그 간절한 마음이 나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