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머리에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부었던 이 여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참 묘합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는 제자들의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만약 나에게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이 있는데, 누군가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면, 아마 제자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허비’라고 말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귀한 향유를 그렇게 써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자가 ‘좋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재고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일이라고 하셨으니, 이 여자는 좋은 일을 한 것이고, 만약 나에게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나도 이 좋은 일을 선택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나는 여전히 효율을 생각합니다. 동기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허비가 무엇인지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예배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예배는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같은 위치에 있는 명령이 아니라 다음에 위치한 명령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포함된 명령이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이상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모든 것에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순수한 동기로 하는 모든 일들이 ‘좋은 일’입니다.
누군가는 그래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동일한 마음의 동기로 그 향유를 팔아 이웃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둘 다 ‘좋은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두고 서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건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제자들에 대해서 여자가 ‘자기들은 아무 것도 안하면서 훈수 두기는 …’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그 역시 ‘좋은 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하느냐가 그것이 참된 예배인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바른 동기,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행위는 분명 다른 사람에게는 ‘허비’로 보일 것입니다. 내 눈에 누군가가 하는 일이 그렇게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사랑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사랑의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예배의 우선 순위를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그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서로 다른 은사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예배할 때 우리의 예배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일에 나도 함께 기뻐하는 것, 그 역시 예배임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