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無 교회”란 황인권 대표가 올해 6월에 출간한 저서 <5無 교회가 온다: 십자가 없는 MZ 교회의 등장>에서 묘사한 다섯 가지 정통 교회의 상징, 1) 로고에 있는 십자가, 2) 새벽 예배, 3) 성경 공부, 4) 구역, 5) 장로 직분이 없는 교회를 말한다. 황 대표는 이런 교회가 최근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의 트랜드라고 했다. 로고와 새벽 예배, 구역은 교회마다 자유롭게 선택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쳐도, 성경 공부와 장로 직분이 없는 교회는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는 처음부터 사도들의 가르침을 강조해 왔고(행 2:42), 성경의 바른 교리로 성도를 돌보고 보호하고 인도할 장로를 각 교회에 세워왔기 때문이다(딛 1:5). 황인권 대표는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대학원에서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인권앤파트너스라는 전략 브랜딩 스튜디오 대표로 일하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교회를 하나의 브랜드로 보고, 오늘날 더 많은 소비자가 선호하는 브랜드가 되기 위하여 교회가 어떻게 전략적으로 보여야 할지 큰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를 나왔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성경이 강조하는 십자가, 예배, 교리, 교제, 직분 자체를 없애려고 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한 강연에서 황 대표는 ‘5無 교회라고 해서 이런 것들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라고 밝혔다(영상). 다만, 정통 교회가 고수하는 어떤 이미지들이 현대인이 교회 가까이 나오는 것을 방해하는 벽이 되고 있으니, 그 장벽을 낮추고 허물자는 얘기다.
성육신은 그런 게 아니다?
<5無 교회가 온다>를 가지고 크리스천투데이 이대웅 기자가 황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책 내용을 “①MZ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라 ②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라 ③ 성벽을 허물고 그들을 위해 변화하라” 정도로 요약할 수 있냐고 묻자, 황 대표는 “저는 ‘이해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교회는 진리가 있으니, 보통 ‘우리한테 맞추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성육신(incarnation)’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라고 답했다(기사). 흥미로운 대목이다. 문화와 트랜드에 맞춰 변화를 요구하는 주장엔 어김없이 ‘성육신’이 따라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 년 전, 당시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맞는 옷을 입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오신 원리를 현대 교회가 구도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세대 청년들이 답답해할 만한 전통적인 요소라고 여겨지는 것들 가령 목회자가 입고 있는 양복, 교회 로고의 십자가, 장로 집사의 뚜렷한 직분 구분 등을 제거하는 것이 그들이 교회를 더 친근하게 여기고 다가오기 쉽게 만드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수적인 것을 고쳐서 본질적인 복음 선포가 되게 만드는 일이니, 사실상 비판받을 것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이 아닌가?
한때 예람 워십 팀도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라는 곡으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분명히 예배 찬양 시간에 부른 곡인데, 가사에서 기독교적 요소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예람 워십은 간주에 비디오 게임의 배경 음악, 아이돌 가수의 노래 멜로디 등을 믹스하는 것으로 또 다른 논란의 중심에 있던 팀이다. 한 인터뷰에서 예람 워십 팀원 중 한 사람이 여러 논란을 해명하면서, 그들의 시도와 노력의 최종 목적은 결국 ‘복음 선포’라고 했다(영상). 기독교적 요소를 제거했지만, 그 곡을 통하여 교회를 찾거나 복음을 들을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고 권장해야 할 일이 아닌가? 예전부터 기독교 음악과 관련된 이런 논쟁에서도 어김없이 ‘성육신’이 등장한다. 예수님이 구도자를 만나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낮추신 것처럼, 교회(음악)도 장벽을 낮추고 그들이 다가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육신’은 정말 그런 것인가?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매력적인 브랜드였나?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예수님께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이는 육신을 입고 나타내셨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영광과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종처럼 섬기셨다는 점에서, 황 대표가 말한 ‘성육신’은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도 구도자들이 볼 수 없는 복음의 본질을 나타내기 위하여, 본질을 변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담고 있는 형태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더 접근이 쉽고 매력적이고 고혹적인 향기가 나도록? 참고로 황 대표는 교회에 ‘향’을 들여와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그는 향수 브랜드를 운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성육신’하신 예수님에게 사람들은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예수님)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고 열광하는 모습으로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를 동경했다(눅 7:25).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예수님이 주실 때만 그분을 찾았고, 예수님이 복음의 본질을 주시려고 할 땐, 그분을 냉정하게 떠났다(요 6:26, 53, 66). 만일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이유가 사람들이 그분께 더 가까이 그리고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면, 그분을 더욱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보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철저히 실패한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싫어하는 수준이 아니라 혐오하고 증오했으니 말이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소리지를 정도로(요 19:15).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에 그 의미와 목적이 있다. 첫 사람이 죄인의 대표였던 것처럼, 마지막 사람으로 죄인을 대속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참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매력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그분의 ‘성육신’을 사용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참 의미와 목적을 간과하고 다만 매력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만 삼는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가지고 있는 고귀한 가치를 이렇게 폄훼하는 것은 심각한 죄다.
그러면 정통은 절대로 바뀔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정통’은 절대적이라서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인가? 목회자는 양복을 입어야 하고, 로고엔 십자가가 들어가야 하고, 새벽 예배와 구역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성경 공부와 장로 등 직분의 구분이 명확해야만 교회가 교회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찬양 가사에는 무조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십자가, 죄,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가사가 들어가야 하는가? 성경이 지금 정통 교회가 고수하고 있는 세부적인 모든 것을 절대로 바꾸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이미 1,500년 이상 고수해 온 ‘전통’을 완전히 개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개혁이 “오직 성경으로” 되돌아가려는 방향과 목적을 취했다는 점에서 타당했다는 것이다. 황 대표가 제안하는 여러 실천적인 사항 중 많은 것들은 충분히 고려할 수 있고 지역교회의 결정에 따라 바꿀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방향성과 목적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려해 볼 필요는 있다. 그는 교회가 복음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하는 교회가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고 설득한다. 그러나, 보이는 현상과 그것에 관한 해석에 매료되기 전,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전통이 오랜 세월 살아남고 보존된 것은 분명히 그 안에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손으로 그것을 바꾸려 한다면, 그만한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한다. 종교 개혁자들에겐 그 이유가 있었다.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전통을 뜯어고쳐야 했다. 우리가 “5無 교회”로 교회를 탈바꿈하려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것인가?
목사와 장로, 집사가 세속 권력자들과 같은 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왜? 성경이 목자장이신 그리스도를 닮은 섬김의 리더십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수직적인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인 구조가(구조라기 보다는 복음의 문화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발견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인도자에게 권위를 주셨지만, 우리는 세속적인 권위를 함께 교회 안으로 많이 들여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 직분이 (아직) 없는 교회’를 황 대표는 주창한 것인가? 아니다. 그가 제안하는 대부분의 개혁은 그 목적과 방향이 소비자에게 맞춰져 있다. 요즘 청년들은 온라인에 익숙하다. 요즘 청년들은 설교보다 끈끈한 정이 더 간절하다. 요즘 청년들은 맛과 향에 민감하다. 요즘 청년들은 성경 공부를 강조하지 않는 교회를 더 편하게 여긴다. 이런 이유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혹 황 대표가 추구하는 방향과 목적이 성경이 오늘날 교회에게 요구하는 변화의 모습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케케묵은 전통을 개혁한 교회가 젊은 세대에게 얼마나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보이겠는가? 하지만, 전통은 트랜드에 따라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전통은 오직 성경의 권위 아래 굴복하고 변화되어야 한다. 결국, 트랜드를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의 가장 큰 문제가 여기에 있다. 교회를 말씀에 따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트랜드에 따라 세우려는 것이다.
교회의 전통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뜻을 따라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지침으로, 결국 전통을 검증하고 변화시키는 유일한 권위로 작용한다. 만일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전통을 개혁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겠지만, 요즘 사람들의 기호와 입맛을 맞추기 위하여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좋게 하려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결론: 목자와 양을 사장과 직원으로 번역하면 어떨까?
성경을 번역할 때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목자”라고 하시고, 그분 안에 속한 신자를 “양”이라고 비유하셨다(요 10장). 한 선교사가 목자도 없고 양도 없는 나라에서 현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을 번역하면서 “목자”를 “사장”으로, “양”을 “직원”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현지인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목자와 양 대신, 그들에게 친숙한 사장과 직원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매우 그럴듯한 말이긴 하지만, 사실 잘못된 판단이다. 예수님이 “목자”와 “양”이라고 말씀하실 때, 당시 청자에게 그 용어들을 통하여 전달하고 싶은 본질적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의미를 오늘날 청중에게 잘 전달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익숙한 용어로 뜯어고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용어를 사용하셨을 당시,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배경과 문화와 시대의 문맥 안에서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전달하고 싶으셨던 본질적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한 마디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앞으로 5無가 아니라 10無가 될수도 있고, 간주가 아니라 반주 전체를 세속 음악과 믹스하려는 시도가 일어날 수 있다. 그래도 트랜드에 뒤처질까 염려하지 말라.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후퇴하는 교회로 남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중요한 건 목적과 방향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방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