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4Him이라는 4인조 남성 CCM 그룹이 발매한 “Christmas the Season of Love”라는 크리스마스 앨범에 수록된 곡, “A Strange Way to Save the World”는 요셉이 마리아와 자신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할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꼈을 놀라움과 두려움을 깊이 헤아리게 한다:
왜 저인가요? 저는 그저 평범한 장사꾼일 뿐인데
Why me, I’, just a simple man of trade
왜 그인가요? 세상의 모든 통치자 중에서
Why Him with all the rulers in the world
왜 여기인가요? 건초더미 가득한 마구간 안에서
Why here inside this stable filled with hay
왜 그녀인가요? 그녀는 그저 평범한 여자인데요
Why her, she’s just an ordinary girl
난 천사의 말을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Now I’m not one to second guess what angels have to say
이건 정말 세상을 구원하는 너무나 신비로운 방법이 아닐 수 없어요
But this is such a strange way to save the world
왜 하나님은 이런 “신비로운 방법”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신 것일까? 천사들도 계속해서 살펴보기를 원하는 비밀, 그 깊고 넓고 높고 영원한 사랑의 신비를 우리의 좁은 머리와 마음으로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영원토록 감격하며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릴 뿐이다. 그러나, 성경을 근거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지, 왜 일반적인 출산의 과정을 통해 갓난아기로 나셔서 성인까지의 성장 과정을 거치시고, 때가 되었을 때, 복음을 선포하신 후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로움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복음을 성취하셨는지 몇 가지 뚜렷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해답이 성탄을 앞둔 우리 마음에 우리를 위하여 태초부터 계획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더 풍성히 묵상하게 하기를 바라고, 또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전심으로 감사하고 그분을 높여 찬양하게 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1. 첫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하여 마지막 아담이 오셨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성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창 1:27). 이 말은 다양한 함의를 갖지만, 여기선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영속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점에 주목하길 원한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 점에서 인생과 짐승의 차이를 발견했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1). 물론 솔로몬의 통찰은 타락의 결과로 주어진 사망을 전제한다. 그러나 타락 이전에도 하나님은 사람과 짐승을 다르게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죄도 죽음도 없는 아름다운 동산에서 영원한 사귐을 누리는 존재였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그래서 단지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까지 회복하신다는 말이다. 죄로 인하여 부패한 마음, 질병과 수고와 갈등을 겪는 인생에서 건져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는 상고의 복을 다시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에선 다시는 눈물과 고통이 없는 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귐을 누리는 백성들의 행복한 미래가 그려진다(계 21:3-4; 22:1-5).
그러면 누가 첫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첫 아담의 원죄를 타고난 수많은 영혼을 그 죄가 미친 현세와 내세의 치명적인 결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을까?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죽은 영혼을(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세상 그 어떤 강력한 통치자 또는 부유한 자가 “살려”줄 수 있을까?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의 육신을 입으신 마지막 아담, 예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되셨다(요 1:9).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죄로 죽어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다(요 1:4). 그분은 “살려주는 영”이 되시기 위하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2. 피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나님께서 원하기만 하셨다면 죄를 그냥 사라지게 하셨거나 넘어가실 수 있었다고 섣불리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도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은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놀랍고 아름답게 만들기보다는 끔찍하고 (나쁜 의미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그 누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자식을 희생하려고 할까? 오히려 자식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 길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을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께서 십자가에 “들려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요 3:14).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요 3:15).
그러므로 십자가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실제로 죄 사함이 이루어진 사건이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분명히 선언한다(롬 6:23). 그 죗값을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를 위하여 대신 치르신 것이다(이를 ‘속량’ 또는 ‘대속’이라고 부른다: 엡 1:7; 골 1:14; 마 20:28; 벧전 1:18-9). 하나님은 우리 죄를 그냥 간과하실 수 없다.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죄를 간과하신다. 그분의 공의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6).
1) 누가 한 사람의 몫도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한 화목제물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죗값을 대신 치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거기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아담부터 마지막 사람까지, 모든 죄인이 치러야 할 허다한 죄의 대가를 남김없이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2) 누가 하나님 앞에서 흠 없고 점 없는 보배로운 제물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롬 3:23), 같은 사람이면서도 죄가 없어서,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제물이 되어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받는다(행 4:12). 피 흘림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3.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6)
왜 예수님은 아기로 나셨을까? 단지 대속을 위한 화목제물이 필요했다면, 성인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마친 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러면 복음을 선포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여시고 죄를 사하는 일을 마치고 부활의 소망을 주시는 일까지 마치실 수 있지 않았을까? 먼저, 예수님의 성육신은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잠시 나타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의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출산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예수님이 달랐던 점은 아버지의 씨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과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여자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나셨다는 것이다(마 1:18, 20).
성경은 예수님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밝힌다(히 4:15). 그렇다.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가 겪은 유혹을 받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숱하게 넘어진 시험을 통과하셨다. 우리와 똑같이 몸의 피로를 느끼셨고, 배신과 불신을 당하셨고, 굶주림과 목마름을 경험하시고, 미움과 시기에 팔려 매 맞고 돌아가시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를 위한 온전한(흠도 점도 없는) 희생제물이 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굉장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예수님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순종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온전하지 못한 때가 없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었다(히 5:5). 그럼에도 그분의 모든 삶은(공생애뿐만 아니라) 많은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온전한 삶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었다. 나신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예수님의 온전한 삶은 결국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게 하는 근원이 되었다(롬 5:19).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성육신의 경험을 우리를 동정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모두 승리하신 분으로서, ‘왜 그것도 못 견디고 못 버티느냐?’라고 우리를 책망하고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당신의 온전한 의로움을 옷 입히시고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시면서 동시에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의 여정 가운데 우리가 시험받고 넘어지거나 유혹에 흔들릴 때마다,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언제든 필요한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때마다 우리를 도와주신다. 나아가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7:25). 그렇게 그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성탄의 신비는 단지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아기로 나셨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에 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이상한’(strange) 구원 방식을 택하신 것일까? 왜 하나님은 이 계획을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알려주시고, 그 예언을 하나하나 이루시면서 약속하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증하신 것일까? 왜 예수님은 아버지의 기쁘신 뜻대로 이 땅에서 모든 시험과 고난을 겪으시고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 승천으로 영광을 받으신 것일까? 우리는 그 답을 찾아가면서 반복해서 한 가지 뚜렷한 진실을 발견한다. 그 ‘이상한’ 방식에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부어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계획 하나하나, 예수님이 성취하신 구원의 역사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는 기이하고 놀라우며 신성한 사랑을 보게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