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6일 유튜브 채널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에 업로드된 “하나님의 구원론(매운맛ver) 듣고나서 울컥했어요”를 본 몇몇 성도가 자신의 구원이 심히 의심스럽고, 결국 죽어봐야 알 수 있는 거냐며 크게 두려워하면서 상담을 요청했고, 그에 대한 답변을 이렇게 세 편의 칼럼으로 정리했다.

첫 번째 칼럼에선 구원의 현재와 미래만큼이나 과거(이미 이루어진 사건)에 관하여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구원의 잘못된 확신은 경계하되 올바른 확신은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두 번째 칼럼에서는 구원은 결국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께 영생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 부분이 행위 구원을 연상시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은 것은 큰 문제라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이 영상의 강사인 권연경 교수가 내내 강조해 온 구원의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과 신자의 역할이 균형 있게 다루어졌는지를 평가해 보려고 한다. 쉽게 말해서, 구원이 우리의 출발점이고 영생에 도착하는 과정이 우리의 매일의 삶이라면, ‘하나님은 그 과정 중에 무엇을 하시는가?’에 관한 답을 찾는 것이다.

구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가 아니면 구원을 (내가) 이루어야 하는가?

권 교수는 예정 교리를 “하나님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다고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예정)하실 때 다음과 같은 목적을 세우셨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대가족 안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롬 8:29, 새번역). 권 교수는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입양하신 자녀와 같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단지 호적에 올라온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는 우리가 맏아들 예수님과 같은 성품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신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복음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지는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기만을 꿈꾼다”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도둑놈 심보”라고 책망하며, 구원의 과정을 겪지 않고 결과만 먹고 싶어 하면 안 된다고 책망했다. 그는 다시 한번 ‘공평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그런 ‘도둑놈 심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통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권 교수는 “내가 실제 하나님의 자녀처럼 안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한다. 우리는 그 길을 잘 못 가고, 가기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에 가는 길에 시장을 통과해야 했는데, 7살짜리 어린아이에게는 유혹이 너무 많은 시장을 한눈팔지 않고 똑바로 가게 하려고 자신을 앞장세우고 어머니께서 뒤에서 쿡쿡 찌르면서 앞만 보면서 가도록 주도하셨다고 예를 들었다. 이 예시를 통하여 권 교수는 하나님께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주도하시지만, 우리가 적극적으로 앞장서도록 종종 강하게 말씀으로 찌르신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같은 방법으로 그 길을 가게 하신다고 했다. 그가 예시로 든 대목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인데,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용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후에 나오는 말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5)도 주기도문에서 강조된 용서를 다시 한번 강력하게 촉구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8장에 기록된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 18:35, 새번역)도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봐야 한다.

권 교수는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앞장서서 용서할 것을 요구하신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그것은 “우리가 용서하는 삶으로 변해가지 않고서는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닮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했다. “네가 해! 그럼 나도 할게!”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순종을 이끌어내려는 예수님의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말씀으로 쿡쿡 찌르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을 행위 구원론”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권 교수는 매일 하루하루의 삶,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숙해지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성경의 구원론이라고 마지막으로 강조했다. 바울이 말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씀에 매일 기쁘게 순종하는 것이다(빌 2:12).

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침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언급된다. 하나님은 구원에 이르는 여정에 함께하신다. 그 길을 주도하신다. 때로 뒤에서 쿡쿡 찌르는 듯한 강력한 말씀으로 경고하시면서 우리를 최종 목적지로 이끌어가신다. 권 교수는 구원의 현재(성화)와 미래(영화)를 신자 홀로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구원이 의로운 삶으로 영생을 하나님께 사는 장사와 같다’라는 강한 표현 등이 강의를 듣는 이들의 연약한 마음을 시험에 들게 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오해라면 그것을 불식시킬 만큼 하나님의 역할이 분명하게 강조되어야 했는데, 냉정하게 평가하면 하나님의 역할은 크게 강조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권 교수는 “그럼, 우리 구원에 있어서 은혜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라는 마지막 질문에 그 해답을 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은혜”가 “행위”의 대척점에 있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권면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우리의 행위를 비롯해서 아무 조건도 필요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건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은혜”는 ‘순종이 필요 없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라고 밝히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유대인, 헬라인, 할례자, 무할례자, 학벌, 권력, 집안 배경 이런 것 다 따지지 않고 아무나 차별 없이 부르신 그 은혜가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가르치고, 양육하여 순종을 이끌어내는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은혜의 특징이라고 했다. 권 교수의 설명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명령한 뒤 사도 바울이 강조한 은혜의 순서를 연상시킨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씀이다.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은혜로 부르신 자들에게 순종을 원하는 갈망(소원)과 순종에 필요한 능력을(행하게 하시나니) 친히 그들 안에서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세운 새 언약에 따른 약속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7).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순종하는 것은 백성의 책임과 의무다. 그러나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을 내주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확신하며 말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주체인 성도들에게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능력이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 이루신 일을 근거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능력에 있다고 했다. 양심을 더러운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능력은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하여 순종해야 할 목록을 짧게 나열하면서 끝에 매우 중요한 확신을 주는 말을 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16-24)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절). 그의 확신은 하나님의 성품, 곧 그분의 신실하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는데, 은혜로 신자를 값없이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란 믿음에 따른 확신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이다(롬 11:29).


권 교수의 말은 사실이다. 은혜와 순종은 대척점에 있지 않다. 은혜는 우리를 방종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순종하도록 능력을 더한다. 가르치고 양육하고 이끈다. 그러나 은혜를 하나님이 과거에 주신 어떤 교훈, 선한 동기 또는 영향력 정도로 취급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 다 주셨고, 성경으로 말씀하실 것 다 하셨으니, 이제는 오롯이 우리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요이 1:3, 새번역). 권 교수의 어린 시절 예화처럼, 하나님은 본향에 이르는 길, 구원에 이르는 여정,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 과정에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 풍성한 은혜와 긍휼과 평강과 진리와 사랑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시고 때로 징계하시고 보호하시며 반드시 최종 목적지까지 우리를 견인하신다. 뒤에서 쿡쿡 찌르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신 1:31).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나니(벧전 1:5)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점, 그러니까 부르실 때만 조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끝까지 약속하셨다(롬 8:30).

권 교수가 말한 “네가 해! 그럼 나도 할게!”는 구원에 이르는 길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잘 묘사한 표현이 절대로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내가 한 것처럼 너도 하라”라고 하신다. 어쩌면 이번 “잘잘법” 영상이 몇몇 성도에게 큰 오해를 가져온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용서하면 그제야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가 순종하면 그제야 그만큼 은혜를 더하시는 분이 아니다. 신자는 그런 식으로 구원에 이르는 여정을 힘겹게 걷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 용서받은 은혜의 힘으로 남을 용서하라고 권면하신다.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고 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무한한 은혜를 베푸시고는, 그 은혜에 합당한 순종을 통하여 복을 누리라고 초대하신다. 순서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먼저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신자의 일시적인 불순종과 나태함, 게으름과 방종의 삶을 바로잡을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 무한한 사랑과 넘치는 은혜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고집한다면 당신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죄인입니다’라고 경고하는 것이 성경적인 매운맛 구원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