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받은 사람이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은 태어난 아기가 자라가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원리입니다. 따라서, 성장의 속도나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전혀 성장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어쩌면 생명이 없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목회자의 마음으로 독자들의 상태에 대한 염려를 표현합니다. 그들은 선생이 되었어야할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말씀의 초보를 누구에게 배워야할 처지입니다(5:12).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니 의의 말씀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5:13-14). 이것은 드러난 현상일 뿐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듣는 것이 둔했다”는데 있습니다(11절). 듣기에 게을렀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 전부가 이랬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경향이 그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6:1-2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해당하는 것들은 간단히 말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차점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의 차별점을 지웠습니다. 유대교에서 봐도 큰 문제가 없고 기독교에서 봐도 큰 문제가 없을만한 지점에 머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저자는 경고합니다(4-8절). 그리스도를 버린 그리스도인은 애초에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한 저자는 독자들이 그런 상태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확신합니다(9절). 그들에게서 확실한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보았기 때문입니다(10절). 그래서 그는 모두에게 영적으로 게을러지지 말고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서 다른 믿음의 선진들처럼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데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구원의 안전성에 대해서 성경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합니다. 한 측면은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양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누구도 예수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영생’이라는 말 자체가 그 안에 영원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얻었다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면 영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오늘 히브리서의 본문과 같이 믿는 자가 믿음을 지켜야할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이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구원 받은 자는 믿음을 끝까지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즉 구원받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자연스럽게 믿음을 위한 싸움을 하지 타협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버리는 것은 애초에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이 그렇게 드러난 것입니다.
’구원 받았으니 끝’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구원 받았으니 시작’이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영적 나태함에 빠지지 않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말씀에 계속해서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세상에 섞여서 구별되지 않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그렇게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 모두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그날을 소망하며 믿음을 지켜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