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20)
본문: 시편 119편 145-152절
설교자: 최종혁
코프: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145-152절)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명령한다. 이런 ‘쉬지 않는 기도’를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기도의 습관이고 하나는 기도의 태도다.
기도의 습관은 다르게 말하면 규칙적인 기도다. 기도의 좋은 습관 중 하나로서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하루 한 시간 기도에 대한 실제적인 강의를 들었다. 때로 경건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런 규칙적인 기도를 인위적인 것 혹은 율법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기도는 자연스럽게 나와야지, 주제를 정하고 시간을 정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습관을 따라서 기도하셨다(눅 22:39). 물론 예수님께서 12가지 주제를 가지고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마 그 이상으로 기도하신 적도 많을 것이다. 또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셨다. 습관적으로, 규칙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쉬지 않는 기도’에 있어 중요한 한 측면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기도할 일이 없는 것 같다고 느낄 때도 계속해서 기도하며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쉬지 않는 기도’의 또 다른 측면도 있다. 바로 기도의 태도다. 여기서 말하는 ‘태도’는 어떤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도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즉, 위에서 말한 습관에 따른 기도를 드렸다고 해서 ‘오늘 기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 역시 예수님께서 본으로 보여주셨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긴 시간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힘든 하루를 보내시고 혼자 기도할 시간을 일부러 만드시는 것도 볼 수 있다. 또한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짧게 아버지께 기도하시거나 감사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예수님께 있어 기도는 ‘해야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고, 그런 모든 것을 떠나서 항상 ‘하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기도가 예수님께 그러했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고 ‘가장 하고 싶은 것’이며 또한 ‘언제나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어떤 자들인지를 생각해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도는 해야하는 것이 되고, 하고 싶은 것이 되고, 하는 것이 된다. 기도는 의무이고, 특권이고, 일상이 되는 것이다.
오늘 시편 본문에서 우리는 기도를 특권으로 생각하여 고난 중에서도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사람의 기도를 보게 된다. 시편 119편이 전체적으로 기도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오늘 본문인 145-152절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기도에 있어 간절함과 확신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있어 기도는 특권이고, 그 안에는 간절함과 확신이 드러난다.
간절함(145-148절)
먼저 주목해 볼 것은 시편 기자의 간절함이다. 이 간절함은 가장 먼저 ‘반복되는 구하는 표현’에서 드러난다: 145절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146절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147절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149절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 나를 살리소서”.
시편 기자는 마치 하나님이 듣지 못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반복해서 “하나님, 제가 부르짖었습니다”라고 강조한다. 이 기도를 지금 처음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도 정말 중요한 일은 반복해서 요청하고 확인하는 것처럼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그렇게 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듣고 계셔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간절함 가운데 소리를 내어 기도했다(“부르짖었사오니”). 반드시 소리를 크게 내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조차 다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하는 우리의 수많은 생각도 다 아시는 분이시다. 그런 분께 우리가 꼭 소리를 내어서 기도할 필요는 없다. 시편 기자가 소리를 내어 기도했던 이유는 필요에 의해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주로 엄마가 돌봐주는데, 가끔씩은 내가 돌봐줘야할 때가 있다. 한번은 아이가 별로 아파보이지 않는데 아프다고 하고 신음 소리를 낸 적이 있다(엄살). 그래서 아이에게 그렇게 소리내면 덜 아프냐고 물었더니, 그렇지는 않단다. 그럼 왜 그렇게 소리를 내냐고 물으니까, 자기도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게 된다고 답했다.
아플 때는 신음 소리를 내라고 배운 적도 없고 가르친 적도 없지만, 우리는 자 연스럽게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제로 덜 아프게 되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다. 육체의 아픔을 그냥 가지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아픔도 마찬가지다. 시편 기자는 그냥 조용히 하나님께 구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만큼 고통 가운데 있었고, 그만큼 하나님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어떤 고통 가운데 있었는지는 시편 119편의 맥락과 150절의 말씀에서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그가 하나님의 법에서 먼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던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세상에서 살아 간다. 하지만 각자가 경험하는 압박의 강도는 동일하지 않다. 그냥 무관심한 사람들 속에 있으면 압박의 강도는 그렇게 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대적인 사람들 속에 있으면 압박의 강도가 높아지고 유혹도 더 커진다. 싸움이 더 치열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게 된다.
요즘 학생들이 QT하는 것을 보면서, 어린 학생들도 이런 영적인 싸움을 치열하게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세상이 점점 더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적대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도 비슷하다. 하나님께 더 순종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을 더 알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 제가 기도합니다. 제가 부르짖습니다. 저를 구원해주세요”라고 구해야 한다.
시편 기자의 간절함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표현은 145절의 “전심으로”다. 전심은 말 그대로 ‘모든 마음’을 의미한다.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마음 속에 다른 의도가 있지 않다. 다른 목적이 있지 않다. 하나님께 구하면서 다른 무언가를 의지하지도 않았다. 전심으로 구했다.
스펄전이 인용한 토마스 브룩스의 말에 이런 기도의 중요성이 잘 강조되어 있다.
토마스 브룩스 in 스펄전, <시편 강해 10하>, 284. “우리의 마음을 지으신 분을 만족시키는 것은 그 마음의 일부나 한 구석이 아니다. … 하나님은 우리 기도가 얼마나 세련되고 깔끔한지를 보지 않으시며, 얼마나 오랫동안 혹은 얼마나 여러 차례 기도하는지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 기도의 음악성이나 기도하는 음성의 감미로움 또는 우리 기도의 논리성도 보지 않으신다. 다만 그분은 우리 기도의 신실성을 보시며, 또한 우리가 얼마나 진심으로 기도하는지를 보신다. 하나님이 흠향하시고, 인정하시며, 받아들이시고, 기록해 두시며, 또한 응답해 주시는 기도는 오직 온전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뿐이다.”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세련된 기도, 깔끔한 기도, 오래 하는 기도, 반복하는 기도 등은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것들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것 뿐이다. 하나님은 밤 새워 드리는 기도도 들으시고, “도와주세요!”와 같이 외마디 비명과 같은 짧은 기도도 들으신다. 그 마음을 보시고, 마음을 들으시는 것이다. 마음을 다해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라면 그 형식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전심으로 드리는 기도를 확인할 수 있는 한가지 측면은 내가 기도의 응답을 간절히 기다리는지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정말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원하고 바랐다. 145절에서 그는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분명하게 구한다. 149절에서도 “내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구한다.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굳이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바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기도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래서 응답하셨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때가 있다. 기도 응답에 대해서도 그냥 어차피 그렇게 되었을 일처럼 생각하게 된다. 마치 예의상 하나님께 기도는 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할 때가 있다.
하지만, 여기 시편 기자는 그런 태도로 기도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구한다. 그는 여기 저기 도움의 손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니면 다른 어떤 존재가 그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을 따라 그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셔야 그가 살 수 있다고 믿는다(149절).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면 그의 삶에 답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더욱 간절히, 전심으로 구했던 것이다.
가장 최근에 받았던 기도 응답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라. 만약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쩌면 나는 하나님께 구하면서 다른 도움을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전심으로 구하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도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응답이 중요하지 않다면, 기도를 중요하게 여길 이유도 없다. 그러니 형식적인 기도만 되고, 간절한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전심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시편 기자의 기도의 간절함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측면은 그가 언제 기도했느냐다.
시 119:147–148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148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이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날이 밝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랐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은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그렇게 했고, 148절에 따르면 새벽녘에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새벽녘은 “날이 밝기 전”과 동일한 시간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해석이 좀 갈리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밤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새벽녘”으로 번역된 단어가 문자적으로는 야간 경계(파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시편 기자는 야간 경계를 하는 사람이어서 그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기대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런 깊은 밤을 기대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아마도 후자의 의미가 여기서는 더 적당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든 시편 기자는 잠을 줄여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 안에서 답을 얻기 위해 애썼다는 의미가 된다.
잠은 사람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이런 잠을 자고 싶을 때, 또 잘 수 있는 환경일 때, 잠 대신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 아이들 같은 경우 친구들과 놀려고 그렇게 하기도 한다. 어른들은 취미 생활 혹은 건강(생존)을 위해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들을 우리는 잠 대신 택한다는 것이다.
요즘 농담으로 하는 말들 중에 ‘유튜브 봐야 하는데 시험이 방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원래는 ‘시험에 유튜브가 방해가 된다’여야 하는데, 반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만큼 유튜브를 보고 싶은 간절함이 학생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시편 기자에게 적용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잠을 자야 하는데 기도를 해야해서 방해를 받은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고 싶은데 잠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어떻게든 기도를 더 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는 잠을 줄여가며 기도했다. 그의 우선순위가 잠보다는 기도였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자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이런 기도의 간절함이 있는지, 나의 기도 생활을 점검해 봐야 한다. 풍족한 이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비 한번 멈추시고, 땅을 한번만 제대로 흔드셔도 우리가 쌓아올린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질텐데, 마치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물질적인 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잘 살 수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살기도 한다.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고 할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책장에 꽂아둔 그대로, 혹은 가방에 넣어둔 그대로 있는 성경책이 그 증거다. 아침에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그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이 그 증거다. 무엇 때문에 말씀 읽을 시간이 없고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을 하는데 말씀과 기도는 방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일요일 아침에만 교회로 향하는 그 발걸음, 영적인 것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최소한’으로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수단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멀리 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하나님 없이는 안된다면,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면, 가장 먼저 우리는 기도할 것이다.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반복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전심으로 부르짖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간절히 기대할 것이다. 기도가 우리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고 항상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기도가 특권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느 쪽이 맞는지 생각해 보고, 나는 지금 어느 쪽에 가까운지 점검해 보라. 혹, 잘못된 쪽에 있다면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라. 그것이 유일한 살 길이다.
확신(149-152절)
다음으로 이 기도 가운데 시편 기자가 가지고 있는 확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148절까지 시편 기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149절부터는 그 근간에 가지고 있는 확신을 표현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확신이다.
시 119:149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살려주셔야만 한다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 근거는 자신에게 있지 않다. 내세울 것이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말씀에 따라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분명 다른 사람에게 칭찬 받을 만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욥이나 다니엘 같은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여 그 길로 행했던 복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근거로 삼은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이만큼 해주셔야 합니다는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구하고 있다.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에서 ‘인자하심’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약속하셨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시 103:17–18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편 기자가 확신하는 것은 그의 삶이나 행함이 아니었다. 만약 그것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분명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한 부분이 보일 것이다. 아무리 사람 사이에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다. 시편 기자도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근거로 호소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에 적어두신 그 약속에 따라 그 인자하심을 나타내달라고 구한다.
신약의 우리는 더 크고 확실한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할 수 있다.
히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함 없이 하나님 계신 은혜의 보좌 앞에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기도할 때 우리가 언제나 가질 수 있는 확신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가까우심에 대한 확신이다.
시 119:150–151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사오니 그들은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151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시편 기자의 주변에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다. 그들은 시편 기자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법에서는 먼 자들이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자들을 대적하고 조롱한다. 그런 자들이 가까이 왔다.
시편 기자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신거지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시는지, 왜 빨리 해결해 주지 않으시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을 것이다. 만약 시편 119편에 언급된 고난이 하나의 사건이라면, 그는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계에 부딪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151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진리라는 일반적인 사실, 어쩌면 이론적이고 상투적으로까지 들리는 이 말씀이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구체적인 말씀을 확증하고, 시편 기자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위로가 된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 앞서 150절에서 악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가까이 왔사오니”라는 동사로 표현하여, 이것이 지금 시편 기자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임을 나타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까이 계신다”는 형용사를 사용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드러낸다. 악인들은 멀리 있다가 가까이 온 것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시편 기자와 가까이 계셔왔다는 말이다. 지금 부랴부랴 오신 것이 아니라. 항상 가까이 계셨고, 악인들이 가까이 온 지금도 가까이 계신다. 이것이 진리다.
고난 중에 욥이나 다윗처럼 시편 기자도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119편에도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82절),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84절)와 같은 탄식이 있다. 그런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거나 나에게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인지하는 잘못된 현실일 뿐이다. 진짜 현실, 진리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릴 때, 비를 내릴 때, 가까이 계셨던 하나님은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을 때도 가까이 계셨다. 베드로를 옥에서 건지실 때 가까이 계셨던 하나님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도 가까이 계셨다. 시편 기자의 눈에 그에게 가까이 온 악인들이 보였지만, 동시에 항상 그와 가까이 계셨던 하나님도 보였고, 그로 인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언제나 가까이 계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내 피부로 느끼는 이 고난보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마 28:20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언제나 고난 보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 언제나 대적보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신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이 사실을 확증하니, 우리도 고난 중에 기도할 때 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끝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이다.
시 119:152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시편 기자는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임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경험으로도 알고 있었다. 지난 본문이었던 140절에서 말했던 것처럼 여느 하나님의 백성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에서도 시험되고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 확신이 결국 지금 이렇게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이라고 해도, 아니 하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고 해도, 결국 의지할 것은 하나님 뿐이신 것이다.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 확신이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 한다. 그리고 기대하게 하고 소망하게 한다. 언제인지도 알 수 없고,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한 적이 없음은 안다. 그래서 지금 확신 가운데 간절히 하나님께 구한다.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기에 그렇게 한다.
우리도 이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론적인 확신을 넘어서 경험적인 확신을 가져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심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특권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간절히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도전
끝으로 기도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기도하는 목적이 되기도 한다. 목적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시 119:145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시 119:146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시 119:149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그리고 확신 가운데 구했다. 하지만 ‘구원’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에 있지는 않다. 단지 ‘악인들 때문에 괴로우니 저 악인들을 좀 제거해주십시오’가 아니었다. 그는 주의 계명들의 길로 가는 것 뿐 아니라 자유롭게 달려가고 싶었다(시 119:32).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이 복된 삶이라면, 그 길로 달려가는 것이야 말로 풍성한 삶인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삶에 악인들이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이다.
때로 우리의 기도는 여기까지 가지를 못한다. 죄를 범해서 회개의 기도를 할 때는 마치 벌 받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잘못했다고 말하는 아이처럼 한다. 고난을 당해서 구원하심을 구할 때는 고통스럽지만 않으면 될 것처럼 구한다. 잘못했다고 말하고 고통에서 건지심을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닌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이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 복된 삶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 기도해야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기도의 최종 목적이 되어야 한다. 고난 없이 평안한 가운데 내가 원하는대로 살 수 있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의 길로 달려갈 수 있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삶의 예배이고 또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를 더욱 이 참된 삶으로 이끌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