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본문 : 에베소서 1장 3-14절

설교자 : 최종혁

엡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번 들었는데 기억에 오래 남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인데, ‘뭐가 되었든지 양이 많아지면 상대적으로 가치는 없어진다’입니다. 우리는 공기가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에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아파서 숨을 못 쉬게 되었을 때 그것의 소중함을 압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이 참 귀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구원에 대해 자주 말하다보니 너무 익숙해지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잊고 지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에베소서 말씀에 대해 ‘가난뱅이처럼 사는 부자들에게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진, 정말 큰 복을 가진 성도들이 마치 그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일깨워주고자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우리가 받은 복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길 원합니다.

 

이 말씀은 한 문장으로 된 아주 긴 말씀이기에 좀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헬라어 문장 중에 가장 긴 문장이라고 합니다. 본문 말씀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일반적인 사실(3절)과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4-14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이 말은 찬송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햇빛과 비 등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주시는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주신 복을 말합니다. 믿는 자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누구나 다 이 복을 받습니다. 누구는 적게 받거나 누구는 많이 받거나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는 자라면 동일한 복을 받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그것은 ‘신령한 것’입니다. 이 복은 물질적인 복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물질적인 것들을 약속하시는데 땅과 같은 재물, 오래 사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런 물질적인 것이 강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에 대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것에 우선순위를 두면 그 외의 것은 채워주시리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는 복은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복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해 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물질적인 복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 오는 신령한 복입니다.

 

또한 이 복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이 ‘하늘’이 장소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야만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이런 복을 모두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이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은 무엇일까요? 이 복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주어졌을까요? 그리고 이 복이 우리에게 왜 주어졌을까요? 이제는 이 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

 

그 복은 첫째,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 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4-5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거룩하지 않고 스스로 거룩하게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이 단어는 인간과 거리가 멉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어떤 사람이든지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의롭다’, ‘거룩하다’, ‘죄 없다’, ‘흠 없다’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왜 우리에게 복이 될까요? 우리가 거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3에서는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표현하고, 로마서 1:18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는 날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아들들이 되게 하심

 

우리가 받은 복은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 된 복입니다. 5절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복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1-12).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없었던 사람, 하나님의 백성과 관계가 없었던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입니다. 우리의 상태에 대해 성경은 우리가 “연약할 때”라고 말하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라고 말하며,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라고 말합니다(롬 5).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아들들”이라는 말은 입양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를 번역할 때 입양에 대한 문화나 어감 때문에 아마도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입양’이라는 것에는 어떤 부정적 의미도 없습니다. 로마 문화에서 입양된 아들은 친자와 동일한 권리를 가지게 되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입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를 우리에게 그대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예수님께서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2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말했던 바울은 다시 3절에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도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복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거나 큰 권력을 가졌다면 그것 때문에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분, 만물을 다스리시고 소유하시는 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었고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속량, 곧 죄사함을 얻게 하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7절). “속량” 혹은 ‘구속’이라는 단어는 돈을 주고 사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노예시장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했는데, 돈을 사용해서 주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매였거나 누구의 종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7). 이것은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원래 죄의 종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유하다고 생각했던 것 뿐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알지 못했고 자유를 찾지도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죄의 종으로서 그 죄의 대가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것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죄의 종이었던 자들을 예수님이 피로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죄라는 주인에게 세뇌당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시려고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고 죄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이것은 법적인 것이고 신분적인 변화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죄의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속량’,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입니다.

 

 

비밀을 알게 하심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8-9절). 하나님의 계획은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를 알려주시는 복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은 눈을 여셔서 구원자 예수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끝날 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0)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일시적으로 사단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이 땅의 권세 잡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우주의 진정한 주인이 전면에 나서서 우주를 다스리실 그날이 옵니다. 누군가는 그 주인과 함께 다스릴 것이고 누군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획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를 아는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기업을 받게 하심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절). 여기서 “기업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업을 받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에 대해 말씀하고 우리가 받은 기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기업을 받았다는 의미가 더 맞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상속자,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참된 기쁨과 만족, 하나님과의 교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오해 없는 교제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오해와 갈등, 다툼이 있는 것은 우리가 모두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날’이 오면 어떤 오해도 없이 기쁨으로 교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간에 진정한 사랑을 나눌 그날이 올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우리가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가 넘치고, 진정한 예배를 드릴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기업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전혀 맛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면 누릴 수 있습니다.

 

 

기업이 보증을 받게 하심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성령은)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3-14절). “보증”은 ‘보증금’이나 ‘약혼반지’라는 뜻입니다. 다가올 실체에 대해 그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증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비싼 물건을 살 때 보증금이라는 것을 냅니다. 반드시 그 물건을 살 것이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약혼반지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결혼을 할 것이라는 증표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령은 놀라운 기업의 일부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가 받은 복들은 우리가 구원받게 됨으로 얻는 유익들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극적으로 변하고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작은 것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보다 하찮은 것처럼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복은 어떻게 주어졌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런 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모든 행동과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을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하신 일은 구원을 계획하신 일입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5),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9),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11).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많은 것들 중에서 일부를 골라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트에서 살 물건을 고를 때 선택의 주도권은 그것을 ‘원하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주권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창세전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입니다. 창세기 1장 1절 이전의 상황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던 때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했을 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아니 생각하기도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다윗은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주권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이 세상이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계획을 세우셨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7절). 아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를 속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실행하신 분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4-17). 우리는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필요했는데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죽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해방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피를 ‘보혈’이라고 부릅니다. 값진 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 인간과 같은 피였지만 그 피가 아주 귀하신 분, 높으신 분, 무한하신 분의 피였기에 그것은 ‘보혈’이 되는 것입니다. 그 피는 ‘위대한 교환’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드렸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위대한 교환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13절).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인치십니다. 문서에 인을 찍는 것은 소유권, 신빙성, 안정성을 의미합니다. 인을 통해 그 문서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고, 그 문서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이 제대로 찍혀있다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 인을 찍은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거나 허가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뜯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치심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놀라운 확신과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이 복은 왜 주어졌는가

삼위의 하나님께서 각자의 일을 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복들이 주어졌을까요? 하나님은 왜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을까요? 왜 우리를 선택하셨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5),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9),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11). 우리 편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도 그들이 크거나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이유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우리를 어떤 목적으로 구원하셨을까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려고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도 해야 할 일이고 죽어서도 할 일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각자의 삶에서 예배를 드리고 함께 모여서 공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합당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교제하면서 서로를 세워주며 예배합니다. 더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전도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우리가 누리게 된 복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매일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엇이 진짜인지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진짜인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원이 진짜인지 아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영원에 비춰 이 땅의 삶을 바라봐야 합니다. 영원을 바라보지 않으면 교회는 그저 ‘이것 해라’ ‘저것 해라’ 하는 식의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이 어떤 자인지 눈을 열어서 구원의 복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선택하셨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성령님이 어떻게 구원을 인치셨는지 아시고, 이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선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보이는 것에 속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것들을 이 세상에 드러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난뱅이처럼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부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이 복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