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믿고 잘 사는 법”이라는 뜻의 유튜브 채널 “잘잘법”에서 2025년 10월 16일 한 영상을 공개했다. “하나님의 구원론(매운맛ver) 듣고나서 울컥했어요”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유튜브 섬네일엔 “신학 연구 30년 주님 앞에서 양심고백”이라는 문구와 함께, 다음과 같은 제목이 크게 적혀 있었다: “구원 열차에서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아시나요? 구원에 관한 오해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교회학교 찬양 “구원 열차”의 가사, “죄악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를 활용한 것이다. 처음 섬네일을 봤을 때, 머릿속에서 신학적 경고음이 울렸는데, 구원 열차를 탄 것 자체가 하나님 구원의 황금 사슬에 매인 것이라고 본다면, ‘내릴 수도 있다’라는 말은 구원론의 매운맛이 아니라 상한 맛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 10:28).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인 권연경 교수는 30분 남짓한 이 영상을 통하여 성도의 견인이라는 중요한 성경 교리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지적 동의, 나아가 감정적 동요만 있으면, 또는 일시적 삶의 변화(열매처럼 보이는 선한 행위)를 보면, 앞으로 어떻게 살든지 구원은 평생 보장된다’라는 잘못된 확신을 깨부수기 위하여 매운맛 제목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상을 본 몇몇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는 평생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 건가요?’, ‘하나님 나라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구원이 취소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서, 권 교수가 하는 말을 직접 들어보고 정말 그렇게 오해할 만한 대목이 있는지 진지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권 교수가 던진 몇 가지 중요한 질문과 그에 관한 성경의 답을 찾아가면서, “하나님의 구원론”의 건강한 맛을 느껴보자.

유튜브 잘잘법 섬네일 영상 캡쳐 사진

구원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것인가?

권 교수는 가장 먼저 자신이 학생과 성인에게 각각 실험한 내용을 소개한다:

  1.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습니까?”
  2. “구원 얻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입니까?”
  3. “살아 있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까?”
  4. “그러면 행함이 없이는 구원을 못 받습니까?”

이렇게 질문했을 때, 학생들은 마지막 질문에도 ‘네’라고 시원하게 대답하고, 성인들은 대답을 못 한다고 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인데, 현실과 괴리감을 어른일수록 더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또한 우리가 남을 판단할 때는 ‘행함이 없으니 구원받지 않은 것’이라고 쉽게 말하면서도, 나를 판단할 때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이니까 괜찮다고 말하기가 쉽다고 했다. 구원을 이렇게 이중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짜 풍성한 삶으로 이끌어주는 ‘구원론’”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권 교수는 우리 모두는 은연 중에 “우리의 삶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믿음이 좋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단지 그 사람의 고백이나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근거로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구원받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행위가 아니라 믿음’,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고 말할 것인데, 이는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삶에 관한 우리의 상식과 우리가 믿는 구원 교리가 충돌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권 교수는 바울(갈라디아서) 그리고 야고보(야고보서)를 어떻게 우리가 조화롭게 이해할 것인지가 과제라고 말하면서, 그 조화를 어렵게 만드는 오해를 풀자고 한다. 그 오해 중 하나가 바로 “구원받았다”라는 표현이다.

“구원받았다”라는 말은 과거형으로 이미 완성된 사실을 의미한다. 권 교수는 “신약 성경은 구원을 목표로 제시”하기 때문에 구원을 과거형으로 묘사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성경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달음박질하는 사람에게 수많은 격려와 위로와 명령이 주어졌는데, 우리는 구원을 ‘이미 이루었다’라고 보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이 와닿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성경이 ‘구원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라고 경고할 때도,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해당 사항이 없다’라고 오해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말한다.

권 교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바울도 똑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바울 자신도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야고보는 바울이 말한 열심과 열매가 조금도 없는 사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그렇다면 “구원받았다”라는 과거형 표현은 틀린 걸까?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 완성된 사실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또 미리 정하신(부정과거)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부정과거)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부정과거)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부정과거)(롬 8:30). 예수님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러나 나중에 영생을 잃거나 심판에 이를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요 5:24). 사도 요한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편지를 썼다(요일 5:13).

성경에 이중적으로 보이는 가르침이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우리가 양극단으로 치우칠 수 있는 죄성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을 이미 받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이루라’라는 명령이 필요하다. 그러나 ‘혹시 내가 구원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며 벌벌 떠는 이들에겐 ‘영생이 있음을 알라’라는 확신을 주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권 교수는 전자에 치우친 이들을 생각하며 강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경에 두 측면의 가르침이 모두 있으며, 우리는 대체로 이쪽 면에서 많은 오해를 한다’라는 식으로 성경의 균형잡힌 교리를 기초로 이야기했더라면 후자에 속한 이들을 의심과 염려에 빠뜨리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가 아니면 확신할 수 없는가?

권 교수는 자신이 대학생 때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했다고 했다. 문제는 구원의 확신이 “컨디션 따라 달라” 진다는 것이다. 며칠 경건의 시간과 기도를 성실하게 했다면 확신이 커지고, 마침 성도와 큰 갈등 중이거나 게으르고 나태한 삶에 잠시 빠졌을 때 확신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자신 없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 ‘확신’이 구원 여부를 말해주는가? ‘그럴 수 없다’라는 것이 권 교수의 대답이다. 구원과 구원의 확신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이와 유사한 고백을 담고 있다:

참 신자라도 구원의 확신이 다양하게 흔들리며, 감소되며, 일시 중단될 수 있다. 이는 확신을 보존하는 데 게으름으로써, 양심을 상하게 하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어떤 특별한 죄에 빠짐으로써, 그리고 어떤 갑작스럽거나 격렬한 시험에 의해서, 하나님이 그의 얼굴 빛을 숨기고 그를 경외하는 자일지라도 빛이 없이 흑암 중에 다니게 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씨와 믿음의 생명, 그리스도와 형제들에 대한 사랑, 신실한 마음 그리고 의무를 양심적으로 행하는 것이 결코 전적으로 없지는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로부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확신이 적당한 때에 되살아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그 기간 동안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 않고 지탱된다(18장 4항)

그래서 권 교수는 구원을 따 놓은 당상이 아니라 미래의 목표로 놓고 달려갈 것을 요구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는 “이러한 것들” 즉 “그리스도와 형제들에 대한 사랑”, “신실한 마음”, “의무를 양심적으로 행하는 것”을 통하여 구원의 소망을 더 굳게 붙들 수 있고 그래서 더 큰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미래형으로 말하며 소망하고 바라보고 얻기 위하여 달려가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현재 얼마나 확신하느냐가 아니라 장차 얻을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현재 더 충성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권 교수는 “구원의 목표를 향해서 가는 사람으로 생각하자”라고 권면했다. 구원을 결승점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권 교수는 이것을 출애굽 사건에 빗대어 설명하는데,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실 때까지 광야를 통과해야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교회가 약속된 천국에 이를 때까지, 지금 광야를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누구도 애굽에서 순간이동하여 약속의 땅에 이를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권 교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했다(고전 9:27). 야고보 또한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약 1:12). 바울과 야고보 모두 구원을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고 결승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신자가 수고해야 할 일이 있다. 시련을 견디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을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확신이 개인의 컨디션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그래서 우리 구원을 도무지 확신할 수 없다거나 그렇게 확신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또 그는 이렇게 확신(!)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9).

구원의 확신은 애초부터 우리의 상태나 업적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구원의 확신은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붙들려 있다. 우리는 천국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지 우리의 삶을 점검하면서 끊임없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하늘 아버지께서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믿고 확신하는 것이다(눅 12:32). 그리고 바로 그 확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풍족하게 맛보는 것이고,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경주를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것이다. 권 교수의 말처럼 구원의 확신과 구원 자체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권 교수는 구원의 확신을 스스로에게서 찾으려는 잘못된 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멈출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것을 바르게 권면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노력으로 미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달려가야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구원을 확신할 수는 없다’라는 식으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

“잘잘법”의 이번 영상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여정인 ‘성화’의 단편을 매운맛으로 다룬다. 성화에 있어서 신자의 태도와 역할 부분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화가 초자연적인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또 다른 면, 곧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간과하거나 빠뜨리면 구원론은 매운맛이 아니라 썩은 맛을 낸다. 권 교수는 성화의 양면,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의무를 균형있게 잘 다루었을까? 이어지는 칼럼을 통하여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