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좀비의 모습과 행동이 징그럽고 괴이하기 때문이고, 그들의 공격을 받거나 반대로 퇴치하는 장면이 끔찍하고 잔인해서도 그렇지만, 신체와 정신이 모두 건강했던 사람, 그것도 친밀한 관계를 맺던 이웃 또는 가족이 괴물이 되어 죽일 듯 달려들고, 생존을 위해서라면 결국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설정이 결코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년들과 함께 <좀비딸>을 보게 되었을 때, 솔직히 ‘다른 영화는 없나?’라는 생각을 했다. ‘좀비물에서 무슨 성경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생겼다. 좀비가 된 딸을 정상인처럼 살아가게 하려고 훈련하는 아버지 이야기라는 흥미로운 소재,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재미있는 장면들, 부모의 자식 사랑에 관한 감동 및 교훈 정도를 기대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성경적인 관점으로 영화를 비평해 보자고 얘기했는데, 정작 보고 나서 청년들에게 ‘네 동생이 좀비가 되면 저렇게 살리려고 애쓸 꺼야? 아니면 바로 죽일 거야?’라고 물어보고 끝난 것이 아쉬워, 이렇게 다시 한번 영화를 성경의 시각에서 평가해 보려고 한다.

물론, 좀비라는 소재 자체가 성경적으로 볼 때,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것이 명백하고, 매우 사실적인 영화가 아닌 이상, 영화는 많은 부분 상식을 벗어나는 과장과 비현실적 요소를 담기 마련이다. 그래서 평가 대상을 <좀비딸>이 결국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에 제한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는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좀비가 되어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리려는 아버지의 사랑. 국가 위기 상황으로 감염자들을 낱낱이 색출하고 발견 시 모두 사살할 것을 중요한 정책으로 집행하던 상황에서 아버지와 그의 절친한 친구들, 할머니가 함께 자기의 딸이자 손녀, 절친의 딸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감독은 우리에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설정과 위태로운 환경에서도 가족의 사랑은 아름답고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물론, 감염된 딸이 매우 심각한 상태가 되지 않았다는 점과 옛 기억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에게 희망이 생겼을 것이다. 만일 초반에 등장하는 일반 감염자들과 같은 상태였다면, 살려야겠다는 판단이 서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1. 좀비 바이러스와 죄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멀쩡한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놓는 것처럼, 죄는 사람을 전적으로 망가뜨린다는 것이다. 좀비가 되면 친밀했던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구 공격하는데, 죄도 그렇다. 사랑하는 가족이든, 가까운 이웃이든 상관없이 죄성을 드러낸다. 좀비 바이러스는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고 몸을 뒤틀리게 만드는데, 죄도 사람의 지체 가운데 싸우는 정욕을 만들어 몸을 통제한다(약 4:1). 특별히 하나님께 대하여 죄는 극성을 부린다. 사람은 만물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깃든 창조주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고 알아야 하는데, 죄가 사람의 생각을 허망하게 만들고, 마음을 어둡게 한다(롬 1:20-21). 그래서 죄인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마땅히 하나님께 보여야 할 반응인 찬양과 감사가 아닌 독립과 대체를 추구한다(롬 1:22-23).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자기 지혜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숭배 대상을 찾는 것은 명백한 죄의 결과이다.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을 부정하고 그 관계로부터 뛰쳐나온 죄인은 결국 하나님과 이웃을 위협하고 공격하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이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막 7:21-22). 이 얼마나 추악한 괴물의 모습인가!

그러나 바이러스와 죄는 겉모습이 유사하다고 해서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좀비 바이러스는 감염체의 정신을 지배하여 원래 가지고 있던 이성과 자아를 파괴한다. 그러니까 좀비가 하는 행동은 좀비로 변해버린 괴물이 하는 행동이지 감염된 사람이 생각을 가지고 의지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죄는 좀비 바이러스보다 더욱 교묘하고 치명적이다. 죄는 사람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질을 바꿔버린다. 새로운 인격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죄인은 자기 존재를 상실한 채 죄가 시키는 대로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전인격이 죄를 원하게 된다. 하나님이 사형 선고를 내리신 악한 일을 선하다고 인식하고,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기뻐한다(롬 1:32).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악하고 더러운 일을 하고 싶은 강력한 욕구인 정욕에 따라 살아간다(롬 1:24). 그래서 죄인은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는 피해자가 아니다. 악한 본성을 타고나 의지적으로 죄를 즐거이 저지르는 가해자다. 좀비는 이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감염되지 않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죄인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여 치료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2. 아빠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좀비딸>의 주인공이자 영웅은 바로 아빠다. 딸을 ‘좀비’라고 부르지 않고 ‘수아’라고 부르기를 간절히 원하는 아빠. 괴물이 아니라 자기 딸이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를 본 대부분의 청년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공 수아 정도의 증상을 보인다면,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살릴 것이라는 점에서 동의했다. 이 영화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를 전개한 <닭강정>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최선만은 의문의 사고로 닭강정이 되어버린 딸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자녀를,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이 강조된다. 부모는 자녀를 버리거나 떠날 수 없다.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부른다(요일 2:15).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자녀라서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랑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보다 더 큰 사랑을 쏟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부모보다 훨씬 더 큰 이 사랑의 고백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게도 적용된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좀비딸>의 이야기를 복음으로 각색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녀가 죄로 감염된 것을 슬퍼하여 그/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희생하신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원수가 죄를 행하며 자신을 대적하는 모습을 불쌍히 여겨 그/그녀를 치료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희생하신 것이다. 그냥 보기에 딱해서 순간적으로 올라온 동정심에 충동적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창세 전에 품으신 큰 사랑으로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부모의 내리사랑보다 훨씬 크고 깊은 은혜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내려왔다!

 3. 치료 혈청과 그리스도의 보혈

영화 <좀비딸>의 원작인 웹툰에서는 좀비가 된 수아를 치료한 혈청이 외부로부터 공급되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지만, 아빠로부터 그 혈청을 얻는다. 딸을 훈련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물리고 회복되는 과정을 통하여 건강한 혈청이 아빠 몸속에 생성된 것이다. 아빠의 사랑을 극대화하려고 각색한 것 같다. 딸을 훈련시켜 치료제를 얻을 때까지 어떻게든 기억을 잃지 않고 몸과 정신을 개선하려고 애쓰면서, 아버지는 오히려 딸에게 많이 물리고 고통을 받지만,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딸을 낫게하는 유일한 치료제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바꾸면 훨씬 더 감동적인 이야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 정도 물려도 좀비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라며 감동을 깨려는 이들도 분명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바이러스를 치료하기 위하여 자신이 바이러스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죄로부터 치료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방법과 닮은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 기쁘신 뜻대로 내어주셨다.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셨지만,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조금씩 맛보신 것이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가져가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을 못 박으시고, 죗값을 대신 치르신 것이다. 성경은 죄로부터 치유받은 우리를 가리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자들이라고 부른다(행 20:28). 우리는 이제 죄가 지배하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격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인격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을 가리켜 성경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라고 한다(벧전 1:19). 영화 속 좀비는 살려둘 수 없는 괴물이었고, 그 괴물을 치료하는 방법은 대신 희생한 아버지의 혈청이었던 것처럼, 죄인은 살려둘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여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희생하신 것이다. 성경은 그래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we are healed”, ESV)다고 한다(사 53:5).

결론

좀비 이야기에 억지로 복음을 끼워맞출 생각은 없다. 실제로 <좀비딸>은 허구이고 복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감동받고 눈물을 흘린다. 부모의 사랑을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과 죄송스러운 마음을 갖는다. ‘내 자녀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을 갖고 보는 부모들도 자녀를 향한 뜨겁게 꿈틀대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 울컥한다. 필자는 허구를 보면서 열광하는 모든 관객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받은 사랑을 말해주고 싶다.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역사를 직접 쓰신 하나님이 실제로 행하신 이야기이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당신 이야기다. 당신은 죄에 물린 감염자로 좀비보다 더 끔찍한 죄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당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 그분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당신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깨끗한 자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다. 이 이야기에 열광하라. 이 이야기에 감동받고 눈물을 흘리라. 하나님의 사랑은 깊고 높고 넓고 영원하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다(롬 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