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제리 브릿지즈의 저작 <거룩한 삶의 추구> 2장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소유로 택하신 모든 백성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이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이 하나님 당신의 거룩하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그러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거룩함의 표준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거룩함의 기준은 ‘문화적’이거나 ‘개인적’일 때가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자신의 거룩함을 측정하거나(‘세상이 이렇게 악한 것에 비하면, 나는 거룩한 측에 속하지’), 또는 개인이 세운 기준으로 얼마나 거룩함에 이르렀는지 판단하는 것입니다(‘예전에 비하면 나는 상당히 좋아졌다고 볼 수 있어’). 그러나, 하나님은 타인이나 사회가 규정하는 거룩함이나 스스로 정립한 거룩함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표준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리 브릿지즈는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24p).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완전합니다(신 32:4). 우리의 도덕성은 두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1) 무지: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가름하기 어려운 일들을 수시로 만납니다. 판단하는 데 필요한 지식도 부족하고, 지식이 충분하다고 해도 그것을 활용하여 결론에 이르는 데 필요한 지혜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십니다(시 139:4). 또한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십니다(시 147:5). 그래서 그분의 거룩하심은 한계가 없습니다. 2) 무력: 우리는 옳은 것을 알지만 그것을 행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원하는 만큼 행할 능력도 충분하지 않지요. 그래서 여러 가지 장애물로 인하여 의지가 꺾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운 일을 행하십니다(시 11:7). 절대로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으십니다. 옳다고 여기시는 대로 행하실 능력이 그분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무결합니다(요일 1:5).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라고 증언했습니다(요일 1:5). 하나님에게서 악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고후 5:21). 우리는 종종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을 만납니다. 하지만, 선한 사람으로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그들에게도 흠은 분명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순도 100% 선하신 분이시고, 그 안에 0.0000…..1%의 결점도 발견되지 않는 분이십니다(무한대의 0을 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일을 행하시는 데 있어서 조금의 실수도 없으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불변합니다(약 1:17).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변하지 않는 신성과 완전히 일치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절대로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진보를 보이면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데, 그런데도 그들이 참여하는 신성과 이질적인 생각과 행동의 열매를 맺을 때가 있습니다(롬 7장).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거룩하신 성품과 모순된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올바른 반응
위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거룩한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 의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완전무결하고 절대로 변하지 않는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불가능한 기준이라고 여기며,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핑계로 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거룩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일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첫째,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이 언제나 완전하고 옳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고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의 삶을 택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틀렸고, 옳지 않으며,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정확히 그렇게 거짓을 속삭였습니다(창 3:4-5).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할 때, 완전무결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은 일을 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스티븐 차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의심하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순전하심을 부인하는 것은 그분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보다도 더 심한 해를 하나님께 가하는 것이다.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만, 순전하심을 부인하는 것은 그분을 추하고 역겨운 불구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하나님은 거룩하시지 않다고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1958).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믿고 범사에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는 자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계 4:8; 출 15:11).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완전하게 해주는 속성입니다. 그분의 능력은 거룩한 능력이고, 그분의 자비는 거룩한 자비이며, 그분의 지혜는 거룩한 지혜이고,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찬양받기 합당하신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그분의 거룩하심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본 장면에서 스랍들이 서로 불러 찬양했던 것처럼, 그분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높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사 6:3). 거룩한 삶을 추구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높여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동력이 그 믿음과 열정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예배하지 않는 자는 결코 거룩한 삶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거룩함이 자신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동기와 능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범사에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죄인의 간사함과 완악함은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백과 회개를 택하기보다는 죄책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기준을 변경하려는 모습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기준이 분명하게 주어졌지만, 죄인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내가 닮을 수 있겠어? 하나님도 최대한 노력하라고 하신 것이지, 정말 그분의 거룩하심을 이루라고 하신 것이 아닐 거야’라는 식으로 피해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라고 요구하고(벧전 1:15),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합 1:13)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절대로 죄를 묵인하거나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분의 거룩하신 기준을 낮추거나 변경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신자는 때로 구원의 은혜를 핑계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내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잖아’, ‘어쨌든 거룩함에 조금씩 이르고 있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면서 양심에 거리낌이 되는 어떤 일들에 관하여 하나님께 변명하고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면 죄책감을 무시할 수 있고, 죄를 허용하여 즐기며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을 인정하면 죄책감을 무시할 수 없고, 죄를 자백하여 은혜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당신의 삶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과 환경과 사람이 죄를 짓게 만드는 시험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약 1:13). ‘하나님이 이런 궁지에 나를 몰아넣으셨으니, 내가 택할 수 있는 반응은 이것뿐이야’라고 말하면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 것의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완전무결하게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죄를 조장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으시고, 죄로 반응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거룩한 삶의 추구에 있어서 가장 첫째 되는 동기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라’는 말은 옳지만, 동기로서 첫째 되는 동기보다 약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벧전 1:17).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이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를 왜 죽기까지 내어주셨는지를 아는 자입니다. 바로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이죠. 조금의 죄도 하나님이 눈감아 주실 수 없어서, 그 거룩하신 기준에 누구도 이를 수 없어서, 우리 죄와 허물을 모두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고 피를 흘려 주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맺게 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1-13).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감사하기 때문에, 다시는 죄 가운데 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대속을 아는 자는 그래서 거룩한 삶을 추구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 죄를 자백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옷 입히신 의로운 신분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 위한 경주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