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은 한다(Love does)1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설교자: 최종혁

지난 시간 1-3절을 통해 우리는 사랑의 중요성(우선성, 가치, 필요성)을 살펴 봤다. 성경이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는 사실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어떻게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인데, 그 모든 말씀을 예수님은 이렇게 요약하셨다.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전부였다. 그리고 이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모습인지를 예수님은 가르치고 보여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자체는 새 계명이 아니다.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계명이지만, 이 계명은 유대인들에 의해 오해되었고 따라서 오용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이 계명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가르치셔야 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의 형식을 사용하셔서 사랑하라는 계명의 여러 항목들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셨다. 그 절정에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말씀이었다.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죄로 원수되었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자기 몸을 내어주는 참된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모습이었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습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던 것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이 “사랑하라”는 명령에 모두 들어 있었던 것처럼, 신약의 모든 명령도 “사랑하라”는 하나의 명령에 모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를 말하는 참된 은혜의 복음을 굳게 붙들 것을 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믿음 만이 의미가 있는데, 그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한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해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이렇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5:14–15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물고 먹어서 피차 멸망하는 것 뿐이다. 그것이 죄가 만들어내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러번 강단을 통해서 말했지만, 죄의 근본은 사람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두는 것이다. 각자가 그렇게 하면 서로 물고 먹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죄의 결과를 바울은 육체의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런 목록을 제시했다.

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이 여기서 제시한 목록은 특별히 더 죄악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죄가 만들어내는 결과들이 이런 것들인 것이다. 우린 어디서든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원은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는 죄로부터의 구원이기도 하다. 그 구원의 결과를 바울은 성령의 열매라고 표현하면서 이런 목록을 제시했다.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랑이 최고의 가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가 가져온 결과를 모두 뒤집는 것이 사랑이다.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기 전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 받은 사람의 차이다. 이것이 구원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의 차이다. 다툼, 경쟁, 분열, 싸움, 시기, 분노가 우리의 특징이 될 수 없다. 사랑이 특징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의 믿음도 아무 것도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아무 것도 아닌 분으로 세상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이 모든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 당연한 성경의 진리를 고린도 성도들이 몰랐을까?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그 중요성을 처음부터 가르쳐야 했을까? 그럴리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 “새 계명”을 분명히 가르치셨고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다. 제자들 중 누구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몰랐거나 가볍게 듣지 않았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구원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했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요일 4:7–1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그렇듯 고린도 성도들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였다. 그들은 지식에 부족함이 없었다.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서 들었고 그들 스스로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삶을 보지 못했다. 그런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과장에 상상을 더해 말했던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이기에 모든 것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사람의 방언이 아니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을 알고 예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가진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심지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이것은 그대로 오늘날 유평 교회에도 적용된다. 아마 지금까지 한 얘기들이 새롭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다 알고 익숙한 얘기를 굳이 왜 또 저렇게 하고 있나 싶을 수도 있다.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게 살고 있는가. 사랑에 대해서 듣고 말할 수도 있을만큼 잘 알고 있는데, 그런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가진 재능을 활용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음악적 재능, 요리하는 재능, 만들고 고치는 재능 등을 통해 일할 수 있다. 가진 재물을 통해, 가진 시간을 통해, 가진 건강을 통해, 가진 에너지를 통해 섬길 수도 있다. 누구를 가르칠 수도 있고, 누구를 책망할 수도 있고, 누구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도 있다. 다 귀한 일들이고 교회 안에서 꼭 필요한 섬김이다. 문제는 그 모든 일들을 우리도 사랑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된다. 아무 의미도 없고 유익도 없는 것들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경고를 받아야할 중요한 사실이었다.

1-3절에서 관찰할 수 있는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모든 것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때, 바울은 그 행위보다는 사람 자체를 더 강조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분명한 뉘앙스는 “그런 일은 아무 의미가 없어”가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나는 아무 의미가 없다”다. 내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고린도 성도들이 은사 자체에 집중했었던 이유는 결국 그렇게 해서 자신을 더 드러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인정 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실제로는 그 일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심지어 그 사람 자신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할 때, 그 일들이 의미가 있고 나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고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원리다(마 10:39). 우리가 나의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할 수 있는 것과도 같은 원리다. 또한 스스로 높이면 낮아지지만, 스스로 낮추면 높아지는 것과도 같은 원리다. 성경의 역설, 하늘나라의 역설이다. 사랑의 역설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정말로 가장 좋은 길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렇게 중요한 사랑은 무엇인가? 어떤 모습일까?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서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사랑의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기 전에 이 말씀 전체에서 알아야할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겠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사랑을 정의하고 있지 않다. 즉,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고 사랑은 무엇을 혹은 어떻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개념 정리가 아니라 사랑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말씀 제목이 “사랑은 이다”가 아니라 “한다”다. 영어 성경을 보면 “Love is”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그것은 언어적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이고, 헬라어를 살펴보면 총 15개의 동사를 통해 사랑이 무엇을 하는지를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사랑은 한다(Love does)”라고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사랑의 개념이 아니라 실제성을 더욱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고린도 성도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희생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3절).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특별히 고린도 교회가 보이고 있지 않은 사랑의 모습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랑에 대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게 꼭 필요한 사랑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이 편지가 고린도 교회에서 읽힐 때, 정말 많은 성도들의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어떤 성도들은 ‘이건 저 사람 얘기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구원 받은 자들이라면 바울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 앞에 거울을 비추고 있다. 정확히 그들의 모습을 반대로 비춰주는 거울이다. 4-7절 말씀을 다 반대로 바꾸고 주어를 고린도 교회로 바꾸면(‘너희’),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고린도 교회 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당히 오늘 말씀에서 “사랑”을 “나”로 바꿔서 읽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와 나는 좀 다르긴 하겠지만, 여전히 이 말씀은 나에게도 거울이 된다.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게 하셨던 이 일은 2000여년 동안 이 말씀을 읽는 모든 교회에게 반복되었고,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나를 생각하자. 나를 비춰보자.

또 하나, 여기서 동사만 사용되었다는 점이 암시하는 것이 있다. 사실 ‘사랑’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사랑은 정의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바울은 동사를 사용해서 사랑을 의인화했고, 그것을 통해 사랑은 그저 이론이나 개념이 아니라 무엇을 하는 실체임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글을 통해 사랑이 의인화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이 인간이 되었던 적이 있다. 바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 예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한다(요일 4:8).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사랑의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실제로 사랑이 어떻게 하는지를 볼 수 있다. 앞서서 “사랑” 대신에 “나”를 넣고 부끄럽지 않게 이 말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오직 한 사람, 예수님은 가능하다. 이 말씀을 “예수님은”으로 읽어 보라.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예수님의 삶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된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으로 행한다는 말은 결국 그런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두 가지를 다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나는 이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얼마나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이든 여전히 더 닮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이 있다. 우리는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대로 내가 부끄러울만큼 사랑으로 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나에게는 사랑이신 예수님이 계시다. 난 구제불능이고 난 원래 이런 사람이어서 절대로 나아질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이럴 때 적용하는 것이다. 모든 것인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어느날 완벽해진 내 모습만 상상하고 있지 말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어제보다 오늘 조금이라도 더 주님을 닮아간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 삶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을 돌아 볼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본을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럼 어떻게 그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먼저 살펴볼 사랑의 모습은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다. 이 둘은 긍정형으로 표현되어서 사랑이 무엇을 하는지를 묘사한다면, 그 뒤에 이어지는 다수의 동사는 부정형으로 되어있어서 사랑이 무엇을 하지 않는지를 묘사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묘사에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우리의 문제이기도 함)가 그 바탕에 있다. 아마도 바울은 오래 참는 것과 온유한 것을 사랑의 핵심이 되는 모습으로 두고, 그에 반하는 구체적인 모습들은 고린도 교회에서 찾아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들을 책망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오래 참는 것과 온유한 것은 공통적으로 악한 일(사람)을 당한 것을 전제로 한다. 특히 그렇게 나에게 악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대해야하느냐를 말한다. 오래 참는 것은 수동적인 반응이고 온유한 것은 능동적인 반응이다.

우리말의 “오래 참고”는 좋은 번역이다. 말 그대로 사랑은 오래 참는다.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다.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해를 당할 때 그것을 갚아줄 생각부터 하지 않는다. 그 상황을 견뎌 내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에게 그렇게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아주는 것이다. 때로는 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어던 송사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런 말을 했다.

고전 6: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교회 안에서 발생한 문제가 다툼이 되고 결국 세상의 법정까지 그 문제를 가지고 가서 서로를 고발하며 비방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때 바울은 그렇게 교회를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에 해를 가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 안의 문제는 무조건 교회 안에서만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법적인 다툼을 해야할 때도 있다. 다만, 교회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해서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성도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때로는 내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감당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결과적으로 내가 옳음을 증명한다 해도 누구에게도(나에게도 다른 성도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좋은게 좋은거지’하면서 모든 문제를 다 그냥 넘기라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 성도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그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에 따라 반응하지 말라는 것이다. 먼저 그것을 지적하거나 정죄하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갚아줄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음”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래 참음이 사랑인 이유는 분명하다. 사랑이 없는 나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나에 대한 공격(공격으로 여기지는 것)에 나는 어떻게든 방어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서 맞대응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 나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갈등을 생각해 보자. 어떤 회의를 함께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하면 어떤가? 최소한 듣고 생각해보기라도 해야하는데,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느냐는 식으로 깔아 뭉개면 어떤가? 내 말에 반대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이럴 때 사랑으로 반응하지 못할 수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그 자리에서 화를 내면서 그 사람과 다투는 것으로 반응할 수 있다. 내 의견이 맞다고 할 때까지 계속해서 밀어 붙이는 식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

많은 경우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 일부러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낼 수도 있다. ‘두고 보자’고 마음 먹고 있다가 똑같이 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있고, 오히려 반대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 사람이 하자는대로 하는 것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의견을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아서 그 사람이 미안하게 만든다.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순간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 너 때문에 내가 기분이 상했고 그것을 표현할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여러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랑 없는 행동이다.

그럴 때 사랑은 오래 참는다. 때로는 속에서 끌어오르는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 만으로도 사랑의 모습이 될 수 있다. 되받아치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의 의도는 나를 무시하려던 것이 아니고 단지 내 의견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음을 알 필요도 있다. 어차피 의견을 나누는 자리니까 굳이 내 생각이 꼭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상대의 의견에 대해서 더 생각해볼 수도 있다.

때로는 상대가 맞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괴로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내가 억울하지만 그래도 참아준다는 마음도 가질 수가 없다. 결국 나 자신(옛 자아)과의 싸움이 된다. 그 때 오래 참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사랑이다.

여기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면 그것이 “온유함”이다. 온유함은 그냥 참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 성경이나 다른 한글 번역도 “친절함”(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앞과 같은 상황이라면 비록 무시 당했다는 감정이 있더라도 그 사람의 의견을 인정해주고 받아주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뺨을 맞고 한 대 때려주지 않을 뿐 아니라(오래 참음)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온유)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을 위선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때로 온유함은 상대의 죄나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자기 감정에 따라서 상대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그 죄를 책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잘 돌아봐야 한다. 정말 미묘한 우리 마음을 잘 들여다 보아야 한다. 때로 우리는 나의 억울함을 풀고 싶은 마음을 이런 사랑으로 포장하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오래 참고 싶지 않은 것이면서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죄를 지적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온유함이 아니다.

여기까지 사랑에 대한 묘사를 보면 사랑의 행위보다는 뭔가 기계적인 행위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냥 내 감정에 상관없이 이를 악 물고 참으면서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더 그렇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3절에서 분명히 말했다. 단지 무엇을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아무리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되갚아주지 않고 도리어 선하게 행한다고 해도 그렇다. 차갑고 냉혹하게 그런 일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모습이 아니다. 이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이해하거나 용납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그냥 내 할 일은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래 참지 않고 온유하지 않는 또 다른 모습이 된다. 그렇게 자신의 억울함이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그 상황에 대해서는 오래 참고 온유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사랑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아주고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도 오래참음과 온유함으로 드러났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지금 살아있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모두가 멸망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유함을 나타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멸망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구원도 받지 못했을 수 있다. 혹 구원은 받았는데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은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셨고 우리에게 온유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그 사랑의 결과다.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딤전 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그 진노를 오래 참으셨다. 그 뿐 아니라 우리에게 선을 행하셨기 때문에(자비)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한다. 내가 너 심판은 안할게가 아니라, 나를 희생해서라도 너를 구원하고 너를 얻을거야라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럴 때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인 이유는 십자가가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어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으시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했으니까 난 너희를 사랑한거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을 받으셨지만 그대로 갚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게 오래 참음과 온유함으로 증명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본으로 삼아야할 사랑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순교자 스데반은 그렇게 했다. 얼마나 억울한 죽음인가. 사람들의 잘못된 송사에 대해 그는 최대한 논리적으로 반박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다. 돌아 맞아 죽어 가면서 스데반은 어떻게 기도했는가. 난 여기서 참긴하겠지만, 하나님, 이 원통함을 풀어주소서라고 하지 않았다. 저들을 지옥으로 보내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이것이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모습이었다.

아마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을 경험할 일이 우리에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사랑을 보여야할 일은 많다. 앞서 예를 든 것 같은 그런 흔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오래참고 온유한 사랑을 보여야 한다. 쓸데 없는 감정 싸움을 버리고, 사랑이 우리의 관계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어야할 일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을 꺾어야할 일은 많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성도의 유익을 위해, 성도를 사랑함으로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교회로서 함께 지어져가고 기능할 수 있다.

도움

나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구원 받은 자는 죄에서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관성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지만, 죄가 여전히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 여전히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의 유익을 우선시 하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우리의 죄성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눈물과 기도가 있어야 한다. 좌절도 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또한 온유한 것이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세 가지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말씀을 줄이겠다.

첫째로 내가 죄인임을 기억하고 겸손하라. 어떤 면에서 우리는 나 자신을 여전히 너무 가치있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한 잘못을 잘 참지 못한다. 내가 쉽게 억울해 하고 분한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고 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겸손한 마음은 해 받는 것에 분개하여 정신을 못차리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작고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받은 해를 크게 여기는 사람처럼 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소한[아주 작은] 자기가 남에게 받은 해보다, 자기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더 크고 악하다 생각합니다. 반면에 교만과 자기기만은 깊고 비통한 원망과 용서할 줄 모르고 복수심에 불타는 심령의 초석이 됩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나도 죄인임을, 나도 연약함이 있고 부족함이 있음을 인정하고 먼저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오래 참음의 시작이고 열쇠다.

둘째로 그 사람이 죄인임을 기억하고 불쌍히 여기라. 우리는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원수’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그저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해를 끼친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내가 결혼한 사람만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도 나처럼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처럼 죄인이어서 그렇다. 우리 교회의 누구만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나와 부딪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물론 죄인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불쌍히 여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오래 참음과 온유함으로 서로를 대해야 한다. 서로의 부족함(연약함)을 견뎌줄 뿐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서로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악을 행하기가 더 쉽다. 그것이 본능적인 반응이고 그것을 이기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선을 행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악을 행하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한다. 서로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먼저 오래참고 온유함을 나타낸다면 선순환이 시작되어 이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을 인정하고 맡기라.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심지어 내가 생각하기에 나에게 가장 해로운 일이라고 해도 그렇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 때도 그치지 않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누군가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할 때, 그것이 나에게 너무 큰 어려움이 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최후까지 놓지 말아야할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그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이다. 나를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절대 내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나를 보여주는 것이 죄라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과 온유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나타내야할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