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북미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스티븐 로슨의 스캔들이었다. 그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트리니티 바이블 교회 담임 목사였고, 원패션 미니스트리 기관 사역 창립자이자 대표자이기도 했으며, 캘리포니아주 LA에 있는 마스터스 신학대학원의 설교학 담당 교수이자 존 맥아더 목사의 오랜 친구였다. 33권의 저서를 집필하여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보급하고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주요 콘퍼런스 강사로 영향력을 한창 떨치고 있던 그때, 한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시인하고 교회 및 모든 사역을 내려놓으면서, 그의 가르침과 본을 통하여 선한 영향력을 얻은 많은 이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6개월이 지난 2025년 3월, 로슨은 “나는 주님과 나의 아내, 가족, 그리고 수많은 이들에게 큰 죄를 지었습니다…저는 아내를 배신하고 속였으며, 제 자녀들을 크게 파괴했고, 그리스도의 이름에 수치를 안겨주었으며, 그분의 교회를 비방받게 하고, 많은 사역에 해를 끼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과 아내, 가족에게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으며, 몇 달 동안 자기 마음속 죄의 근원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죄를 미워하며 눈물로 회개한다고 밝혔다. 지역교회 목회자 아래서 돌봄을 받으며 순종하고 있고, 따로 상담도 받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평생 지고 갈 것을 각오하면서도, 책임지고 그 대가를 치르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 스티븐 로슨이 며칠 전 한 콘퍼런스 강사진으로 소개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는 11월에 미시시피주에서 열릴 “Contending for the Faith”(“믿음을 위한 싸움”) 주최 측에서 로슨의 거절 의사를 확실하게 확인도 하기 전에 초청 강사로 소개하는 바람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함께 강사로 초청된 이들 중에는 여성 목사도 다수 있었고, 그동안 로슨이 신뢰하며 가까이 동역했던 이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에, 그가 너무도 빨리 사역에 복귀한 것은 아닌지, 그의 회개에 진정성이 있는지, 그가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신념을 버린 건 아닌지, 여러 의혹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의혹을 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비판과 정죄의 말을 공개적으로 남겼다.
성경은 우리에게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약 1:19). 로슨이 강사진으로 소개된 것을 보고 급히 말을 내뱉은 이들은 주최 측의 빠른 사과와 정정 보도 앞에, 그들이 맺은 혀의 열매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이 일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형제자매의 잘못을 다룰 때 혹은 그들의 회복을 바라는 중에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몇 가지 치명적인 죄를 발견했다. 아무쪼록 우리가 이런 죄로부터 자신을 지켜, 교회가 죄 없는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 용서받는 자들의 모임이 될 수 있도록,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되 조금이라도 때 묻은 자가 있으면 무자비하게 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말씀과 은혜로 씻기고 회복시키는 방식으로 지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우리는 여간해선 용서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용납”과 “용서”의 모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가 그분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가? 조건 없이, 제한 없이 자백하는 모든 죄를 주님은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요일 1:9).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쉽게 용서하지 않는다. 특별히 로슨과 같이 스스로 자백한 잘못이 분명히 있다면, 우리는 이후에 그/그녀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그 잘못을 근거로 판단하기가 쉽다. ‘이런 죄를 저질렀다면,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 ‘이런 잘못을 해놓고 어떻게 이렇게 행동할 수 있어?’ 만일 로슨이 실제로 콘퍼런스 강사 초청에 응하여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은 ‘2년의 회개 기간은 너무 짧다. 그가 끼친 부정적인 영향력을 생각하면 더 충분한 회개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로슨이 2년 후에 다시 강단에 서는 걸 보니, 그의 회개는 진정성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실 때, 우리의 진정성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신다면 어떨까? 며칠 전에 회개한 죄를 또다시 들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셔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물론, 잘못한 사람이 진정한 사과를 해야만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용서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거나 내가 원하는 만큼의 반응을 보여야만 해주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이 넘는 사과는 진정성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그 이상은 용서하기 힘든 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하셨다(마 18:21-2). 어떤 사람은 ‘미국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있어도, 한국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잊지 못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사람도 똑같이 예수님께는 이런 용서를 받는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자백하면, 예수님은 죄를 씻어주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렘 31:34). 우리가 뭐라고 하나님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회개하는 형제자매를 용서하지 않는단 말인가!
2. 우리는 너무 쉽게 판단한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 4:11)
로슨이 강사로 소개된 그 짧은 순간 우리가 얼마나 쉽게 서로를 판단하는지가 드러났다. 온라인 상에서 로슨을 비방하는 말이 순식간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판단을 부정적으로 다루면, 혹자는 ‘그러면 도무지 판단하지 말라는 말인가?’라고 되묻는다. 아니다. 판단은 필요하다. 온갖 거짓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판단)해야 한다(롬 12:1-2). 그러면 왜 어떤 판단은 성경의 정죄를 받는가? 야고보는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라는 말로 정죄 받는 판단의 태도를 꼬집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율법 앞에 똑같이 판단 받을 것을 알면, 형제자매를 판단하거나 그 판단에 따른 말과 행동을 할 때,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범죄한 형제자매를 바로잡기 위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똑같은 판단은 곧바로 자신을 향한다. 하나님의 법 앞에서 나도 똑같은 시험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을 품는다. 그리고 범죄한 형제자매에게는 “온유한 심령”으로 다가간다. 그것이 우리가 형제자매의 잘못을 다룰 때 마땅히 품어야 할 마음이다. 그러나 로슨의 해프닝 때 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온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함부로 판단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도 않았고, 진실이 드러나기를 잠잠히 기다리면서 형제를 믿어주는 일에 실패했다. 그리고 섣불리 다른 사람과 공유하며 결국 형제에 관한 비방의 말을 퍼뜨렸다. 단언컨대, 그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타인이 이렇게 판단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잘못했을 땐, 형제자매가 나를 믿어주고 확인해 보고 그리고 누설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기를 바랄 것이다. 주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하셨다(눅 6:31). 남에게 쉽게 판단 받는 것이 싫고 고통스러운 걸 안다면, 형제자매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나도 언젠가 반드시 판단 받을 일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스티븐 로슨처럼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라고 인정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견해의 차이나 소통의 문제 등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 간에 큰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바울과 바나바처럼, 행 15장). 그리고 그 갈등 가운데 주고받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한 교회에 오래 같이 있으면서 조금도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별거 아닌 일이라도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것이 쓴 뿌리가 되어 관계를 망치기도 하고, 엄청나게 큰 일을 겪으면서 관계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도 한다. 성경은 성도에게 “너희끼리 화목하라”라고 권하고(살전 5:13),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명령하지만(롬 12:18),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은 것이 문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화목을 이루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내가 받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몰라서다. 상대방은 분명히 진심으로 사과했지만, 내 상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때,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순간순간 또 떠올라 나를 괴롭힐 때, 우리는 그 책임을 이미 사과한 상대방에게 거듭 물을 때가 많다. 내가 완전히 괜찮아질 때까지(자기 잘못에 관해서는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맹점이다). 이런 식의 해결책은 진정한 해결을 약속하지 못한다. 서로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화목을 이루어낼 힘은 우리 안이 아니라 밖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과 믿는 사람이 취하는 방식이 유사하게 보일 수 있어도, 각각이 동원하는 자원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옛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새 계명”이라고 하셨다(요 13:34). 십자가에서 확증하신 사랑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새로운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형제자매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단순히 잊어버리고 적당히 괜찮은 사이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진실로 화목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내게 잘못한 사람이 그만큼 내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노력해주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용서를 빌고 또 빌어서가 아니다. 내게 한없는 용서를 베풀어주신 분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저지른 우리의 죄는 영원히 씻어도 씻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수치와 모욕과 조롱과 고난과 죽음의 값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갚을 수 없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를 범해도 자백하면 즉시 회복시키셔서 또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난 상처가 너무 크고 아름다워서 우리의 상처가 별 볼 일 없어 보일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바라보며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는 데 충분한 힘을 얻는다.
결국, “할 수 있거든”이 염두에 둔 예외 사항은 화목을 이루려는 대상이 끝까지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뿐이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주님도(벧후 3:9), 끝까지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스티븐 로슨의 해프닝을 보면서,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그 마음을 품고 있는지 돌아본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용서받는다. 용서를 위해 너무도 힘든 대가를 치르신 분께서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도 쉽게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런 용납을 받으면서도 서로를 판단하기에 바빠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다. 쌍방의 관계에서 우리가 그 화목을 지켜내는 데 기여하는 바는 지극히 적다(오히려 마이너스일지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품으신다.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면 우리도 내 상처가 아무리 크더라도, 내가 겪은 일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화목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