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두 가지 예식, 세례와 주의 만찬 중에서 만찬은 오늘날 많은 교회로부터 천대받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예수님은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과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명령하셨고(눅 22:19), 이후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첫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음으로 그 명령에 신실하게 따랐다(행 2:46). 만찬을 함부로 대한 교회는 사도의 권위 아래 엄한 질책을 받기도 했는데,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라고 책망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고 만찬의 본래 의미와 중요성을 재차 가르쳤다(고전 11:23-26).
현재 많은 교회가 주의 만찬을 거의 행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분별된다: 1) 현실적인 이유로 주일 예배 프로그램에 넣기가 번거롭기 때문에, 2) 도덕적인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의 무게를 간과하기 때문에, 3) 신학적인 이유로 주의 만찬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비밀과 축복에 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주의 만찬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교회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종교 개혁 시대,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의 핵심 문제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는 주의 만찬을 소홀히 여기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신학적인 견해의 차이가 성찬의 의미와 중요성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를 가져왔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주의 만찬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 화체설을 주장했고, 종교개혁자인 칼빈과 츠빙글리는 각각 주의 만찬을 행할 때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믿는 영적 임재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모든 것을 상징하는 도구라고 믿는 상징설을 주창했다.
1. 화체설: ‘이것은 내 몸이라,’ ‘이것은 내 피니라’
어떻게 떡이 사람의 살로 변하고, 포도주가 사람의 피로 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된다고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화체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그들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3-57).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반응한 것이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 여럿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떠나 다시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되었다(요 6:60, 66).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진짜 예수님이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하실 거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실 때, 떡을 가지고 축복하신 후 그들에게 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잔을 나누실 때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26:26-27). 예수님은 떡과 잔이 각각 당신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몸’과 ‘피’라고 직접 말씀하셨다. 그래서 화체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잔이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주장이 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상징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말한다고 내 마음이 호수가 되는건 아니다!
하지만, 상징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직유가 아니라 은유의 방식을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A는 B와 같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직유라면, ‘A는 B이다’라고 말하는 방식이 은유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것은 내 몸이요, 내 피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은유로 말씀하시고자 하신 대상과의 유사성을 드러내신 것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표현으로 시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자신의 마음이 물로 가득 채워진 호수라는 게 아닐 것이다(혹은 마음이 호수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대 노 저어오오”라는 이어지는 시구를 통하여 잔잔하고 고요한 시인의 마음에 사랑하는 대상이 다가올 때, 파도 같은 사랑, 헌신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살’과 ‘피’라고 하실 때는 어떤 의미를 상징적으로 담아내신 것일까?
먼저,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가르치실 때, 이런 말씀도 같이하셨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8). 예수님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음식을 “이 떡” 곧 당신의 살에 은유하여 말씀하셨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는 그들을 영원히 살게 하지 못했지만,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그 본질적인 차이와 함께 유사성을 찾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예수님의 믿는 것이 곧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실 때도, 떡과 포도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전통적인 유월절과 주의 만찬 사이 유사성을 제자들이 이해하기를 원하셨다. 유월절의 유래는 출애굽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기 위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집 안에서 희생당한 양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게 하심으로서 심판을 넘어가고(Passover: ‘유월’)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며 감사하도록 하셨다(출 12장). 예수님은 그들이 오랜 세월 먹던 떡과 잔에 비슷하지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그들 대신 죽어야 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예수님이 죽임당하실 것이고,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기념해야 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이제는 그들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기념하는 것이다. 주가 오실 때,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예수님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신 이후로, 유월절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기념하는 상징적 도구가 되었다.
3. 영적 임재설: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다’
화체설보다는 확실히 상징설이 더 성경 본문의 의미에 부합한다. 그리고 만일 만찬이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면, 우리는 로마 가톨릭이 하는 것처럼 함부로 만찬을 처분할 수 없다. 신성한 물질로 거룩하게 다루고 보관해야 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결국 만찬을 신격화한다는 것이다. 떡과 잔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깊이 새기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 신성을 지닌 신비로운 떡과 포도주로 숭배하게 될 소지가 다분하다. 교황을 성경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교회의 머리로 삼거나 마리아를 원죄가 없는 여신으로 섬기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상징설에도 단점이 있다. 떡과 잔을 지나치게 신격화하지 않을 수 있도록 안전하고 건전하게 주의 만찬을 기념하도록 돕지만, 동시에 만찬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간과하고 무시할 수 있는 위험성이 크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다. 그들은 떡과 잔을 단순한 음식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했다(고전 11:21). 사도 바울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 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책망했다(고전 11:22). 주께 받은 만찬의 전통을 상기시킨 바울은(고전 11:23-26), 이어서 떡과 잔이 단순히 상징적인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7-29). 만찬은 단지 음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함부로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서 적지 않은 자들이 주의 심판을 받아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죽은 자)”가 되었다(고전 11:30).
그래서 루터는 화체설과 실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공재설을 주장했는데, 떡과 잔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함께 공존한다는 이해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견해다.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지지한다. 만찬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거나(화체설),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공재설), 성령의 역사로 만찬에 참여하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영적으로 전달된다고 믿는다. 만찬이 영적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단순한 상징물에 불과하다고 보는 관점(상징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물론, 예식은 하나의 형식이고, 피치못할 사정으로 예식을 할 수 없는 신자에게 그 예식이 담고 있는 영적 유익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지만(가령, 세례 없이는 구원을 못 받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만찬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구원의 은혜를 계속해서 누리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고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찬이 단지 형식에 불과하고, 그래서 그 형식을 무시해도 본질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보는 것은 굉장히 무책임한 발상이다.
칼빈은 나중에 하인리히 불링거(츠빙글리의 후계자)와 만나 만찬에 관한 그들의 견해, 즉 영적 임재설과 상징설이 양립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신자와 영적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영적 임재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떡과 잔이라는 물질에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나 그분이 주시는 무언가가 신비로운 형태로 임재한다고 보는 관점은 성도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화체설, 공재설 처럼), 물질은 기념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둘 다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존 맥아더 목사는 <성경 교리>를 통하여 “성경의 모든 본문을 살펴보았을 때, 성찬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일에서 더 큰 힘을 얻게 해주는 기념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결론지었다(1359p).
결론
존 맥아더 목사는 성찬이 주는 여섯 가지 유익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예수의 대속적 희생제사 기념, 2)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으심, 부활, 승천을 포함한 복음의 역사적 진리 상기, 3) 죄를 회개하는 기회 제공, 4) 죄에서 속량함과 구원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을 기뻐할 계기 마련, 5) 주를 사랑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동기 부여, 6) 곧 돌아오실 주님을 소망하게 함. 요약하면,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분과 연합한 우리가 얻게 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떡과 잔 자체에 특별한 효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만찬을 대할 때마다, 신자는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은혜의 복음을 더 많이 묵상하고 기념하고 감사하며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상징적인 빵과 음료라고 할지라도, 고린도 교회처럼 만찬을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대하면 안 된다.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은 절대로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영원한 중보자가 되시고 그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신다면, 우리는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그 놀라운 실재를 먹고 마시기 위하여 갈급해 하고 목말라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