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라

본문 : 출애굽기 20장 3~6절

설교자 : 최종혁

 

코로나19로 일상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 시작되었을 때만해도 조금만 불편한 것을 참으면 금방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곳곳에서 새로운 일상, 뉴노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람이 서로 만나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 가능한 최대한의 거리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앞으로는 BC와 AD가 아닌 BC와 AC로 시대가 나뉠거라는 말도 한다.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현재 코로나19는 우리가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그것이 꽤나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수험생이 된다거나 군에 입대를 한다거나 하는 삶의 변화가 그런 것일 수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하는 것도 생활 패턴의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이사를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 심각하게는, 큰 질병을 만날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사고나 자연 재해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이번처럼 전세계적인 전염병을 만나게 될 수도 있고, 이전 세대의 어르신들이 경험하셨던 것처럼 전쟁을 만날 수도 있다.

어떤 일이든 이런 일들은 크게 작게 우리의 삶을 바꾼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상황에 맞춰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결정한다.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잘 씻고 머리를 단정하게 만지는 것이 중요할 수 있지만, 군인들이 훈련 받을 때는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길 수 없는 것처럼, 이전에는 중요했던 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게 된다. 아마 지금의 코로나19를 맞으면서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교회의 모습도 그렇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하는 모습도 달라졌다. 교회에 오고 오지 않고를 결정하는 기준도 달라졌다. 어디를 가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기준도 달라졌다. 우리 삶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우리 삶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이 달라진 것이어야 한다. 환경은 우리 삶에 영향을 주지만 우리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같은 환경에서도 충분히 다른 결정을 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가나안 정탐꾼 12명은 같은 경험을 했지만 결정은 정반대였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에 올라가서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말했고, 나머지 10명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삶의 중심,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영향력이 큰 환경일수록 더욱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지금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상인 듯 아닌 듯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고만 있지 않은지 돌아볼 때다. 여전히 우리의 중심에, 우리 삶의 중심에, 나의 결정에, 생각에 성경의 하나님이 계신지 돌아봐야한다. 정말 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져도 우리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셔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을 통해 우리 삶의 중심을 점검해보기 원한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잠시 멈춰서 지금 나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달라진 지금의 환경 속에서 내가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셨다. 그들의 몸 뿐 아니라 그들의 삶도 애굽에서 나와야 했던 것이다. 그들의 삶은 바로의 종으로 있을 때와 분명히 달라야했다. 그런데 그 변화는 그들 삶의 모습 이전에 삶의 중심에 찾아와야 했다. 외적인 변화는 내적인 변화의 결과다. 그리고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내적인 변화는 하나님이 그들의 중심이 되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십계명의 1-4계명에 공통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원리다.

하나님께서 구원한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된다. 외부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 변하지 않는 중심에 따라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오늘은 1, 2계명을 함께 살펴보자.

20:1-6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처음 두 계명은 함께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 계명들 자체에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6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그 반대 개념으로 5절에서는 “나를 미워하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즉, 하나님은 이 명령을 단순히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로 보지 않으신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가장 궁극적인 명령의 두 측면을 1계명과 2계명이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아마 두 계명으로 분리되었을 것이다. 두 계명은 일견 비슷한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 같지만 강조되는 부분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예배의 대상과 방법으로 구분을 하는데,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부가 나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첫번째 계명이 “나의 전부”를 강조한다면 두번째 계명은 “하나님의 전부”를 강조한다. 왜 그런지 계명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알아보자.

 

I. 제 1계명_하나님의 전부가 ‘나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의미

하나님께서 첫번째로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은 간결하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3절)

좀 어색하지만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너는 내 면전에 다른 신들을 존재하게 하지 말라”라고 할 수 있다. ‘내 면전’이라면 내가 있는 곳이고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 분이시니 결국 하나님은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백성들과의 관계에 있어 다른 어떤 신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이 계명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근거해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에게 이렇게 명할 권리를 가지고 계시다. 넓은 범주에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같은 요구를 하시고 이를 거절한 피조물들을 심판하신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은 선택한 자들의 구원자로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2절).

아무 맥락없이 그들을 찾아와서 “지금부터 나만 섬기면 내가 이런거 이런거 복 줄게”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후손이 많아지겠지만 그들이 타국에서 종살이를 하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출해 내실 것이란 사실을 알리셨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의 고통하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해내셨다. 강대국인 애굽, 그들이 믿고 의지하던 신에게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여느 신화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신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다. 굳이 10번의 재앙을 내리시고, 가까운 길을 두고 광야길로 인도하셨던 이유는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는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하실 때, 반복해서 “너희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와 유사한 표현들을 사용하셨다.

이제 이스라엘은 충분히 하나님을 알았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체험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능력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의 하나님”이라 하시며 스스로를 언약의 관계에 매시고 그 관계에 헌신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언약의 대상인 이스라엘에게도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 헌신은 부부의 서약과도 같은 사랑의 헌신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5절)으로도 표현하신다. 일반적으로 질투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생기는 감정이다. ‘나도 저것을 가져야 해’ 혹은 ‘내가 저것을 가져야 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질투다. 그래서 질투는 다른 죄로 쉽게 이어진다. 탐심이 도둑질이 되기도 하고 원망이나 불평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의 긍정적인 질투, 당연하면서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질투도 있다. 부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부부는 서로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만 그 사랑의 관계가 성립된다. 사랑에 기초한 자발적이고 전적인 헌신의 관계다. 이런 면에서 그런 관계를 ‘배타적 사랑의 관계’라고도 표현한다. 즉, 배우자가 나와만 누릴 수 있는 관계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그 관계 중간에 끼워넣을 수는 없다. 그 관계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그 이면에는 질투도 포함되어 있다. 앞서 말한 그런 관계의 즐거움을 배우자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나누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다면 그 관계를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질투가 필요하다. 배타성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 관계를 지키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익숙하다. 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낯선 명령이었다. 고대의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섬겼다. 어떤 하나의 신만을 섬겨야 한다는 요구를 받지 않았다. 정복을 당해서 정복국의 신들을 섬겨야 한다고 해도 대개는 자기 신을 버리고 그렇게 해야할 필요도 없었고 또 그 신들은 거의 이름만 달라졌을 뿐 그들이 섬기던 신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른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애굽도 마찬가지고 그 안에서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참된 신으로 인정하고 섬길 것을 명하신 것이다. 이상하고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다. 그래서 모세도 계속해서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으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해야할 것을 마지막까지 강조했다. 여호수아도 유명한 고별 설교에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강조했다. 애굽을 나온지 수십년이 지났어도 그들은 여전히 애굽의 우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또한 가나안의 우상을 섬길 유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여럿 중에 하나님이 최고이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이어야만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또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을 언급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다른 신들도 존재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은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고 말씀하셨다. 신약도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고 분명하게 선포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신들”을 언급하셨을까?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다른 신들은 없지만 사람들은 신들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다른 신들을 존재하게 하지 말라’라는 것이었다. 실재하지 않는 우상이 사람들로 인해서 실재하게 된다. 사람이 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가장 좋은 점이다. 내가 신의 존재를 결정하고 내가 섬길 신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신을 만들수도 있고, 어떤 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신을 섬기면 그만이다. 취사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내 마음을 주고 싶은 만큼, 내가 섬기고 싶은 만큼만 섬기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에 대한 가장 정확한 주석은 모세가 신명기 6장 4-5절에 기록했다.

신 6:4-5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우리에게 존재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부만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만든 거짓 신을 선택하지 말고 우리를 만드신 참된 신을 선택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정적 선택이고 전적인 헌신이 되어야 한다. 즉, 나의 전부로 사랑하는 것이다.

1계명은 신이 없다는 무신론이나 신이 많다는 다신론이나 모르겠다는 불가지론을 모두 배격하지만, 가장 직접적으로는 종교적 혼합주의에 대한 배격이다. 하나님은 “나만을 섬겨라”라고 더 단순하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지만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다른 신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 문제다.

이 경우가 더 큰 문제인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섬김/사랑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만이 계셔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참된 사랑의 관계이고 ‘하나님만을 섬긴다/사랑한다’라는 말의 의미다.

적용

그럼 이 계명을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과 바알, 아세라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하나님과 다른 무엇을 동시에 원하는 경향이 있다. 죄의 성향이다.

필립 라이큰, <돌판에 새긴 말씀>, 138.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우상을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갖는 까닭은 우리가 더 이상 거짓된 신들을 갖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고 우리가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물을 원한다. 사회적 성공을 원한다. 남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기 원한다. 건강하길 원한다. 방해 받지 않고 쉬기를 원한다. 맛있는 것을 먹기를 원한다. 좋은 옷 입기를 원한다. 즐겁기를 원한다. 평안하기를 원한다. 대부분 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과 같이 원한다면 문제다. 크게 작게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과 같이 원한다.

왜 그럴까?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물론 좋지만 다른 좋은 것들도 있는데 굳이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좋은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한에서 좋은 것이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 때문에 해야 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좋은 분이 아니신 것이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게 해주시는 좋은 분 정도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살면서 힘들 때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건강하면 좋겠고 자식도 잘되면 좋겠다. 내가 원하는 나의 일부를 하나님으로 채우면 되는 것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어느 한 두 가지를 놓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관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전부를 원하신다. 우리의 전부를 구원하셔서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길 원하시고 우리의 전부를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많이 생각하는지, 관심이 있는지, 무엇을 사랑하고 의지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어디에 시간과 재물, 에너지, 재능, 소유를 많이 사용하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그 중 어떤 것이 하나님 안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과 관계 없이, 혹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내가 하나님 외에 존재하게 만든 우상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나에게 필요한 것 같고 기쁨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만족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하는 우상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사탄의 도구가 되어 나와 하나님을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으로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이 나의 전부가 되셔야 하는 것이다.

 

II. 제 2계명_하나님의 ‘전부’가 나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의미

두 번째 계명은 좀 더 길게 기록되어 있다. 그 핵심은 제일 앞에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4절)

하나님은 새긴 우상, 즉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하셨다. 하늘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것, 물에 있는 것,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의 어떤 형상도 만드는 것을 금하셨다. 예술 작품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절하고 섬기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신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의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살았다. 신을 섬긴다는 것은 그렇게 어떤 형상을 만들고 그것들에게 절하며 섬기는 것이었다. 그 형상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이었고 사람들은 그 피조물의 형상을 만들어 가까이에 두고 섬겼던 것이다. 때로는 그 형상 자체를 신으로 섬기기도 하고 그 형상을 통해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믿고 그 형상을 신성시하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이 만든 우상은 그들이 믿는 신을 나타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굉장히 역설적인 모습일 뿐 아니라 역겨운 모습이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20절)라고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이 피조물들이 하는 일이고 그들이 존재하는 목적이다.

그런데 그런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우상숭배다. 훌륭한 노래를 만든 사람은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그 노래만 칭송하는 경우다. 그 노래만 연구를 하고 노래의 아름다움만 칭찬한다. 급기야 그 노래가 저절로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로마서의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말했다.

1:21-23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우상을 섬길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지혜로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매력적이다. 더글라스 스튜어트는 ‘우상 숭배의 매력’ 9가지를 언급했는데, 정리해보면 이렇다.

  1. 우상 숭배는 쉽다.
    언제든 신과 함께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곳곳에 신전이 있어서 신을 섬길 수 있었다. 집에 둘 수도 있고 휴대성도 좋아 몸에 지니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우상은 신이 나와 함께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런 믿음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언약궤를 가지고 왔던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언약궤가 전장에 등장하자 이스라엘은 사기가 올랐고 블레셋은 두려워했었다. 이스라엘의 신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상은 신의 임재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해주어 사람들이 쉽게 믿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보편적이었다. 고대의 사람들은 비슷한 신들을 비슷한 방법으로 섬겼다. 남들이 하는대로 할 수 있으니 더 쉬운 일이 된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 논리적이었다. 하나의 신이 모든 것일을 한다는 것보다 여러 신들이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왔다.
  2. 우상 숭배는 욕망을 충족시킨다.
    사람들이 만든 우상은 특별한 힘이 있지만 항상 인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인간이 신에게 제사, 공양 같은 것을 드리면 인간은 신의 힘을 빌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게다가 이런 의식적인 것만 잘 하면 그 외의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제한 받을 것이 거의 없다. 아마 가나안 백성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면 뭘 그렇게 어렵게 신을 섬기느냐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상 숭배는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종교 의식은 하나의 쇼로서 볼거리, 들을거리, 먹을거리, 만질거리 등이 풍부했다. 먹고 취하는 것도 그것이 오히려 신을 더 잘 섬기는 것이라는 명분으로 권장되었고, 신전에서 행해지던 이성, 동성 매춘도 그것이 신들을 자극하여 더욱 복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결국 우상 숭배의 가장 큰 매력은 나를 너무 귀찮거나 힘들게 하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있다는데 있다. 그러니 우상 숭배를 굳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혜로운 선택이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이보다 어리석은 선택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피조물을 창조주로 섬기게 하는 우상을 만들지 말 것을 명하셨다.

그럼, 거짓 신의 우상만 만들어 섬기지 않으면 괜찮은 것일까?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절하며 섬기기 위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 섬길 때는 ‘이건 원래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 신이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나름대로 참된 신이라고 생각하며 만들고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우상들은 참된 하나님을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이해하고 형상화한 산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나무나 돌, 금속이나 어떤 재료로 만든 우상은 참된 하나님을 왜곡하고 제한한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신 이후에 바로 하나님은 제단에 대한 규례를 주시면서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출 20:23)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도 그렇고 2계명에서도 그렇고(4절) 하나님은 우상을 만드는 것이 “너를 위하여”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사람이 자기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그런 이유로 그렇게 한다. 쉽게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듦으로서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와 같이 육신이 있는 것처럼 만든다. 어느 곳에나 계신 하나님이 마치 그 우상에 매여 계신 것처럼 만들고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진 것처럼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나님이 더럽혀 질 수 있고 마치 나의 보호가 필요하신 분처럼 만들기도 한다. 어떤 형상이든 형상화된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을 부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신이라고 말했을 때 정확히 이 두번째 계명을 어겼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겠지만, 우상을 만드는 순간 그 우상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저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모습이었을 뿐이다.

십계명의 2계명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하는데, 왜냐면 그것은 본래 하나님이 아니라 그 형상을 만든 사람이 원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즉, 우상은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부일 뿐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적용

일차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은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이 ‘십자가’가 되었는데, 그것을 상징 이상의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예로 십자가 목걸이를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한데, 목걸이를 깜빡해서 두고 오면 불안하다면 그것은 십자가로 하나님을 우상화 한 것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예배당이라는 건물에 어떤 신성한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성화나 성경책 같은 것을 신성시하는 것은 2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금하신 것에 해당된다. 물론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길 필요는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함부로 찢거나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자체를 신성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에 더해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도 주의해야한다. 유명 목사님들이나 저자, 내가 좋아하는 성도 등을 마치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대하면서 그들을 그렇게 의지하고 하나님께 구할 것을 그들에게 구한다면 그것은 다른 면에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참 쉽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많은 이단들이 생겨나고 사람들이 이단에 빠진다. 하나님은 절대 어떤 형상이 되지 않으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신으로 만든다는 의미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하나님을 만들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지 모른다.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죄를 용납하고 방관하시는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 동성애자 하나님도 있다. 백인들의 하나님과 흑인들의 하나님이 다르다. 각자의 우상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내가 원하는 일부만 떼어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분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구원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고 말할 때,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전부가 나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셨다. 창조 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구원 때 신자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들로 만드셨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깎아야할 것은 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그렇게 우리가 올바른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전부가 나의 전부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만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도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다른 종교를 가지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이 다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의 일부가 우리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의 전부가 우리의 전부가 되길 원하신다.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길 원하신다.

어려운가?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 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라.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2절).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했던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 말씀은 계속해서 유혹들을 이기면서 그렇게 하나님 만을 사랑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기억해 보라.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분이시다(골 1:13).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게 하셨다(벧전 2:9).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엡 2:1). 그렇게 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셨다(롬 8:32).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처럼,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찾아 구원하셨다. 우리를 살리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신다.

그런 하나님이 나의 전부가 되기에 부족해서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다. 그런 하나님의 어떤 면이 선하지 않으실까? 우리가 사랑하기에 힘들까? 그런 면은 없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하자. 하나님의 전부를 나의 전부로 삼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런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참된 예배, 참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