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음악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이 선물들을 도구로 활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이 베푸신 것들에 감사를 표현한다.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는 하나님이 주신 돕는 배필을 보고 아담이 입을 열어 부른 노래가 기록되어 있고(창 2:23), 성경의 마지막 책, 계시록은 수많은 천군 천사와 구속받은 백성이 다 함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세세토록 찬양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계 4-5장). 뿐만 아니라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 공동체로서 함께 부른 영감받은 찬송가집이라 말할 수 있고, 신약의 서신서에는 초대 교회가 함께 불렀을 것으로 보이는 신앙 고백이 담긴 찬송 가사가 수록되어 있다(엡 1:3-14; 빌 2:6-11; 골 1:15-20). 무엇보다 성경은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에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권면한다(엡 5:19).
예배를 뜻하는 영어 단어 “Worship”이 전인격적인 예배, 즉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예배라는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단지 예배 음악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것은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회중이 함께 예배할 때, 노래와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다. 회중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가장 적극적으로 예배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 노래와 음악이라는 도구 자체가 회중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쉽게 매료시키고 고조시키며 감동으로 이끄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은 어떤 노래를 선곡할 것인지, 어떤 음악 형식을 취할 것인지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양극단의 비판과 주장이 있다.
한쪽에서는 사람의 목소리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악기이고 나머지 악기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을수록 더 순수하고 거룩하며 좋다고 말한다. 악기 없이 사람의 목소리로만 찬양을 부르는 것이 특정 교단의 오래된 전통으로 굳어지면서 좋은 것으로 여겨질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구도 성경에서 이를 지지할 구절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오히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말하면서 사람의 호흡으로만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악기를 총동원하여 예배할 것을 요구한다(시 150:3-6).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 예배드리든지 상관없이 기뻐 받으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의 마음을 더 사로잡을 음악 형식을 추구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말한다. 특별히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이질감을 크게 느끼지 않도록 세속 음악 형식을 취한다면, 전도의 목적까지 이룰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하는 자들”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다(요 4:23). 오직 구원받은 자만이 내주하시는 거룩하신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진리로 깨끗하게 하심을 입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릴 수 있고 찬양을 포함한 모든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익숙한 음악 형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로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그러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거듭난 성도가 함께 찬양하기에 합당한 노래와 음악은 무엇일까? 몇 가지 생각할 만한 것들을 살펴보자.
1. 가사
브라이언 채플은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라는 책에서 루터와 칼빈, 웨스트민스터 회의, 로버트 레이번 등의 역사적 예전을 비교하면서 그들 모두가 창조, 타락, 구속, 영원이라는 구속사의 큰 이야기를 예전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부흥과개혁사, 2011).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죄인의 상한 심령이 담긴 회개의 고백을 노래로 표현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감사하는 노래를 드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이 땅에서 삶의 예배를 드릴 것을 결단하는 찬송을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 예배 찬양은 복음의 서사를 담아내기보다는 이어서 선포될 말씀과 같은 주제를 노래로 담아 성도들이 준비된 마음으로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일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사가 얼마나 성경적으로 올바른 교리를 담아내고 있는지, 또 얼마나 풍성한 진리를 고백하게 하는지 관심을 두기보다는 얼마나 감정적으로 회중의 마음을 건드리고 움직이는지에 초점을 맞추기가 쉽다.
예배 인도자가 선곡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가사인데, 결국 예배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도구를 통하여 하나님께 어떤 내용의 고백을 올려드리느냐이기 때문이다(물론, 모두가 진정한 마음으로 고백한다는 것을 전제로). 우리는 기가 막힌 멜로디와 편곡, 합주와 노래 실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어도 담고 있는 가사가 ‘나를 사랑하소서, 나를 알아주소서’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배 인도자 밥 코플린은 <참된 예배자>에서 “성경적 사실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노래하기 위해 사용하는 곡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진리는 선율보다 앞선다”라고 말했다(더드림, 139p). 그러므로 (1) 회중 찬양의 가사는 성경의 진리를 벗어나거나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의 하나님은 진실한 고백으로 높임 받으신다(요일 1:5-7). 회중 찬양의 가사는 오히려 진리를 명확하고 풍성하게 담고 있을수록 좋다.
(2) 회중이 함께 고백하는 가사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고백과 구분되어야 한다. 기독교 음악은 다양한 형식을 추구할 수 있고, 여러 종류의 고백을 담아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음악 중에서 회중 찬양을 위한 음악과 노래는 공동체적인 고백을 담아내야 한다. 개인이 부를 때 정말 좋은 노래도 회중이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나’보다는 ‘우리’의 고백이 담긴 찬양). 스캇 애니올은 <찬양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책에서 “회중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하여 공적으로 표현되는 회중의 영적인 연합 합창적 화답”이라고 했다(생명의말씀사, 232p). “회중의 영적인 연합 합창적 화답”으로서 적합한 가사를 찾아라.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베푸신 은택을 기억하고 높이는 가사를 선호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받은 우리가 느끼고 표현하는 고백도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등의 진실하고 아름다운 고백도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찬양 가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고 높이고 찬양하는 내용이라면, 우리도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주로 우리의 고백을 노래하는 것보다는 그 고백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과 은혜로운 역사를 노래하는 것이 더 낫다.
2. 음악
성경은 음악 형식을 규정하지 않는다. 구약시대 시편이 불렸던 음악 스타일을 오늘날 현대 예배 찬양에 되살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의복처럼 음악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결국 회중 예배에 있어서 음악은 회중의 고백을 가장 잘 담아내는 방식이어야 한다. 제임스 화이트는 <기독교 예배학 개론>에서 “음악이 예배를 돕는 이유 중 하나는 음악이 평범한 연설보다 표현이 더 풍부한 매체라는 사실이다. 음악은 박자, 음조, 음량, 멜로디, 화음, 그리고 리듬에 있는 다양성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강렬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할 때보다, 노래할 때 훨씬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음악은 음악 없이 표현되는 것보다, 더욱 강렬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으며, 또한 종종 그렇게 전달된다”라고 말했다(CLC, 161p).
그러면 어떻게 강렬한 느낌을 담은 회중의 고백을 회중 찬양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까? (1) 회중이 낼 수 있는 음역과 따라가는 데 어렵지 않은 박자를 갖춰야 한다. 음악은 회중의 고백을 단조롭지 않게 하고 오히려 지적 동의와 함께 풍부한 감정적, 의지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매력적인 도구다. 그런데 만일 회중이 내기 힘든 음역을 고집하거나 맞추기 힘든 박자를 요구한다면, 또한 생경한 멜로디로 가사가 아니라 멜로디에 집중하도록 만든다면, 회중 찬양의 음악으로서는 유익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2) 같은 맥락에서 음악은 회중의 고백을 돕는 훌륭한 도구로서 작용할 때, 가장 적합하다. 가령 죄를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는 고백을 신나고 즐거운 음악에 담아내기는 힘들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을 높이는 음악은 그만큼 진중하고 엄숙해야 한다. 구속의 기쁨과 영생의 즐거움을 고백할 때, 그때야말로 기쁨의 멜로디와 함께 박수가 동원될 수 있겠다. 최고의 음악 형식은 결국 회중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에 집중하도록 돕는 형식이다. ‘이 대목에서 베이스가 정말 멋지게 연주되는구나!’, ‘드럼 소리가 너무 큰가?’ 등에 관심이 쏠리게 만드는 반주가 아니라 모든 것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연주되어 회중이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고백하도록 돕는 음악을 지향해야 한다.
(3) 스캇 애니올은 “하나님은 너무 가벼운 음악이나, 천박하거나, 감성적인 음악은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종류의 음악은 회중 예배에 결코 적절한 음악이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생명의말씀사, 310p). 제임스 화이트는 <기독교 예배학 개론>에서 교회 음악이 세속 음악과 늘 논쟁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는데, 결국 회중 예배에 적절한 음악이 될 수 있는지 여부를 따질 때, 얼마나 그 음악이 세속 음악으로 가볍고 천박하고 감성적으로 사용되는지를 첨예하게 검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중 찬양을 위한 음악은 세속 음악과 되도록 같아지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그 반대의 노력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시고 그들에게 제사 제도를 내려주실 때, 우상 숭배자들과 구별되는 거룩하고 정결한 방식을 주신 것처럼, 교회 음악과 회중 찬양도 세속 음악과 구별될 필요가 있다. 유행을 타거나 대중에게 관심과 인기를 얻는 음악을 추구하지 말고, 언제까지나 하나님께 합당한 진지하고 거룩하며 지적, 감정적, 의지적 표현을 골고루 이끌어내는 데 유익한 음악을 추구하라.
결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는 명령에서, 우리는 회중 찬양의 여러 요소를 발견한다. 먼저, 회중 찬양을 통하여 우리가 하는 일, 1) 우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는 것, 2) 서로 화답하는 것, 즉 수직적 고백과 수평적 교훈을 회중 찬양을 통하여 한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그것을 “시”, “찬송”, “신령한 노래들”이라는 다양한 형식의 예배 찬양을 통하여 공동체적으로 한다(“서로”, “너희”). 지금은 지역적으로 흩어진 모임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배와 찬양받으시지만, 언젠가 모든 구속받은 백성의 입술이 주를 고백하고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세세토록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게 될 것이다. 매주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천상의 예배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존티 로즈는 <개혁교회의 예배>에서 “예배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생명의말씀사, 45p). 우리의 찬양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한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주시기를, 우리의 음악이 하나님을 만나 뵐 때 그분께 합당하게 드려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예배 찬양이 주께 노래로 올려지는 우리 마음을 더 아름답고 거룩하게 빚는 도구가 되기를, 서로 화답할 때 나누는 교훈을 더욱 정결하게 다듬는 도구가 되기를 간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