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형제 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본문: 고린도전서 6장 1-11절
설교자: 조정의
예전에 어떤 사람이 말해주기를, 미국은 소송의 나라라고 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법정으로 끌고 가서 재판하려고 한다고. 감사하게도 미국에 6년 있는 동안 실제로 경험한 적은 없다. 그런데 한인교회 장로 한 사람이 말해주기를 LA에 있는 한인교회 중에서 소송 중인 교회가 아닌 곳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땐 ‘교회가 서로 소송할 일이 뭐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교회 안에서 일어난 소송 문제로 주변이 떠들썩한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경찰 출동, 출입문 봉쇄, 맞고소).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헬라 도시도 소송이 매우 흔한 곳이었다. 헬라인은 법정에 가는 것을 즐겼고, 시민 대다수가 소송 당사자, 중재자, 배심원 등의 법적 절차에 참여했다. ‘베마’라고 불리는 시장 탁 트인 곳에 있는 법정에서 판사들은 날마다 판결을 내렸고, 많은 시민은 이를 지켜보고 참견하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이 법정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섰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부끄럽게 여겨 교회를 책망하는 편지를 썼다. 왜 이 일은 부끄러운 일일까?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문제가 복음과 어떻게 연결된 문제인지 분명히 알기 원한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와 권력으로 다스려지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의 지혜와 능력이 다스리는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1. 문제: 형제간의 일을 세상이 판단하게 함(1절)
문제는 고린도 교회 성도 간에 일어났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형제간의 일”(1, 5절). 바울은 이미 고린도 성도 간 벌어진 시기와 분쟁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뤘다(1-4장). 그런데 이번엔 다툼이 극단으로 치달은 문제였다. 그들은 결국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까지 했다(“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 “피차 고발”, 6, 7절). 1절은 “감히~하다”(톨마, “구태여”)로 시작하는데 이를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의 법정 다툼은 끝난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었다. 둘째, 바울은 이를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5절). 그는 특별히 교회가 성도 앞에서 문제를 다루지 않고 불의한 자들(믿지 아니하는 자들, 6절) 앞에서 다룬 것을 심각하게 여겼다.
혹자는 바울이 불의한 세상 법정을 불신해서 이를 문제 삼았다고 본다. 실제로 당시엔 “정의를 곡해하는 법률가들이 셀 수 없을 정도”라는 말(크리소스토모스), “법정은, 그가 돈만 있으면 아무리 죄가 있어도 그에게 결코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키케로), “우리의 모든 재판관이 오늘날 돈을 위해 그들의 재판을 팔아먹는다”라는 말이 있었다(아풀레이우스). 바울 자신도 베스도가 돈을 바라며 자주 그를 불러낸 경험이 있다(행 24:26). 하지만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다(롬 13:1). 세상에 세우신 권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선량한 시민에게는 선을 베풀고, 악을 행한 범죄자에게는 칼의 심판을 내린다고 했다(13:4). 바울은 국가에 세우신 권세와 사법 제도를 인정했고 또 순응했다. 때로 복음을 위하여 이용하기도 했다(상소, 행 25:12).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형제간의 다툼은 형사 사건이 아니라 민사 사건이었다. 형사 사건은 범죄 사실이 드러났을 때, 고발 여부와 상관없이 재판이 이루어지고, 민사 사건은 서로 다툼이 해결되지 않을 때, 고발을 통해 법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문제다. 8절에서 바울이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라고 책망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과 인맥을 동원하여 다른 성도를 법적으로 갈취하고 부당한 이익을 얻거나 불합리한 처벌을 받게 하려고 서로를 고발한 것이 분명하다.
2. 처방: 형제간의 일을 복음이 판단해야 함
바울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성도가 서로 세상 법정에 고발한 것이 복음 안에서 크게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① 복음이 약속한 성도의 신분(2-3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2절),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3절). 바울은 그들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을 상기시킨다(“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것은 복음이 약속한 성도의 신분이다(종말). 성도는 한때 불의한 자였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복음, 11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얻었다. 장차 세상과 천사를 다스릴 신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기는 교회에게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고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계 3:21; 2:26). 보이는 모든 만물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 모두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보좌에 앉아 다스리게 될 자가 바로 성도다. 그렇게 큰 일을 판단할 사람들이 이렇게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영적인 존재까지 다스릴 사람들이 겨우 세상일 하나도 어찌할 줄 모르는 게 말이 되느냐고 책망한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지 몰라 이장에게 묻는 셈이고, 한 나라의 최고 법관이 재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재판 놀이 하는 아이들에게 조문을 구한 셈이다.
② 복음의 지혜로 충만한 성도(4-5절)
‘그건 내세에 일어날 일이고, 이생에서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변호하는 성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바울은 곧바로 “세상 사건이 있을 때”(“matters of this life”) 역시 복음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응수했다: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4절). 때로 복잡하고 다양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법적 지혜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소송까지 간 고린도 교회 성도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법적 지혜가 아니라 영적 지혜였다. 새번역 성경은 “일상의 일과 관련해서 송사가 있을 경우에”라고 번역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송사 문제가 일상의 일과 관련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영적인 지혜를 “교회에서 가장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 곧 세상 사람에게 구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 사람을 멸시하지 않는다(VIP). 하지만 복음의 지혜가 충만한 상태로 분류할 때, 그들은 확실히 가장 부족하다.
고린도 교회는 서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자랑하느라 분쟁까지 일으킨 상태였고, 바울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경고했었다(4:19-20). 그들의 소송은 복음의 지혜가 오직 말뿐이고 그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 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5절). 서로 고발하며 앙갚음하고 이득을 보려는 이기적인 성도를 복음의 은혜와 용서, 사랑과 자비를 가르쳐 그들의 삶에 회개와 화평을 이루어낼 지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 고린도 교회의 현주소였다. 참으로 지혜를 자랑했던 교회의 부끄러운 면모다.
③ 복음의 법으로 판결한 결과(6-7절)
그렇다면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한 일은 복음의 관점에서 어떤 판결을 받을까? 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밝힌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여기서 ‘허물’로 번역된 단어는 법적 용어로 ‘패소’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성도가 서로 고발한 것 자체로 이미 확실한 패소 판정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확신했다(누가 승소하든 상관없이 둘 다). 그들은 교회 가운데 일어난 일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다뤘는데(6절), 바울은 그럴 바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책망하며 물었다. 왜 둘 다 패소인가?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나은가? 복음의 법으로 판결하면 그렇다.
복음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다. 그리고 복음의 법은 성도가 서로를 복음에 합당하게 대하도록 요구한다. 성경에 기록된 최고의 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이고(약 2:8), “그리스도의 법”은 “짐을 서로 지”는 것이며(갈 6:2),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주신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다(요 13:34). 그런데 복음으로 하나 된 성도가 서로 짐을 지우고 미워하며 악을 더 큰 악으로 갚으려고 고발하는 모습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보이면 복음은 어떻게 되겠는가? 복음을 주신 하나님과 이루신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전파되겠는가? 서로 어떻게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고, 어찌 됐든 상대방을 속이려고 법정 투쟁을 하는 동안 왜 복음이 파괴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가운데 모욕받는 것을 간과하는가?
플루타르크는 “서로를 고소하는 형제자매들은 마귀 적”이라고 했다(베이커, 290p). 아무리 승소해도, 이를 위해 기도하고 승소한 것에 관하여 주님께 감사한다 해도, 성도 간의 송사는 복음을 세상 가운데 크게 부끄럽게 만드는 마귀적인 일임이 틀림없다.
④ 복음에 합당한 성도의 간증(8-11절)
성도 간에 서로 고발하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바울은 그들이 불의를 행했다고 지적했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8절). 형제를 속이고, 자매에게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은 명백히 불의한 일이다. 바울은 처음부터 성도와 불의한 자(1절), 성도와 세상(2절), 형제와 믿지 아니하는 자(6절)를 대조하며 거룩하게 구별된 교회의 정체성을 확실히 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가 하는 일은 교회가 아니라 불의한 자, 세상 사람, 믿지 아니하는 자가 할법한 일이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리에 앉지만,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9절).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알지 못하느냐(9절). 알고 있었지만 성도로서 불의한 자가 할법한 일을 한 것이다. 바울은 “미혹을 받지 말라”라고 명령했다(9절). 이런 일을 하고도 성도일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당시 일어난 고발 문제는 10절에 나오는 탐욕을 부리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들에 해당될 것이다. 바울은 여기 더해서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남색하는 자(모든 종류의 성 역리 죄), 도적, 술 취하는 자도 불의한 자라고 가르쳤다(9-10절).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여기서 묘사된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인과 결코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과거에 이런 불의한 삶의 방식을 추구했을 수도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일부도 그랬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11절).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신분과 상태를 얻었다. 그들은 씻음(거듭남) 받고 거룩함을(새롭게 된 상태) 입었다(딛 3:5). 그들은 하나님의 최종 법정에서 “의롭다”고 판결받았다.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거룩한 자녀로 의롭게 살도록 하셨다. 과거에 추구했던 세상 방식과 욕구대로 행동하는 것은 복음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는 퇴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바쳐 이루신 복음의 지혜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는 복음의 능력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고린도 교회 소송 문제의 본질은 복음을 아는 성도가 복음의 지혜와 능력이 아닌 세상의 지혜와 능력을 좇았다는 것이다.
3. 적용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먼저, 성도 간에 불의한 소송 중이라면 당장 그 마귀적인 악행을 멈추는 것이다. 복음이 요구하는 회개와 용서와 화평을 추구하라.
우리에게 광범위하게 또한 실제적으로 적용될 사항은 다음과 같다: 복음은 당신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통제하는 확실한 능력으로 작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데 능숙하다. 다 안다고 생각하고, 충분히 맛보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바울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할 때,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간구했다(엡 1:18, 1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신 능력이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능력)를 받으셨다(마 28:18). 그리고 교회는 그분을 머리 삼아 그 능력을 구할 때마다 공급받는다(골 2:19).
그러니 구하라. 성경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말한다(약 4:2).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아무리 구해도 받지 못한다(약 4:3). 그러나 복음을 더 깊이 알고 그 능력을 더 많이 얻기 위하는 간구는 주님께서 언제나 들어주실 것이다. 복음은 성도가 불의한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