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채널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에서 최근(2025.10.16)에 업로드한 “하나님의 구원론(매운맛ver) 듣고나서 울컥했어요영상을 리뷰하고 있다. 숭실대 기독교학과 권연경 교수는 이 영상에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은 ‘순간의 확신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확인하며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하며 설명했다. 필자는 그러나 1)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선포하신 구원의 ‘이미’ 완성된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간과하고 구원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와) 미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구원이 불확실하다고 위협하는 것처럼 들릴 소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어서 2) 개인의 상태에 따라 구원을 확신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 분명하지만,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성경이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만큼, 올바른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잘잘법” 영상의 후반부 내용에 관하여, 필자는 두 가지 질문을 더 제기하려고 하는데, 이는 이 영상을 본 몇몇 사람을 자신의 구원이 불확실하다고 느끼게 하여 두려움에 떨게 만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 첫째, 구원이 오직 우리의 행함에 달려 있는가?
  • 둘째, 구원을 오롯이 우리 힘으로 이루어야 하는가?

둘 다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확실히 “잘잘법”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론”은 우리에게 절망만을 안겨줄 것이다. 누가 행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이를 수 있겠는가? 누가 자기 힘으로 영화롭게 될 수 있겠는가? 과연 권 교수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뭐라고 답하는지, 또한 성경이 정말 ‘그러한가’ 상고하여 보자(행 17:11).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가?

권 교수는 “우리가 너무 쉽게 구원 다 받아먹은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지적하면서, 거기에 구원의 강한 확신의 부작용으로 자만과 착각에 빠지게 되면서 하나님의 공의 또는 공평하심을 무시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기독교학과 교수로서 같은 학과 학생들과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동시에 자신이 개설한 헬라어 수업을 듣고 치른 기말고사 평가를 편애 없이, 차별 없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학과 학생들을 “특별히” 더 사랑하지만, 공평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성경이 하나님의 공의를 가리켜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라고 여러 번 반복하여 가르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도 이와 같이 공평하게 우리를 대하신다고 했다(시 62:12; 마 16:27; 벧전 1:17; 약 2:14; 계 22:12).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가 똑같은 기준으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는 말일까?

권 교수는 히브리서 11장 6절,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새번역)을 인용하면서,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표현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갚아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이 말씀에 관한 해설로 그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과 하는 장사”와 같아서, ‘우리가 잘하면 영생으로 갚아주시고’, ‘우리가 못하면 심판하신다’라고 주장했다. 바울도 같은 주장을 했다고 말하면서 인용한 로마서 2장 6-8절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절 말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를 말하며,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러면, 구원은 결국 “율법을 행하는” 것, 즉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께 의를 사는 장사인가?

권 교수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는 표현을(롬 2:9, 10) 오늘날 개념으로 바꾸면, ‘먼저는 믿는 사람, 그다음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똑같이 그들이 행한 것에 따라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로마서 2장은 이신칭의를 말하기 전이니까…’라고 안심하지 못하도록, 권 교수는 로마서 2장 16절에 바울이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복음이 말하는 바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무엇인가? 권 교수의 설명은 그리스도 없는 복음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권 교수가 인용한 로마서 2장을 넘어 3장 21절에 이르면 바울은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또 다른 의이제 나타났다고 선언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 그리고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21-31)

신자가 구원에 이르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는 있으나 마나 한 분이 아니시다. 단순히 모범이 되시려고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것도 아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시고 아버지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그 의로운 기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새로운 의의 길을 아들을 통하여 나타내신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는 길이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유대인은 율법으로, 헬라인은 양심으로 각각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를 이루어야 하는, 그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문제에 똑같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둘에게 똑같이(차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의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것이 공평한 것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죗값을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당신의 핏값으로 속량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행한 대로 갚으시는데, 그 대가를 우리가 아니라 아들에게서 찾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의로운 심판을 내리시면서도 아들을 믿는 모든 자들을 의롭다고 은혜롭게 선포하실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이 선포한 복음에 나타난 “심판하시는 날”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심판 기준은 달라졌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기준은 이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된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온전한 제물을 받으시고 행위로는 절대로 온전함을 이룰 수 없는(그래서 하나님께 의를 얻을 수 없는)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셨다.

R. C. 스프로울은 개신교의 구원론을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설명했다: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 = 구원 + 믿음에 따른 행함

하나님은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은혜에 합당한 열매로 행함을 맺는다. 그것이 바울이 마지막으로 말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의 의미이다. 행함은 구원의 수단이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참 구원의 열매이다.

그러나 권 교수의 설명은 스프로울이 설명한 로마 가톨릭의 구원 공식에 가깝게 들린다:

구원 = 믿음 + 행함

이 공식엔 자랑할 것이 많다. 구원(또는 영생)을 사기 위하여 우리의 행함이라는 값을 우리가 지급했으니 말이다. ‘하나님과의 장사’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권 교수는 행한대로 갚아주시는 것이 복음의 전제라고 했고, 컴퓨터의 운영체제처럼 바닥에 깔려 있는 기본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변하지 않는 그분의 속성이라는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복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그것만으론 복음은 절대로 ‘좋은 소식’일 수가 없다. 어떻게 복음의 전제에 예수 그리스도가 빠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지 않은 구원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론의 기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도대체 누가 자기 행위로, 행한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반드시 복음의 중심에 계셔야 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까지 말했다(고전 2:2). 하나님의 공의 앞에 자기 행위로는 절대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는 죄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값없이 은혜로 얻게 되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을 빠뜨린 복음은 사실상 로마 가톨릭의 율법주의 복음과 다를 바가 없다. 만일 권 교수가 말한 구원론이 하나님의 구원론의 전부였다면,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랑하던 그가 아닌가?(빌 3:6).


필자는 권 교수가 “매운맛”이라고 써 붙인 이 영상을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있다. ‘단지 깨닫기만 하면, 지적 동의만 하면, 감정적 변화만 있으면,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다’라는 거짓 복음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야고보도 그런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야고보서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골고루 주어졌다. “매운맛”을 내더라도 먹는 사람에게 해롭지 않도록 골고루 어느 정도 맛의 균형이 잡히도록 내야 한다는 말이다. 행함이 중요하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더라도, 그것이 마치 구원의 수단이나 조건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 무엇인지는 왜 설명하지 않는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무엇을 위해서 돌아가셨는지, 그분을 믿는 자들에겐 어떤 약속이 주어졌는지 왜 말하지 않는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권 교수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예정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원 계획을 세우실 때, 믿는 자를 하나님의 대가족으로 입양하시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실 꿈을 꾸셨다고 했다. 권 교수가 자주 인용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말한다(히 12:2). 그러니까 하나님은 믿는 자를 가족으로 입양하시고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온전하게(거룩하게) 맏아들의 형상대로 빚어가신다는 말이다. 과연 권 교수가 성화(나아가 영화)의 공로를 오직 하나님께 돌려드릴까? 아니면 우리 역할을 강조한 나머지 그 부분을 또다시 과감하게 빼버릴까? 다음 칼럼에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