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80년 용인에서 태어나 30년 가까이 남사면에 있는 유평교회에 다녔습니다. 지금은 읍으로 승격했지만 남사는 여전히 시골입니다. 외곽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 전체 인구가 7,000명 정도였습니다. 성도들은 오산, 평택, 수원, 동탄 등 여러 도시에서 모여들지만, 교회가 위치한 곳이자 제가 살아가는 곳은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여 있고 프랜차이즈 식당 하나 없는, 한 시간 반에 한 번 마을버스가 다니는 영락 없는 시골입니다. 저는 2008년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교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마스터스 신학대학교에서 성경과 설교를 배우러 떠났고, 2013년 돌아와서 지금까지 13년 가까이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를 돌보는 일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정확한 때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한 번은 인생이 참 덧없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헛되거나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게 느껴졌던 것은 절대 아닌데, ‘남사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이라면 좀 서글픈 것 아닌가?’ ‘지금보다는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세계적인 설교자들의 콘퍼런스를 다녀온 직후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주신 말씀이 바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입니다(눅 12:32).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29절),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절) 등의 말씀이 포함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신 말씀입니다(눅 12:22-34). 우리가 잘 아는 까마귀나 백합화, 들풀 이야기도 나옵니다. 평소에 저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모든 것을 공급하실 것이니,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아버지를 믿으라고 격려하고 권면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이 덜 귀하게 여겨졌던 그 때 본 이 말씀은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충분히 가치 있으며,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이 매기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 우리 인생은 귀하고 귀하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수님 하신 말씀 중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22-24절을 보시면 우리 인생의 가치가 단지 음식이나 의복 따위에 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하”다는 표현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오는데, 우리는 보통 인생의 가치를 측량할 때, 먹는 것, 입는 것, 누리는 것 등을 따지지만, 우리 인생은(목숨, 몸) 실제로 그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우리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25-28절을 보면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하나님이 매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까마귀와 백합화를 예로 드셨는데, 각각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고 입히신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24, 28절). 새들처럼, 들풀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을 믿으라는 권면과 함께, 하나님이 그들보다 우리를 훨씬 더 귀하게 그리고 가치 있게 보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귀합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다른 누군가, 무언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오롯이 달렸습니다.
셋째, 29-32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시는지 분명히 밝히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적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처럼 구하고, 그마저 얻지 못할까 봐 근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32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까마귀나 백합화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백성들에게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적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앞으로 잘하면 주시겠다고 조건을 걸고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정 과거형이라서 단번에 주신 것으로 확정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기뻐하시고 가치 있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렇게 다시 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얼마나 가치 있고 귀한 존재인지 모르겠니? 아버지께서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셨단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치 있는 보물을 얻은 자답게 구하렴. 세상 백성들도 모두 구하는 그런 거 말고 말이야. 그런 건 당연히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실 거야. 까마귀나 백합화도 돌보시잖니. 너희는 그보다 훨씬 더 귀하고 가치 있단다.’
저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관찰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각각 다르게 생겼는지, 살아가는 방식이 어찌 그리 다양한지.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참새나 들풀처럼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들까지도 귀하게 여기시고 친히 돌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을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한 번 더 나아가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이 만물을 보면서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 어떻게 모든 만물 중에서 우리를 이토록 귀하게 여기고 가치 있다고 말하여 주시는지 감격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니이까”(시 144:3),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시 139:17-8).
밤하늘의 별들, 바다의 모래들,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고 돌보시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함께 외치고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셨는지 십자가만큼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그만큼 아끼셨다는 말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살리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요일 4:9). 부모의 자식 사랑은 각별합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습니다. 자녀가 그렇게 귀한데, 그런 자녀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도대체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 위하여 치르신 희생을 생각하면, 우리 인생은 정말로 가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스스로를 적은 무리라 여기고 무서워하던 제자들의 인생이 가치 있다고 위로하고 격려하신 후에, 그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라고 권면하십니다(33-4절):
33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34절의 말씀은 이렇게도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에 마음을 쏟는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국 가치를 좇아 삽니다. 각자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고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단지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면 오히려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가치를 하나님이 정하셨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 만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주실 만큼, 크고 귀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타고난 가치가 대단했던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시고 귀하게 보셨기 때문에 우리 가치가 엄청나게 커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를 진정으로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것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쉽게 속는 것들을 보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그런 것들에 쏟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소유”라고 말씀하시고 “팔”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사는 곳, 입는 옷, 먹는 것, 누리는 여러 가지 것들로 가치를 높이려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진짜 가치를 정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모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결국 낡거나 빼앗길 것이니까요.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것들을 활용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을 “만들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우리 삶을 영원히 가치 있게 만들 보물이 될 것이며 절대로 빼앗기거나 낡아지지 않을 보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D. L. 무디를 통하여 회심하고 허드슨 테일러와 중국 선교에 헌신했던 찰스 스터드는 “오직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시로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느 날 두 줄짜리 격언을 나 들었네. 종종걸음으로 삶의 바쁜 길을 가던 날에
내 가슴에 확신을 심어준 그 말, 영영 내 마음을 떠나지 않네.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것만 영원하리라
……
오직 한 번 뿐인 인생, 정말 단 한 번뿐인 인생, 이제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리라
마침내 하늘로 부르심을 받을 때 ‘정말 가치 있게 살았다’고 말하리란 것을 내가 알리라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것만 영원하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자들이 됩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남편을 사랑하는 현숙한 아내가 되고, 아내를 사랑하는 모범적인 남편이 됩시다.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가 되고, 부모를 공경하며 존중하는 자녀가 됩시다. 서로 사랑하고 은사로 섬기며 함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가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이웃이자 직장 동료가 됩시다. 그렇게 다함이 없는 보물을 하늘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쌓읍시다.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며, 의미 있는 삶이 아닙니까? 우리가 평생 어디에 살든, 어느 곳에 가본 적이 있든 없든, 무엇을 입든, 먹든, 마시든, 누리던 말입니다. 우리 인생이 별 볼 일 없거나 대단하지 못할 것 같아서 무서워하지 맙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만큼 귀하고 가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