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본문 : 하박국 1장 1-11절
설교자 : 이병권
여러분은 어떨 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답답함을 느끼십니까? ‘아! 진짜 답답하다. 말이 안 통하네!’ 이렇게 느낄 때가 있으십니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답답함을 느끼는 건 그 사람에 대해서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결과를 얻었을 때 그런 것 같습니다. 뭔가 반응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뭔가 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볼 때 답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좀 더 심각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그런 일을 겪으면 어떨까요?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은 답답함을 넘어서 분노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고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답답함이 아니라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만약에 코로나의 위기 상황에서 정부관계자들이 국민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사태는 악화될 것이고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질 것이고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뭐하는 거냐고? 그럴 거면 왜 그 자리에 있냐고 따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러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경험하는 시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거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기도했는데 계속 기도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기도를 들으신다면 어떻게 이렇게 외면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반응이 없으신지 어떻게 이렇게 계속 침묵하고 계신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내가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 고난 속에서 도우심을 구하는데 여전히 상황은 변하지 않고 하나님은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냥 손 놓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고 있는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데 단지 우리만이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어려운 상황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예배 외에 다른 모임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었고 만만한 대상이 교회인 것처럼 특별히 더 공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거리가 되고 우리가 하는 일들이 오해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려고 모이는데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몇몇 교회에서 확진 자들이 나오고 이슈가 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느끼는 좌절감, 피로감은 커집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겁니까? 그러면서 의문이 생깁니다. 의심이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까? 어느 때까지 주께서 듣지 않으시고 침묵하실 겁니까?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 우리의 기도가 외면당하고 우리의 간구가 의미 없이 허공을 울리는 메아리 같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생기는 복잡한 마음, 불편하고 답답한 마음, 때로 일어나는 분노,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은 지금 우리에게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런 일은 계속 있었고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질문했고 마치 숨어계시는 것 같은 하나님을 찾기도 했고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보시라고 나를 보시라고 그렇게 소리를 높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사람의 마음을 가장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 시편인데 시편 여러 곳에서 그러한 애끓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시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 13: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22: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8:1“…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이 시편의 고백들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좀 심하다고 생각되십니까?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혹시 불손하게 들리십니까? 표현은 좀 다를 수 있지만 우리도 비슷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망대에 올라가 사람들이 사는 곳을 내려다보면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어떻습니까? 밤이 되어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들을 멀리서 보면 멋지게 보입니다. 하지만 전망대에서 내려와 가까이서 그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부대끼는 땅에서의 모습을 직접 보면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가로등을 멀리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그 아래에 모여든 수많은 벌레들을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러합니다. 전망대 위의 삶이 아니라 땅 아래의 삶입니다. 멀리서 가로등을 보며 낭만에 젖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빛 아래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마냥 장밋빛 꿈을 가지고 노래하며 즐기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괴로움에 눈물을 쏟을 때도 있습니다. 욥이 고백했던 것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그런 답답한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 23: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욥 23: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우리 인생에서 저절로 한숨을 내쉬게 되고 탄식하게 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정말로 답답한 것은 어려운 상황이나 괴로움이 아니라 그 때에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의 제목처럼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의 어려움과 아픔을 보고만 계시고 침묵하고 계십니까? 사실 이 질문은 새로운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오래 전부터 있었던 질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하박국에서 이 질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애타는 마음으로 호소하며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질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던지는 두 가지 질문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합 1: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합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첫 번째 질문, 하박국은 ‘기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나님 언제까지 침묵하실 겁니까? 내가 소리 높여 외치고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나의 기도를 외면하실 겁니까? 하박국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지만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합니다.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침묵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울고 있는 아이가 엄마를 좀 찾아달라고 부탁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돕는 게 어렵지 않다면 그리고 위급한 상황이라면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도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와준 훈훈한 뉴스들을 접하기도 합니다. 용감한 시민이라고 칭찬하고 어떤 경우에는 의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나와 가까운 사람, 내가 아끼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려움 가운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외면할 수 있을까요? 자녀가 부모에게 도움을 구하는데 그냥 무시할 수 있습니까? 무관심 할 수 있을까요? 자녀가 도와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하박국이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여기 강포라는 말은 “폭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폭력이라고 외쳐도 하나님은 아무 반응이 없으십니다. 구해달라고 소리를 치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한두 번 기도하고 안 된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의 요청에 대해서 침묵하실 겁니까? 얼마나 더 간절히 부르짖어야 주께서 저의 목소리를 들으시겠습니까? 하박국이 느끼는 답답함과 좌절감은 어떠했을까요? 실망감이 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하박국의 질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합 1: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합 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두 번째 질문, 하박국은 ‘죄악에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십니까? 죄악이 이렇게 넘쳐나는데 하나님은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 어찌된 일입니까? 내가 보는 이 많은 죄악들을 왜 침묵하십니까?
어떤 죄악들은 우리가 볼 때에도 참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죄에 쉽게 넘어지는 우리가 볼 때에도 용납이 되지 않는 죄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 죄악을 보실 때 어떨까요? 정의가 무너지고 공의가 짓밟히는 세상을 보실 때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하박국이 묻습니다. 도대체 왜 죄악에 대해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도대체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겁니까? 하박국이 하나님께 따지는 겁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하나님이 침묵하시니까 어떤 결과가 있는지 보십시오.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시행되지 못합니다. 의인들이 악인들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두고 보시는 겁니까? 여기 말씀에서 율법이 해이하다는 것은 마비되었다는 뜻입니다. 죄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마치 마비된 것처럼 율법이 무시되고 율법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악을 행합니다. 힘 있는 자들은 악인들의 죄악을 눈감아 주고 오히려 약한 자를 핍박합니다. 힘 없는 자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 바쁩니다. 공의가 왜곡되고 부정이 판을 칩니다. 하박국이 보고 있는 남유다왕국의 모습입니다.
몇 달 전에 미국에서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이 목숨을 잃었고 그것을 빌미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가게를 부수고 들어가서 약탈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사람의 죄성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상황에서 사태를 수습해야 할 정부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가끔 이슈가 되는 재판들이 뉴스에 보도가 되는데 사람들이 재판 결과를 두고 분노하며 판사를 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에 비해서 형량이 너무 적다는 겁니다.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합니다. 죄악에 대한 심판이 가벼울 때, 심판이 바르게 행해지지 않을 때 법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처벌이 내려지지 않고 판사가 자기 이익이나 상황에 따라 판결을 굽히고 검사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 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게 될 때 법은 무시되고 정의는 시행되지 못합니다.
하박국이 경험했던 상황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십니까? 이런 위기의 때에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안하시는 것처럼 보이니까 하박국은 그 상황을 견딜 수 없는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럴 때 여러분도 하박국처럼 하십시오. 하나님께 질문하십시오. 하나님께 질문해도 괜찮습니다. 의문을 제시해도 됩니다. 우리는 의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의심을 그냥 덮어두지 않았습니다. 절박한 기도에도 넘치는 죄악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토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의심해도 될까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답은 ‘해도 된다’입니다. 의심해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을 감당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 의심을 하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의심을 덮어두고 혼자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그런 고민을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도 의심합니다. 저도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도록 자신을 꾸미는데 능숙합니다. 괜히 의문을 제시하고 질문했다가 부족한 사람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찍힐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면을 쓰고 자신을 감추고 속마음을 숨깁니다.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정답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건강한 의심은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믿으려면 이해해야 하고 이해하려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데 무엇이 걸림이 되는지 무엇이 방해가 되는 알아야 제대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믿지 않으려고 핑계되는 의심이 아니라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해하기 위한 건강한 의심은 필요합니다. 정직하고 솔직한 질문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하박국만이 아니라 도마도 그러했습니다. 도마도 의심했습니다. 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20:25 “…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렇게 의심하는 도마를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20:27 “…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너의 손을 내밀어서 직접 확인해보라고 말씀하시며 의심하는 도마를 믿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고 의심이 들면 하나님께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받아주십니다. 진리는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 코로나의 위기에서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물음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의심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 앞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건강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뭔가 이해가 안 되고 질문이 있는데 그럼에도 계속 감추고 있는 것은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훨씬 더 위험한 것입니다. 관계에 있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치명적인 폭탄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씨름하십시오. 그분 앞에 풀어놓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건강한 믿음과 영적 성장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박국이 하나님께 던진 질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하박국이 던진 질문을 받으십니다. 대답하십니다.
합 1: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행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 일은 정신을 빼놓을 만한 일이고 너무 놀라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일입니까?
합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갈대아 사람을 비유적으로 묘사하며 그들이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십니까? 사납고 과격한 갈대아 사람, 다시 말하면 두렵고 무서운 바벨론 나라를 일으켜서 유다를 심판하십니다. 누가 이 일을 하십니까?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내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바로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십니다.
기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 죄악에 침묵하시는 하나님, 침묵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고 계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안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바벨론을 일으키셨고 유다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침묵을 무관심으로 무반응으로 무활동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계획이 다 있으십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고 어두움은 계속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가고 교회의 모든 사역이 회복되도록 성도님들이 어려움 없이 함께 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침묵 속에서도 그분은 조용히 그 뜻을 행하시며 그 계획을 이루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동안의 코로나 사태를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봤을 때 코로나로 인해 그 실체가 드러난 두 곳이 있습니다. 두 곳은 신천지와 이태원 클럽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감춰져있었던 그들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천지와 동성애 클럽에 연관되어 있는지 보여주었고 사람들에게 이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침묵은 언제나 과정입니다. 침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선하신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보다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때로 오해를 받더라도 우리를 위한 최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 때로는 침묵을 선택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 믿는 자들의 주권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나라와 온 민족과 온 백성들을 다스리는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우리만을 생각하시고 우리만 위해 일하지 않으십니다. 온 세계 가운데 모든 나라와 백성들을 모두 보시고 뜻대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바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시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악한 세력이 날뛰고 죄악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과 시간표대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코로나 세상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불평하며 의문을 가지고 질문했던 하박국,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하박국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생각과 태도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더라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코로나의 위기가 계속된다 하더라도 비록 나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고 어려움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멀리계시는 것 같고 나의 간구와 상황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든 문제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앞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내어 놓고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어려움과 불평과 의심들을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 비결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합 2:4 “…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현실이 막막하다하더라도 아무리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다하더라도 믿음은 그 모든 것을 뚫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물음표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모든 물음표는 느낌표가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하박국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을 향한 의심과 불평들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시고 우리 마음을 바꾸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그 침묵은 우리를 위한 최선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정말 잔인할 정도로 침묵하셨을 때가 언제일까요?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과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셨을 때가 언제입니까?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들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게 했던 것이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당시에 십자가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면 분명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하시는 것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때에 침묵하셨지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그 모든 예언을 성취하고 계셨고 아들이 생명으로 드리는 완벽한 희생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창세전부터 계획하셨던 구원의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성소의 휘장을 둘로 찢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아들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이해되지 않으십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최선을 아시고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멀리 보지 못하고 깊이 보지 못해서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의심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실망하지 마시고 낙심하지 마시고 더욱더 믿음으로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코로나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