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평생의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적 예배로 바쳐야 할 거룩한 산 제물은 우리의 “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몸”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고(2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권면했습니다(3절).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참된 거룩함 속에 우리 몸과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제리 브릿지즈는 <거룩한 삶의 추구>라는 책에서 이것을 “몸의 거룩함”(11장), “마음의 거룩함”(12장)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네비게이토, 2023).
몸의 거룩함
브릿지즈가 주목하는 “몸의 거룩함”은 단순히 육신을 깨끗하고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과 과식, 무절제, 게으름을 피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그 욕구를 전체적으로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몸과 그 욕구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고,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절제하지 않으면 우리 몸이 “불의의 무기”가 되고 말기 때문에(롬 6:13). “육신의 정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대로 몸을 쳐서 복종시키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고전 9:27; 갈 5:17). 우리는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주도적으로 시간을 활용하고 먹고 마시는 것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몸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과식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성적 욕구가 일어나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욕구에 사로잡혀 음란한 생각을 품거나 그것을 잘못된 방식으로 해소하기도 합니다.
미셸 쿠아스트는 “만일 몸이 모든 결정을 하고 제반 명령을 내리며, 당신은 이에 복종하고 있다면, 육신은 능히 인격의 다른 제반 요소들을 삼켜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정서는 무디어질 것이며, 영적인 삶은 질식당해 결국 영적인 빈혈 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The Christian Response”, 1965). 수잔나 웨슬리도 “마음을 지배하도록 몸에 힘과 권위를 더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존 커크, The Mother of Wesleys, 1865). 사도 바울은 그래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고전 9:27). 구원을 잃어버릴까 염려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목숨 걸고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이고, 경건에 이르기 위한 투쟁에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포함했다는 것입니다.
제리 브릿지즈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먹고 마시는 욕구에 굴복하는 습관은 언제나 다른 영역에까지 확산되어 나갑니다. 무절제한 식욕을 제어하지 못하면, 정욕적인 생각도 물리치기 어려워집니다. 어느 한 영역의 죄를 성공적으로 이겨내기 위해서도 모든 영역에 걸쳐 열심히 순종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115p). 한 마디로 모든 영역에 있어서 몸의 욕구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영역이 무절제하게 방치되면, 나머지 영역까지 그 영향이 반드시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심하면 안 됩니다. 몸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어도 괜찮은 영역은 하나도 없습니다. 토마스 보스턴은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는 거룩한 폭력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몸을 강력하게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했습니다(골 3:5). 마지막에 언급된 “탐심”에 주목해 봅시다. 우리 몸이 일으키는 정욕을 내버려두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탐심을 죽이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가 섬기는 우상이 되어 우리 삶을 다스리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영적으로 나태하고 유약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 몸을 다스리셔야 하는데, 우리 육신의 소욕이 주도권을 쥐고 우리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데, 우리 몸이 원하는 대로 합니다. 결국엔 주도권 싸움입니다. 몸에게 주도권을 내어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줄 것인지. 그래서 바울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권면했습니다(롬 6:13).
마지막으로 브릿지즈는 “불같은 정욕을 제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유혹을 “피하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몸이 어떤 유혹에 취약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 어떤 사람은 성적인 유혹에 취약합니다. 그런 유혹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곳을 피하십시오. 내 몸을 자극하고 잘못된 갈망을 활활 불태우는 것들이 내 주변에 있다면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내 앞에 기다리고 있다면 숨거나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라고 말합니다(잠 27:12). 브릿지즈는 “놀랍게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아무런 계획이나 결심도 없이 이미 알고 있는 유혹 속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라고 지적합니다(117-8pp). 당신이 무엇에 자주 유혹받는지, 쉽게 넘어지는지, 정욕을 자극할 만한 사람, 상황, 대상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충분히 계획을 세우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 몸을 쳐서 복종시킬 책임과 의무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힘만으로 그것을 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정욕은 너무나도 강하지만, 성령은 그보다 훨씬 더 강하십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오직 성령을 의지하며 그분께서 우리 몸을 다스리시도록 우리 몸을 내어드립시다.
마음의 거룩함
예수님은 모든 악의 근원이 마음에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야고보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그들의 손(몸)을 깨끗이 할뿐만 아니라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명령했습니다(약 4:8). 하나님은 겉모습만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삼상 16:7). 그래서 제리 브릿지즈는 “우리는 몸의 본능을 다스리는 것을 배워야 하듯이, 우리의 생각도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120p). “외적으로는 몸의 본능에 재갈을 물릴 수 있어도, 우리 속사람은 여전히 갖가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120p).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런 종교적 외식주의자들의 문제를 꾸짖으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마음이 어떻게 인격을 변화시키는지에 관한 유명한 말을 인용하며 제리 브릿지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120p):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며,
습관을 심으면 인격을 거둔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인격을 빚는 마음을 이런 생각들로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우리는 이 세대의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채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 즉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고 유익을 끼치고 칭송받을 것들로 채워야 합니다(롬 12:1-2; 엡 4:23; 벧전 1:14). 이 말은 실질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TV프로그램, 영화, 책과 잡지, 음악, SNS와 짧은 영상, 채팅 메시지, 대화 등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을 신중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칭찬할만하고 경건을 이루는 데 유익을 주는 것입니까?
“쓰레기 넣으면 쓰레기 나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든 음식인지 신중하게 평가하고 믿음직스럽지 않은 음식은 몸속에 집어넣기를 꺼려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 몸을 바꾸듯이 우리 마음이 소비하는 모든 것이 우리 생각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이드 인 세상, 메이드 인 마귀의 상품을 우리 마음속에 집어넣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제리 브릿지즈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죄의 틀 안에 집어 넣으려고 합니다. 세상은 이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고, 굉장한 열심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부추기며 설득합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121p). 그런데도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분별력 없이 마음을 세상의 것으로 채웁니다. 조심성 없이 생각을 그런 것들이 지배하도록 내어줍니다. 어린이 찬양 가사는 이렇게 우리를 권면합니다: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위에 계신 주께서 사랑스레 보시네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네가 생각하는 걸 조심해
네가 생각하는 걸 조심해
위에 계신 주께서 사랑스레 보시네
네가 생각하는 걸 조심해
마귀는 우리에게 조심하는 건 좋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조심할 필요는 없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엡 5:3-4). 또한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철저히 통제해야 합니다. 욥처럼 자기 눈과 약속하여 음욕을 일으키는 것을 눈에 담지 말아야 하고(욥 31:1), 다윗처럼 자기 입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구하며 하나님께서 입술의 문을 지켜 모든 더러운 것에서 깨끗하게 보호하시기를 갈망해야 합니다(시 141:3). 솔로몬이 그 아들에게 훈계한 것처럼 우리는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잠 19:27).
그 외에도 성경이 말하는 음란, 부정, 방탕, 술 취함 등과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죄악뿐만 아니라 속에 잘 숨는 죄들 예를 들어 질투, 교만, 쓴 뿌리, 비난, 용서하지 않는 죄 등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다윗은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시 19:14).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결한 말씀을 가지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되도록 계속해서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제리 브릿지즈는 특별히 세 가지 대표적인 더러운 마음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비결을 소개합니다. 1) 시기, 2) 쓴 뿌리, 3) 판단입니다.
1)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만족이 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반드시 주시는 선한 분이라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시기심이 아니라 감사함과 만족함을 마음에 채울 수 있습니다(시 23:1).
2) 쓴 뿌리는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심을 믿지 못할 때 우리 마음을 차지합니다. 사람을 향한 쓴 뿌리는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결국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마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 대신 보복을 선택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하시고(롬 12:19), 모든 것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벧전 2:23).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죄지은 것과 그 죄를 모두 용서받은 은혜를 헤아리며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눅 11:4).
3) 마지막으로 판단하는 마음은 교만에 그 뿌리를 둡니다. 때로는 우리의 판단이 옳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판단이 선을 이루기보다는 악을 낳는 데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야고보는 그래서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약 4:11).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준행자”로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얻는 길에서 멀어진 형제자매를 판단하여 그 길에서 돌이키도록 겸손하고 온유하게 권면해야 합니다(갈 6:1-2). 형제자매 사랑하기 때문에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우리가 율법의 “재판관”이 된 것처럼 판단하면 우리는 죄를 짓게 됩니다(눅 6:41; 18:1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렘 17:9). 그런데 누가 이 마음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맺으신 새 언약의 약속은 새 마음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날마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내어 맡깁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다윗처럼 간구합시다(시 5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