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곧 결혼해요

결혼을 앞둔 부부가 청첩장을 가지고 인사하러 왔을 때, 두 사람의 얼굴에는 오직 행복만이 가득해 보인다. 연애하는 동안 혹은 결혼을 준비하면서 의견충돌이 전혀 없었거나 싸워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서로의 장단점을 충분히 알고 있으며 모두 다 포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18년 가까이 결혼 생활을 경험한 사람의 눈에는 그들 앞에 펼쳐질 파란만장한 일들이 훤히 보이는 것 같지만, ‘어떤 여자를 만나도 나의 차고 넘치는 사랑으로 충분히 만족시켜 줄 것이다’라고 자신만만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끔찍이 사랑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다는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다. 특별히 배우자의 흠이 보일 때, 그리고 그 흠을 더는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하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때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을까? 배우자의 그 흠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결혼 생활을 오래 해본 사람일수록 답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배우자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

우리는 남편과 아내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셨는지 잘 알고 있다. 각각 자기 배우자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엡 5:22-33). 부부 관계가 좋을 때는 하나님의 요구가 그렇게까지 힘들거나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지만(심지어 당연하고 즐겁기까지 한 요구라고 여겨질 정도이지만), 갈등 중에는 하나님께서 마치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든 해내라고 강요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별히 성경이 남편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는 사랑이 아닌가?(엡 5:25).

실제로 아내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는 드물지만, 서로 사이가 좋을 때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과 열정이 솟는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적극적으로, 이타적으로, 희생적으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싶고 또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문제는 아내에게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이다. 외모에 생긴 흠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인 흠을 말한다. 아내의 죄가 남편을 불행하게 만들 때, 그때도 그리스도가 베푸신 사랑의 정도와 깊이와 방식으로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성경은 그리스도의 완벽한 사랑의 본을 제시한 이후에 다시 한번 또 다른 기준을 내놓는다: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하라(엡 5:28). 그 이유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같은 구절). 먼저 성경의 요구는 합당하다.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부부 관계를 정의하셨다(창 2:24; 엡 5:31).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왜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과 같이”하라고 명령했을까? 그것은 때로(혹은 자주) 남편이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남편의 유익과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줄 때는 아내를 자신과 같이 사랑하기 쉽지만, 오히려 남편의 유익과 기쁨과 만족을 방해하거나 빼앗아 간다고 느낄 때, 아내는 남편과 동떨어진 남이 되어 자기를 사랑하는데 걸리적거리는 원수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성경은 배우자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엡 5:29-30).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지체)이고, 그 말은 부부처럼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신다. 자기 몸(육체)인 교회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신다. 그러면 남편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자기 자신과 한 몸을 이룬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는가? 자기를 돌보고 보호하는 것처럼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하는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고, 심지어 아내를 미워할 때도 종종(혹은 자주)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배우자를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사랑한다. 그리고 가장 많이 사랑한다. 그래서 아내가 그 일에 걸림돌이 된다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아내를 미워한다. 자신을 양육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아내를 방치하고 위협한다. 특별히 아내의 흠이 보일 때, 그것이 남편의 행복을 방해할 때, 남편은 아내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과 같이 교회(우리)를 사랑하시는 본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

자기 신부인 교회의 흠을 대하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자세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실 때, 신부인 교회의 흠은 얼마나 크고 많을까? 요한이 환상 중에 본 그리스도의 모습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눈은 불꽃 같고”,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다(계 1:13-16). 한마디로 흠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이었다는 말이다.

반면, 신부인 교회의 모습은 어땠는가? 그들은 처음 사랑을 잃었고, 우상숭배와 행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언행 불일치를 보였고, 교만했으며, 미지근한 사랑을 보였다. 흠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중요한 건 그런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많은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행음하는 옛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거룩하신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신 것처럼(호 1:2), 흠 많은 새 언약의 백성 교회를 거룩하신 남편, 그리스도께서 변함없이 사랑하신다. 그분은 교회에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요구하시고 그렇게 할 때 다시 친밀한 교제와 사귐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굳게 약속하셨다(계 3:20).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라고 명령했을 때, 성경은 그 의미를 더 자세히 풀어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엡 5:25-27)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은 단회적인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의 헌신이다. 물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대신 내어주심으로 단번에 영원히 교회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자기 신부이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그걸로 그분의 사랑이 그친 것이 아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때까지,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자기 신부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물로 씻는다’라고 하실 때, 연상되는 장면이 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이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요 13:10), 그들의 죄를 단번에 씻어주실 십자가를 미리 내다보셨다. 교회는 이미 목욕한 자들의 모임이다. 그들의 온 몸은 이미 깨끗하다. 그리스도가 대신 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영원히 씻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티나 주름 잡힌 것들이 있다. 흠이 많다. 그럴 때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맑고 거룩한 말씀의 물로 당신과 한 몸을 이룬 신부 교회의 죄를 씻어주신다. 자기 앞에 영광스럽고 흠이 없는 신부가 될 때까지, 더욱 불쌍히 여기고 더욱 긍휼히 보시며 더욱 크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섬기신다.

자기 배우자의 흠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려면

배우자의 흠을 발견하는 즉시 발작하며 흥분하고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은 드물다. 조금의 티나 주름 잡힌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적대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갈등이 하나님 안에서 잘 해결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쌓여갈 때, 배우자의 흠이 너무 크다고 느껴지거나,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어서 절망적이라고 느껴질 때, 무엇보다도 나의 행복을 갉아먹거나 산산조각 내기까지 하고, 그 흠까지 용납하고 사랑할 자신이 도저히 없다고 판단될 때, 그때 우리는 어디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부부 상담이나 필요하다면 병원 치료까지 받아보고 싶을 정도로 애타게 그 곤경에서 빠져나오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시 121:2).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7).

먼저, 당신의 좁아진 시야를 넓혀야 한다. 배우자와 갈등 가운데 오래 방치되어 있었다면, 당신의 시야는 십중팔구 좁아져 있을 것이다. 당신은 피해자, 배우자는 가해자로, 한 몸이 아니라 적과 원수로 배우자를 식별하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밀려들 것이다. 이렇게까지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내 행복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어떻게 용납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절대로 불가능한 임무에 도전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시야를 넓혀 그리스도와 당신의 관계를 바라보라. 거룩하고 정결하고 영광스러운 신랑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당신은 얼마나 흠이 많은 신부인가? 얼마나 많은 범죄를 그분 앞에서 저질렀는가? 자기 목숨까지 내어준 신랑을 얼마나 쉽게 또 자주 배신하였는가? 그럴 때마다 그분이 당신께 내민 자비와 은혜의 손길을 기억해 보라.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당신의 흠을 닦아주신 그 겸손하고 온유한 사랑을 헤아려 보라.

남편과 아내에게 서로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실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할 뿐만 아니라 힘입어 하라고 권면한다(고후 5:14). ‘이런 사랑을 보여줬으니까, 당연히 그 사랑을 서로에게 실천해야 한다’라고 당위성만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너희가 이런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 사랑으로 서로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라고 우리가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는 막대한 동력이 있음을 알려주신다. 배우자가 사랑스러울 때,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티나 주름을 보일 때,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배우자의 흠까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흠까지도 사랑하시는, 그래서 흠이 없는 신부가 될 때까지 더욱 큰 은혜로 힘써 수고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배우자의 흠이 보일 때, 그때가 바로 더욱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할 때이고, 그리스도가 베푸신 사랑을 묵상할 때이며, 그 사랑으로 배우자를 더욱 힘껏 사랑해야 할 때임을 알자. 이렇게 기도하라:

‘주께서 저의 흠이 발견될 때마다 저를 더 불쌍히 여기시고 발 씻기시는 사랑으로 저를 깨끗하게 하시는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하시는 것처럼,
저도 배우자의 흠이 보일 때, 그 흠이 저를 힘들게 할 때, 더 불쌍히 여기고, 더 수고하고, 더 겸손히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빚어가시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만이 배우자를 변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