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명절을 앞두고 예수님이 하신 일

본문: 요한복음 6장

설교자: 조정의

요한복음 6장이 담고 있는 사건은 소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다(마 14:21). 잘 알려진 이 사건을 다루면서, 특별히 4절을 주목하기를 원한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한은 왜 이때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무렵이라는 것을 말한 것일까? 단지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알려주려고? 그렇지 않다. 유월절은 예수님이 ① 하신 일(1-21절)과 ② 하신 말씀(22-59절) 모두와 관련이 깊다. 

1. 명절을 앞두고 하신 일(1-31절)

먼저, 예수님은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 큰 무리를 적은 양의 음식을 가지고 모두 배불리 먹이셨다(10-13절).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놀라운 표적이었다!(14절,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표적은 단순히 놀라운 일,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신 분의 드러난 영적 실체에 주목하게 한다. 다시 말해, 표적을 행하는 목적은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는가 보다는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이 과연 누구이신가를 드러내는 데 있다.

예수님은 남녀노소 큰 무리에게 당신의 정체를 확실히 드러내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 유대 민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가지고 떡을 만들어 유월절을 기념하며 먹고 마셨던 일을 직접 경험하게 하셨다. 그들을 들판에 앉히고 떡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이셨다. 조상들이 경험한 유월절, 하나님이 친히 공급하신 양식으로 기념했던 그 명절을, 예수님이 공급한 양식으로 기념하게 하신 것이다(광야 유월절의 재현). 이 표적으로 예수님이 유대인이 유월절에 기념한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시려고 했다: ‘보라, 유월절의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나 그리스도가 너희가 먹을 양식을 직접 내려주노라.’ 그러나 예수님의 표적을 본 무리는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라고 감탄하기는 했지만(14절), 그분을 믿지 않고 세속적인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15절).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가서 회당에 계신 예수님을 만났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그들이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5-6절).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다. 표적의 목적을 완전히 놓쳤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떡에만 있었다. 그것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 생각하지 못했다. 떡은 믿음직했지만, 떡을 주신 분은 믿을 수 없었다. 단지 그들이 원하는 떡을 계속 줄 수만 있다면, 왕으로 삼아서라도 계속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27절). 썩을 양식이 아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줄 수 있는 ‘나를 믿으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분께 그것을 구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을 위한 일이 뭐냐고 물었다(28절). 그것으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예수님이 아니라 양식으로 관심이 옮겨졌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다(29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양식이 아니라 양식을 주시는 그리스도께 시선을 옮기고 자기를 믿으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30절). 방금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는 것을 조금도 믿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표적을 본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반응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말 못 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셨는데, 그 표적을 본 무리 중 일부가 예수님을 비방하며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했고(눅 11:15), 또 더러는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며 시험했다(눅 11:16). 이것이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실 때, 죄인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다.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고 표적을 부정하거나 더 많은 표적을 요구한다. 오병이어 표적을 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방금 그들이 경험한 표적이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부정해 버리고, 더 큰 표적을 요구했다: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0-31절). ‘당신이 모세보다 더 큰 선지자라는 것을 어떻게 보여주겠는가? 모세는 하늘에서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당신은 더 큰 기적을 보일 수 있는가?’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했다. 

2. 명절을 앞두고 하신 말씀(32-59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의 도발을 이용하여 정말로 중요한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다. 모세가 구하여 하늘로부터 내린 떡은 썩을 양식이었지만(출 16:20),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주실 참 떡은 썩지 않는 생명을 주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다(32절). 그리고 그 생명의 양식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밝히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그들의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린 떡,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49절),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인 예수님을 먹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50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51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사람이면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하는 것도 믿기 힘들었고(42절), 그분이 자기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말씀도 이해할 수 없었다(52절). 그러나 예수님은 더욱 친절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3-5절). 

예수님은 실제로 자기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가르치신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유월절이 가까이 온 시점이었다. 이 명절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다. 유대인은 유월절에 떡과 잔을 먹고 마시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했다. 무교병(떡)은 애굽의 고된 노예 생활을 기억하게 하면서 동시에 급히 그곳에서 탈출하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게 했다(출 12:6, 39). 포도주(음료) 역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점차 형식적으로 마셨던 것으로, 언제부턴가 유월절에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어린 양의 피를 상징했을 것이다(출 12:7).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하나님께서 애굽의 압제와 구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고 속량하시며(값을 치르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념했다(눅 22:17, 20). 

유월절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상징이었는데, 그 실체는 바로 참 떡이요 참 포도주이신 예수님이다(55절).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쏟으셨고(요 1:29),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고, 믿는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신다(Pass-Over)(요 5:24). 예수님이 우리 죄의 삯을 치르시고, 마귀의 압제 아래서 우리를 건지시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언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그분의 피로 확증하신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그때도 예수님은 떡과 잔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오병이어 사건은 어떤 면에서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와 함께 예수님이 나누신 유월절 만찬이었다. 거기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을 먹고,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되라고 그들을 초청하신 말씀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보다 예수님이 주신(실) 것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래서 예수님만 주실 수 있는 영생을 거부하고, 영생의 주님을 믿는 것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3. 명절을 앞두고 우리가 할 일

우리가 앞둔 명절 추석은 유대인의 유월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한민국의 절기이지만, 흥미롭게도 종교성은 있다. 추석은 신라 시대 유래한 것으로 수확의 계절 가을에 추수하면서 한 해 동안 풍성한 양식을 공급하신 하늘과 땅, 조상에게 감사하는 명절이다. 우리는 매년 구정과 추석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매년 반복되는 대명절을 어떻게 기념할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때에 따라 비를 내리시고 곡식이 자라게 하시는 분은 인격이 없는 하늘이나 땅이 아니고, 죽은 조상들도 아니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행 14:17). 그리고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아끼고 돌보신다는 사실도 믿는다(마 6:26, 28).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아시고 반드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6:32-3). 추석에 우리는 지금까지 신실하게 공급하시고 돌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드릴 수 있다. 앞으로 필요한 양식을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염려하지 않고 다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다고 결단할 수 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가족들과 함께 이렇게 감사드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도전하기를 원한다. 당신은 썩을 양식이 아니라 참 떡과 참 음료로서 자기 자신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있는가? 그분 손으로 당신에게 친히 공급한 많은 것들이 아니라 그분이 당신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에 얼마나 많은 감사를 드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용할 양식에 관하여도 우리는 구하고 또 얻을 때마다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돌보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썩을 양식은 우리를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않는다. 우리를 하나님의 저주에서 끊어내고 영생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내어주신 것에 관하여 얼마나 감격하고 또 감사하고 있는가?

명절에 가족끼리 모여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며 감사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오병이어 표적을 본 이들처럼 주가 주신 양식과 공급하신 모든 것에 배가 불러서 단지 그 이유로 감사드릴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때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선을 위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게 하시고, 우리로 더욱 인내하고 연단 받아 소망을 붙들게 하시려고 시험하시거나 단련하기도 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당장 필요한 것들을 얻지 못하여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원망하거나 적어도 전심으로 예배하는 일에 실패한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자기 몸과 피를, 자기 목숨을 내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다는 사실을. 그걸로 충분히 감사할 수 있다. 그걸로 온 맘 다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럴 때 세상의 것들로만 배고픔을 채우는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이 우리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생명의 원천에 관하여 궁금해할 것이다. ‘교회 나오라’, ‘예수님 믿어라’, ‘구원받아라’, ‘죽음을 준비하라’라는 직접적인 복음 선포도 필요하지만, 더 강력한 전도의 도구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고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당신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