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은 “어떠한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를 말한다. 우리말로는 “소진”, “탈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번아웃 상태라고 자가 진단 내릴 땐, 단지 지쳤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번아웃 증후군을 호소할 때가 많다. 이는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기력이 소진되어 무기력증, 우울증 따위에 빠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교회에서 오래 사역에 헌신해 온 성도에게서 발견한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다양한 부서에 속하여 많은 봉사를 해왔고, 학생 또는 직장인으로 소명을 다하면서 남은 시간을 모두 교회 사역에 몰두한다. 월화수목금금금이 아니라 월화수목금토일이지만, 주말이 안식과 회복의 시간이 아니라 남은 모든 기력을 쥐어짜 내는 시간이 되고 만다. 당신도 그런가? 그러면 본문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주목하라.

엄밀히 따지면 본문은 일차적으로 번아웃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다. 마르다가 번아웃 증후군을 겪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두 여인에게 번아웃 없는 사역의 비결을 가르쳐주신 것도 아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떻게 주님을 위한 자발적인 섬김이 기쁨에서 의무로 바뀌는지 보여준다. 어쩌다 감사가 원망으로 둔갑하는지 원인을 말해준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우선순위는 우리가 사역에서 번아웃에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원칙을 제공한다.

1. 교회 사역으로 발생한 번아웃 증후군

마르다는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다(38절).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다. 그녀는 예수님과 함께한 일행 모두를(“그들”) 초대했다. 그만큼 많은 섬김과 봉사를 기쁨으로 결단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처음으로 교회 사역에 동참하는가? 타인의 권면이나 자발적인 지원일 테지만, 가장 중요한 동기는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깊은 동기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억지로 우리에게 사역을 강요하지 않는다(그래서도 안 된다). 교회 사역은 강제 노역이 아니라 자발적인 섬김이다. 하지만, 교회 사역에서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이들은 마르다처럼 이러한 현상을 보인다.

① 번잡: 많은 사람을 초대한 만큼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았다(40절). 예수님도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조언하실 만큼(42절). 마르다는 많은 사역에 심적으로 압박받기 시작했다. 번아웃 증후군에서 말하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기력이 소진”된 것이다. “마음이 분주한지라”로 번역된 페리스파오는 성경 전체에서 여기 딱 한 번 사용된 단어인데, “여러 가지 산만함으로 인해 너무 과중한 부담을 받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도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말씀하셨다(41절).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 많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산만하게(질서 없이) 느껴져서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마음에 과중한 부담이 생겨 걱정과 불안이 침투하면서, 교회 사역은 처음처럼 마냥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되지 않는다. 마르다처럼 주님을 섬기는 것을 분명히 특권으로 여겼는데, 번아웃 증후군에 빠지면 그 일이 점점 의무로만 느껴진다.

② 불평: 교회 사역으로 번아웃 증후군을 보일 때,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바로 불평이다. 사역으로 인한 과중한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면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데, 주로 원망과 불평으로 쏟아져나온다. 마르다가 그랬다: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10절). 마르다는 분주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동생 마리아에게 ‘잠시 나를 도와줄 수 있어?’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이미 동생에 관한 판단이 섰다. 마리아는 “나 혼자 일하게 (내버려) 두는” 나쁜 동생이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는 이처럼 다른 성도를 판단하고 정죄한다. ‘나만 봉사하고 저 친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너무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거 아니야?’

그리고 잘못된 판단과 정죄는 주님에게까지 나아간다. 마르다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삐딱해졌다.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왜 가만히 있냐’고 따져 물은 것이다. 그렇게 놔두신 것은 잘못한 것이다. 동생 마리아에게 ‘언니가 일하는데 너는 여기 앉아 있어서 되겠니?’라고 다그치셔야 옳았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명령한다: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겸손히 섬기려고 자기 집으로 초청한 마르다는 어느새 예수님 발아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르는 제자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께 자기 말을 따르도록 지시하는 자리에 올랐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섬기려고 시작한 사역이 그분을 원망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도구로 변질되는 것, 그것이 번아웃이 끼치는 가장 끔찍한 폐해다. 주님은 그런 병든 예배를 절대로 기뻐 받지 않으신다.

2. 교회 사역으로 지칠 때 잘못된 해결책

교회 사역에 오래 몸담은 사람 중에서 무기력함을 느끼거나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원래 모든 일이 그렇다. 어느 정도 수고와 노력, 희생을 요구한다. 그 일을 잘 해내려면 자기를 절제하고 시간, 재능, 물질 등의 자원을 규모 있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압박과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 부담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책과 회피라는 잘못된 해결책을 찾는다.

① 자책: 번아웃에 빠진 성도는 맡겨진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자신을 자책하기가 쉽다. 애초에 자신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 주님을 위하여 이 일을 맡은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교회 사역을 통하여 마땅히 유익을 누려야 할 성도들에게 자신은 괜히 피해만 끼쳤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마르다가 그렇게 반응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분주한 마음으로 불평한 마르다에게 대입해 보면,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녀가 이렇게 자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접대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였지, 다시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초대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그들에게 피해만 끼쳤어.’ 엘리야도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져 이렇게 부르짖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합당한 은사와 분량을 따라 그리스도와 교회를 섬기겠다는 건강하고 정직한 자기 평가가 아니다. 무력함과 죄책감에 따른, 섣부르고 잘못된 판단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을 통하여 은사를 주셨다. 그 사실은 우리가 이 교회를 섬길만한 충분한 영적 재능을 받았고, 우리 각 사람이 이 교회를 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지체라는 말이다. 내가 바라는 만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섬기지 못해서 생긴 번잡한 마음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그냥 다 놓아버리겠다고 하는 것은 엄연히 따지면 교만이고 직무 유기다. 물론, 쉼이 필요할 때가 있다. 사역지를 바꾸거나 분량을 조절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싶은 순전한 목적과 동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예수님도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41절). 부담을 줄이라는 것이지, 주님 섬기는 일 자체를 다 내려 놓으라고 권하진 않으셨다.

번아웃을 해결하려는 이들은 많은 경우 하나님을 섬기는 일 자체에서 쉬고 싶어 한다. 엘리야처럼 그냥 모든 걸 끝내고 싶은 것이다. 자책은 잘못된 해결책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계속해서 당신을 교회 안에서 사용하길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② 회피: 번아웃을 해결하는 두 번째 잘못된 방법은 굉장히 교묘한 오류를 담고 있다. 바로, 주님과 교회를 분리하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섬기고 싶은데 교회를 섬기느라 그럴 수 없다는 생각, 교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느라 주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다는 생각이다. 교회에서 상처받거나 실족하여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에게서 이러한 오류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교회의 리더십이나 그 리더십이 창조한 교회 문화가 지나치게 강압적이라서 섬김과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을 신실하지 못한 것으로 취급하고, 합당한 이유로 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으며, 심지어 교회 사역에 얼마나 충성하느냐에 따라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비참한 사역 현장을 경험한 이들도 있다. 그들은 교회 사역이 너무나 벅찬데도, 오히려 교회가 요구하는 만큼 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교회의 착취와 억압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어한다.

나는 그 상처와 피해당한 성도들을 진심으로 동정하고 복음이 주는 자유와 자발적으로 섬기는 기쁨을 온전히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아가 건강한 복음 문화와 가르침이 있는 교회로 옮길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 경험 때문에 주님과 교회를 분리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라고 경고하길 원한다. 왜? 주님과 교회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엡 1:22; 골 1:18). 주님과 교회를 분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굉장히 모호한 실체다.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리더십인가? 아니면 교회 문화인가? 아니면 나에게 주일학교를 부탁한 어떤 교사인가? 실상은 이렇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주님이 주신 은사로 섬기는 것을 기뻐하다가, 어떤 계기로 번아웃 증후군을 겪은 것이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무기력함과 우울감에 빠진 것이다. 쉼이 필요하고 회복이 필요한가? 그렇다. 하지만, 그 원인을 모호한 ‘교회’에 두고, 주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하여 교회를 떠나는 것을 해결책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됐다. 그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여전히 교회의 몸을 이루는 당신에게 맡기신 역할을 다하라고 권하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회가 서로 봉사를 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라고 명령한다(벧전 4:10). 성도는 각각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사를 은혜로 받았고, 그것은 교회가 서로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다(엡 4:12, 16). 그래서 우리는 각자 맡은 은사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가 되도록 서로를 권면할 필요가 있다(히 10: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때론 그 권면이 강하게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선택은 당신이 한다. 교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할 수도 있고, 할 사람이 없어서 할 때도 있으며,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기 힘들어 맡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당신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자원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교회 사역은 그 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 일로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일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 성취가 아니라 성화를 지향한다. 유초등부와 중고등부가 없으면 어떤가? 구역이나 셀 그룹이 없다고 교회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교회 사역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수단, 즉 은혜의 방편이다. 그러므로 은혜가 은혜 되게 해야 한다. 수단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 성도는 모두 서로를 통해 은혜를 얻고 또 서로에게 은혜를 주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섬김과 봉사를 통하여 우리를 함께 지어져 가게 하신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