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0일, 미국에서 끔찍한 총기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하나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한 가톨릭 학교에서, 또 하나는 유타주 오렘의 유타 밸리 대학교에서. 2,000 km가 넘도록 멀리 떨어진 두 장소에서 울려 퍼진 총성에 무고한 어린이와 시민이 사망했고, 부상을 입었다. 가톨릭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은 특별한 범죄 전력이 없었던 23세 로빈 웨스트먼이 범인으로 지목되었는데, 그는 미사에 참여 중이던 사람들을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많은 학생이 가득했던 그 장소에서 안타깝게도 8살 머켈과 와 10살 모이스키가 숨졌고 17명의 부상자(그중 14명이 어린이)가 발생했다. 웨스트먼은 범행 후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같은 날 유타 밸리 대학교에서는 “아메리칸 컴백 투어” 행사가 진행되었다. 미국 보수 청년 단체 “터닝포인트 USA”의 창립자였던 찰리 커크가 그 행사의 강연자로 초청되었고, 약 3,000명이 학생과 시민이 이 행사에 참여했다. 그때 한 발의 총성이 울렸고, 총알은 정확히 커크의 목을 관통했다.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커크는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건물 옥상에서 범행을 저지른 용의자는 도주 끝에 결국 붙잡혔는데, 전과나 폭력 범죄 이력이 없는 22세 타일러 로빈슨으로 밝혀졌다. 유타 카운티 지방검사는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두 사건은 여러 면에서 닮았고 또 다르다. 둘 다 총기 사건이다. 둘 다 범인이 범죄 전력이 없는 청년이다. 둘 다 범행 대상을 종교인으로 삼았다: 가톨릭 학교 학생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찰리 커크. 둘 다 미국에서 일어났고, 둘 다 범행의 대가로 자기 목숨을 잃거나 잃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가톨릭 학교에서는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이 다쳤고, 유타 밸리 대학에서는 건물 밖에 있는 사람이 희생되었다. 가톨릭 학교 총기 사건은 무차별 난사였고(대상이 특정되지 않았다), 찰리 커크는 특정되어 총격을 당했다. 유타에서는 단 한 발의 총알만 사용되었고, 그 밖의 총기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각각의 사건을 정치 이념과 사상 전쟁에 이용한다. 보수는 진보의 혐오가 일으킨 범죄라고 비방하고, 진보는 보수가 만들어낸 갈등 구조가 가져온 문제라고 지적한다. 진보는 보수 진영의 핵심이었던 찰리 커크의 죽음만 이슈로 만들고 가톨릭 학교에서 희생된 아이들은 왜 다루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보수는 진보적인 정치를 표방하는 많은 인사들과 청년들이 찰리 커크의 죽음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폭력적인 반응을 제시하며, 이것이 진보가 감추고 있는 끔찍한 본모습이라고 고발한다.

필자는 두 사건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이념이나 사상을 옹호 또는 반박할 목적이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표면상 드러난 사건의 동기와 목적이 정치적인 요인과 접촉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건의 본질은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치명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사건은 오늘날 참담한 정치적 현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신학적 진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총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어떤 정치적 이념을 따르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대응책을 마련하기에 앞서, 그 방아쇠를 당기게 한 사람의 본질적 문제, 곧 마음의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 지난 9월 10일, 미국에서 각각 울린 총성은,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이 낸 아우성이었다.

1. 죄는 크던 작던 모두 악하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일어난 사건의 총책임자인 브라이언 오하라 경찰청장은 “아이들로 가득했던 성당에 총을 난사하는 그 잔혹함과 비겁함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종종 한국에서도 소위 ‘묻지 마 살인’이 일어나는데, 대상을 특정 짓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을 무참히 공격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범인이 잡히고 범행 동기가 밝혀지면서, 자신이 당한 어려움이나 무시,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나 환경 등에 대한 분노, 스트레스 등을 폭발시킨 것이라고 변명하는 것을 볼 때, ‘그런다고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는 게 말이나 되는가?’라고 대다수의 사람이 생각한다. 그 정도 선은 지켰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정도 통제 및 절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있다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일이다. 그래서 아무나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표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마음에 쌓은 악을 분출하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마음에 가득한 분노를 나쁜 말과 험한 몸짓으로 쏟아낸 적이 있다. 그것도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은밀히 품었던 욕정을 배출하고자 충절을 약속한 연인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기도 하고, 세상의 명예와 부를 더 많이 가지고 싶어서 감추고 속이고 편법을 사용하는 일에 아무런 가책을 못 느끼기도 한다.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도, 사실은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해치고 또 상하게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성경은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내버려 두”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하는 일,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와 같은 악이 우리 삶에 끊이지 않는다(롬 1:28-32). 적정선을 지키는 것,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통제력이 있어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까지 이르게 하지 않도록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정도가 지켜지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내버려두신다면, 우리 손에 총이 쥐어졌을 때,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안에 넘치는 악은 언제든 방아쇠를 당기려 할 것이고, 하나님이 막지 않으시면, 크고 작은 악을 표출하는 데 익숙한 우리는, 결국 잔혹한 악을 행할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의 방아쇠를 당겨 우리 안에 쌓은 악을 특정인 또는 특정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발포한다.

2. 죄는 진실을 죽도록 미워한다

찰리 커크를 죽인 로빈슨은 룸메이트와 주고받은 문자를 통하여 범행 동기를 밝혔다. “그의 혐오에 질렸다. 어떤 혐오는 협상할 수 없다”가 그의 답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자를 애도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반기고 축하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기독교인이었던 커크를 모욕했다. 유타에서 발사된 단 한 발의 총알은 앞서 말한 죄인이 쏟아낸 악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죄는 진실을 죽도록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가톨릭 학교에서 무차별 난사된 총알은 특정인에 관한 혐오가 아니라 자기 분노를 무고한 사람에게 그냥 쏟아낸 것이었다면, 유타 밸리 대학에서 발사된 총알은 정확한 대상을 겨냥한다. 자신이 듣기 싫어하는 진실을 쏟아내는 한 사람을 죽도록 미워하는 마음이 탄피에 새겨져 있었다. 남편이자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남겨진 아내와 어린 두 딸이 비통한 슬픔에 잠겼지만, 공개적으로 그들을 조롱하며 승리의 축배를 들어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진실을 죽도록 미워하는 죄인의 본색이 낱낱이 드러났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그러고는 이렇게 책망하셨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5). 죄인은 진리를 미워한다. 그래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다. 명백한 증거와 사실을 밝혀도 믿지 않고, 그것을 말하는 이들을 죽도록 혐오한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품는 것도 옳다고 여긴다. 미움이 곧 정의라고 믿는 것이다. 커크를 죽인 자도 그렇게 생각했다. 성경적으로 또 의학적으로 성별은 두 개라고 올바른 진리를 무례하지 않게 논증했지만, 그는 그것을 혐오 발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혐오 발언을 멈추게 할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정의 구현이라고 그는 믿었지만, 사실은 진리를 죽도록 미워하는 거짓에 사로잡힌 것뿐이다.

자신을 완벽한 의인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실수와 악함을 조금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당신은 죄인이다’라는 말에 우리는 쉽게 발끈한다. ‘당신의 죄는 당신을 영원한 심판으로 이끈다’라는 말은 무례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당신은 암입니다’라는 말이 아무리 당혹스럽고 억울하며 한편 화가 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심스럽게 친절하게라도 반드시 전달해야 한다.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진실을 미워하는가? 왜 우리에 관한 냉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싫어하는가? 우리가 선호하거나 지지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이란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왜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회개하기보다는 반격하고 보복하기를 기뻐하는가?

우리 안에 악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악의 본질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롬 1:28).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고, 하나님이 진리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 속한 진리까지도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진리가 빠져나간 그 “상실한 마음”에는 거짓이 온통 자리잡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옳고 그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모든 진리에 관하여 무지한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우리는 나름대로 의로운 것을 추구하려고 하고 또 무엇이 바른 것인지 알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진리의 하나님을 혐오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언제든지 진리를 죽도록 미워하는 마음으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진리를 잠재우기 위하여.

3. 진리는 죽지 않고 살아서 반드시 죄를 심판한다

머켈과 모이스키는 숨졌다. 찰리 커크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범인들이 잠재우려 했던 진리는 숨을 거두지 않았다. 진리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범인들은 각각 스스로 또는 타인에 의하여 목숨이 끊어진(질)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 땅의 법정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악행을 벌하는 칼을 쥔 정부가 살인범의 생명을 빼앗는 처벌을 내릴 것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형벌이 남아있다. 사형보다 더 끔찍한 형벌이 남아있다고? 그렇다. 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멸하는 처벌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는 바로 진리로 모든 것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분 앞에 모든 영혼이 서게 될 것이고, 그분의 진리의 법정 앞에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난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저지른 적이 있다면, 거룩하신 재판관의 판결에 따라 영혼의 파멸이라는 심판을 세세토록 받게 될 것이다. 평생토록 진리를 거부하고 내 안에서 그 진리의 목소리를 죽여왔던 사람들은 결국 죽어서 그 진리를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 진리에 따라 판단받게 된다는 말이다. 진리는 죽지 않는다. 진리를 거부한 이들이 죽는다. 그리고 진리는 언제까지나 살아서 죽도록 대항했던 이들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영원한 멸망이라는 저주의 심판을 내릴 것이다.

그러면 찰리 커크도 진리 앞에서 그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여 결국 그 영혼의 파멸을 맞이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였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자기 영혼을 의탁한 자였다. 커크도 진리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연약하고 부족한 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리의 판결을 받을 때, 진리 앞에서 전혀 어긋난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이 없는 분이 변호사로 그가 무죄를 얻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우시기 때문에, ‘내가 그의 의로움이 되고, 내가 그에게 나의 온전함을 옷 입혔다’라고 증언하시기 때문에, 그는 살아있는 진리와 단절되는 심판이 아니라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영생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나 선물하기를 원하시는 은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시는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은 진리를 미워하고 그 마음에 거짓이 들어찬 사람은 언제나 악을 발사하는 방아쇠를 당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 마음의 자리에 하나님을 다시 모셔 올 수 있고, 다시금 진리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 온갖 거짓을 몰아내고 자유를 누리며 진리에 따라 살도록 하실 수 있다. 찰리 커크는 “만일 당신이 죽는다면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가?”라는 인터뷰에 “믿음의 용기”라고 답한 적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라고 그는 이어서 답했다. 그렇다. 그리스도께 둔 믿음. 그 믿음만이 온갖 미움과 죄악이 쏘는 방아쇠에 상처 입고 죽임을 당해도, 우리를 영원하신 진리 앞에서 의롭고 거룩하게 지켜내고 그 진리의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 영생을 누리도록 보장한다. 슬프고 비통한 죽음과 도저히 이해 못 할 죄악의 참상 가운데, 우리 모두가 믿음의 용기를 갖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