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의 이유
본문 : 빌립보서 1:12-18
설교자 : 최 종 혁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인터넷 서점에서 ‘빌립보서’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보니 이런 제목들이 많았습니다. ‘기쁨의 삶’, ‘그리스도인의 기쁨’, ‘예수 우리의 기쁨’, ‘기쁨을 클릭하라’ 등. 그 제목들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기쁨’이 빌립보서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매 장마다 기쁨에 대해 언급합니다(1:4, 18; 2:17; 3:1; 4:4).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기뻐하라”는 명령을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드는 의문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입니다. 어떨 때는 기쁘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불평이 나고 슬픔에 빠지기도 하는 우리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상황을 빌립보 성도에게 알려주는 내용인데, 그것을 가만히 보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그 이유에 대해서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의 이유’, 또는 ‘환경과 관계없는 기쁨의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상황을 말하고 있고(12절), 다음으로는 그 상황이 가져온 결과를 말하고 있으며(13-17절), 마지막으로 그 상황에 사도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18절)를 보여줍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2절).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 시작부터 구원받은 성도들이 복음의 사역에 함께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5절). 빌립보 교회는 복음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던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고 사람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갇히게 된 소식을 들었고 그를 돕기 위해 에바브로디도를 보냈습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했던 시대가 아니므로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감사와 기도에 대해 말하고, 이제 12절에 와서야 자신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가만히 보면 ‘자신의 소식’이라기보다 자신이 전하던 ‘복음에 대한 소식’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내가 당한 일”이라고 말하고, “나의 매임”이라고 말합니다(13,14,17절). 우리가 잘 알듯이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쓴 편지입니다. 그의 “매였다”는 말은 투옥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과정은 사도행전 21-28장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지만(롬 1:10), 그리고 로마를 거쳐서 서바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참 다른 모습으로 로마에 있습니다. 로마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것을 생각했겠지만, 지금 그는 감옥에 매인 상황입니다. 그곳 로마까지 가게 되는 과정도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이 그를 악의적으로 비방했고 재판관들은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파산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로마에 도착해서는 2년 이상 구류되어 재판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가 복음을 신실하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는 참 억울하고 분한 상황입니다. 이런 일을 당했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의외로)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2절). 지금 사도 바울이 당한 일은 결국 복음의 진전을 가져왔습니다.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던 사람이 감옥에 매이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전하던 복음 역시 그곳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복음이 더욱더 진전되었던 것입니다. ‘진전되었다’는 말은 군인들이 사용하던 말로, 이동할 때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이 장애물을 거둬내고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생각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합니다.
복음의 진전은, 첫째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둘째는 사도 바울 주변의 성도들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13절). 복음은 사도 바울을 통해 진전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에 있든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슬에 매여있을 때 그는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 때문에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감옥에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모든 시위대”는 왕을 경호하는 군사들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로서 24시간 매여 있어야 했는데 당시 사도 바울은 기둥에 매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병사에게 매여 있었습니다. 6시간 교대로 하루 4명의 군사를 만났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 군사들에게 매임과 동시에 군사들이 사도 바울에게 매여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한 사람에게 매여 있다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그 밖에 모든 사람에게” 그러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심문받는 과정을 보면, 죄수는 높은 사람에게 가서 자신의 일을 변호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그곳에 가서 사도 바울을 주목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왜 이곳까지 와서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고 있을까 알아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때마다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한 것 때문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빌 4:22)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가이사의 집에서 몇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매였기에 결과적으로 그가 접근할 수 없었던 군인들과 고위직 관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14절). “형제 중 다수”가 사도 바울의 매임으로 인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매임 때문에 주님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갖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는 것이 복음을 전하다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사도 바울의 용기, 인내, 확신을 보면서 그런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복음에 힘써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많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다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다른 동기, 선한 동기와 악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선한 동기에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 나쁜 마음을 품지 않았고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16)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성도가 감옥에 갔다고 하면 일단 죄를 지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더욱 그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삶을 바꾸고 입을 열어서 복음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한 뜻이 아닌 나쁜 동기로 복음을 전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15절). 사도 바울을 향한 투기와 분쟁, 즉 시기와 경쟁심으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것입니다(17,18절). 이 사람들은 나쁜 동기에서 전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잘못된 것이 없었습니다. 만일 복음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면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내용에 얼마나 철저하고 민감했는지는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가진 동기였습니다. 그들은 착한 뜻이 아니라, 시기와 경쟁심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영향력이 이들에게는 시기심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의 탁월한 은사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의 동기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시기와 경쟁심을 겉으로 분명히 드러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다’, 혹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시고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다’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들의 목적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17)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면 사도 바울이 괴로워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그들의 비난이나 잘못된 동기는 실제로 사도 바울을 정말 괴롭게 했을지 모릅니다. 그는 일생을 복음 전하는 일에 투자했던 사람인데 그와 같은 비난을 듣는 것은 참 괴로움이 될 법한 일입니다. 그는 외적으로 감옥에 갇혀있고 내적으로 같은 성도의 핍박을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나쁜 동기로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전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메시지 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쁜 의도가 있다면 그는 결국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을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18절은 “그러면 무엇이냐”로 시작합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사랑해서 좋은 뜻으로 복음을 전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시기해서 나쁜 뜻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나를 위해 좋은 뜻으로 전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을 통해 위로받고 참고 견뎌야겠다’, 또는 ‘나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 때문에 나는 화가 나고 원망스럽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두 가지 모두가 아닙니다. ‘참고 넘어가자’나 ‘아니 더 이상 못 참겠다’가 아닙니다. 이 상황은 사도 바울의 기쁨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절). 사도 바울의 기쁨에 영향을 준 것은 그가 처해 있는 상황, 사람들의 공격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쁨에 영향을 준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나눠져 있지 않았습니다. 복음에 대해 단 하나의 마음,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진 것들에 그리스도를 더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과 중요하다고 여긴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가 가진 어떤 야망이 있고 거기에 더해서 그리스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쁨과 관련된 것도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상황은 ‘사도 바울이 힘들겠구나’,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기도 하고 괴롭히니 어렵겠다’이지만, 사도 바울이 보는 상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쁨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느냐, 높임을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상황에 관계없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궁극적인 기쁨의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기쁨의 이유가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있다면, 우리의 기쁨이 환경에 좌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수많은 기쁨의 이유들에 그리스도의 기쁨을 하나 더한 사람이 아닙니다. 수많은 기쁨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선택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금욕적인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기쁨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궁극적인 기쁨의 이유가 그리스도에게 있기에 성도가 겸손히 서로 용납하며 그리스도를 높임으로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당시 교회도 다양한 목적과 서로 다른 생각들로 어려움을 겪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전한다면 그것으로 용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감정도 다릅니다. 성도 중에 어떤 사람은 나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행동이 계속 눈에 거슬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눈이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는 안 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기쁨의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실 때 기뻐하고 그 이름이 전파되지 못할 때 슬퍼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버려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의 여러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이유가 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