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이 보시는 신앙
본문: 누가복음 14장 1~6절
설교자: 최종혁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 보는 것,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는 것을 중요시 합니다. 아침에 나올 때 시간이 없으면 밥을 포기하시나요, 씻는 것을 포기하시나요? 대부분 밥을 포기하실 것입니다. 집은 천막에 살아도 차는 좋은 것을 타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겉모습을 가꾸는 데 들이는 시간의 절반만 우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장기)을 신경쓴다면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드러날 때 정말 큰 문제가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한 신앙생활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각으로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보실 거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내 신앙생활에 스며든다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런 것을 형식주의, 율법주의신앙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열매(봉사, 섬김)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알맹이가 빠져 있는 열매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겉만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중요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은 감추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깨끗한 것으로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만나게 될 본문의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혹시 우리에게 그런 면이 있지 않은지 함께 생각해보고 경고와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Ⅰ. 예수님의 상황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1)

“안식일에” – 시간

다시 한 번 안식일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르치기도 하시고, 귀신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시는 그런 일들을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래서 안식일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들과 논쟁하는 장면들이 복음서에 종종 등장합니다(눅 6, 13장).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두고 그런 논쟁이 벌어진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유대인들은 그 잘못된 생각, 혹은 잘못된 전통(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안식일이 중요했던 이유 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모습이 그들의 정체성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10계명을 생각해 보면, 부모를 공경하거나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탐하지 않는 것은 일반적인 도덕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의 다신론적인 문화를 생각해보면 좀 특별한 부분이지만 아주 유별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의 식사 문화가 이방과는 전혀 달라서 유대인인 것이 분명히 드러났던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그들에게는 유대인인 것을 드러내는 분명한 표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다른 날과 구분하여 지킬 것을 말씀하셨고, 이 날은 ‘하나님을 위한’ 날이며 또한 사람을 위한 날이었습니다. 바쁜 일상의 일을 내려놓고 쉬면서 창조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왜’ 안식일을 지키는지는 잊어버리고 ‘어떻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에만 몰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동기보다는 보이는 행위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막 2:27). 평안히 쉬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기보다, 혹시나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눅 6:5), 이런 잘못된 생각, 전통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과 안식일에 대해서 논쟁하시며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이고, 무엇이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인지 가르치셨습니다.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 장소

산헤드린의 멤버로서 바리새인이면서 지도자였을 수도 있고, 바리새인 중에서 지도자격인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특별히 바리새인 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 집에 가신 이유는 떡을 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에는 요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전날에 먹을 음식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점심일수도 있고 저녁일 수도 있습니다. 점심에 주로 떡(빵)을 먹은 것을 생각하면 점심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 다르게 말하면, 바리새인의 소굴에 식사 교제를 하러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전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신 심판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결국 그들을 날개 아래로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영적 소경으로서 유대인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던 지도자들,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가신 것입니다.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하러 가신 경우가 이미 두 번 기록이 되었고,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이번 식사에 대한 말씀은 24절까지 이어집니다. 이전의 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지 않았고 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누가는 여기서 ‘엿보고 있더라’는 말로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을 감시하며 고소할 거리를 찾고 있었다.

오늘 본문과 유사한 사건이 6장 6~1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치실 때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고 있었고(6: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무엇이 ‘옳으냐’고 물으시며 병자를 고치시자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눅 6:11)”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을 때의 그들의 반응은 이러합니다.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눅 11:53-54)”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는 표현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서 매복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몰래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결국 영접한 바리새인도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어떻게든 책잡아 무너뜨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유심히 예수님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2)

마침, 예수님 앞에 한 병든 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병 고침을 구했을 수도 있지만, 정황상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두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예수님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던 그들은 지금 미끼를 던지고 예수님이 덥석 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수종병

고창병, 부종 등으로도 불리는 병이고, 율법에서 말하는 유출병(레 15:1~12)에도 포함되는 병일 것입니다. 체액이 비정상적으로 유출되어 세포, 관절 등이 부어 오르는 증상을 말합니다. 팔, 다리, 복부 등이 부어올라 비정상적으로 커져서 장기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증상으로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간, 신장, 심장의 기능에 문제가 있을 때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수종병을 성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계속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흠집을 내고 고소할 거리를 찾고 있는 바리새인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기에) 부도덕한 죄인이 있었고, 이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여기서 어떻게 하실 지를 멀리서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확실하게 이 예수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을 어기는 자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아님을 확인하고 증언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 예수님의 질문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

대답하여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고 하는데, 딱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말을 했지만 생략되었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다 아시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 – 그 자리에 다른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의 식사 초대였던 만큼, 특별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초대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 수종병 든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지금 이 상황은 바리새인들이 만든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예수님은 두 차례 질문을 하셨는데, 첫 번째 질문은 ‘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법적으로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물으셨습니다. 여기서의 법은 당시 상황에서 모세의 율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들이었고 바리새인은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전문가들로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회당장은 분노했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는 것을 가지고 고발하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인지 생각해 보게 하셨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율법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평소 하던 일을 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병 고치는 것도 일이니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외가 있었는데, 생명이 위급한 경우였습니다. 지금 당장에 죽게 되는 상태라면 의료 행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4)

그들이 잠잠하거늘그들은 잠잠했습니다. 예수님과 말로 논쟁을 하려면 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병 고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일이 되는 것이 문제라고,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말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병을 고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침묵은 정직한 침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는 의도를 알고, 침묵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이 맞다고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해도 자신들에게 이롭지 않기 때문에 대답을 회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합당하다고 하면 자신들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고, 합당하지 않다고 하면 지금 이 아픈 사람 앞에서 자신들의 평판이 좋지 않게 되고, 불쌍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이들의 침묵은 전략적인 침묵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말로 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게하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확실히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지금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병을 고치게 해서 책잡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적은 보고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이적을 보고 확실히 믿지 않기 위해 이적을 바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바리새인들이 잠잠히 있을 때 예수님은 이 병자를 붙잡으셨고, 고치셨고,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병자를 통해 예수님을 고소할 것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 병자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곳에 있으면서 바리새인들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이제 예수님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좀 애매하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큰 일’을 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 병자를 붙잡는 일을 하셨습니다. 고치시는 것은 아마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면 말씀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집으로 보내는 것도 딱히 ‘일’의 범주에 넣기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이기 때문에 이들의 기준에서 공격을 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잠잠했고,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 예수님의 질문 2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5)

처음 질문이 법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질문은 그들의 동기에 대한 질문입니다.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던지신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우물이 많았고 우물에 아이들이나 짐승이 빠지는 경우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을 때 그들은 주저 없이(“곧”,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끌어냈습니다.

왜 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은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그들의 아들이나 짐승이 우물에 빠지면 주저 없이 우물에서 끌어냈을까요? 왜 그런 일은 안식일에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이 상황이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내 아들이 우물에 빠졌는데 안식일이니까 더 버티면 저녁에 아빠가 구해줄게라고 말할 아버지는 없습니다. 내 소가 우물에 빠져 죽으면, 또 돈을 들여서 소를 사야 합니다. 당시 소는 정말 큰 재산이었습니다. 결국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는 법을 관대하게 적용하고,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적용한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셨고 그 근본정신이 무엇인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이 판단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말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셨고 그 명령을 주신 근본정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나의 이익이 판단기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너희 아들이 수종병에 걸렸다면, 그리고 내가 너희 아들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안다면, 안식일이니 고치지 말라고 하겠느냐?” 그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고쳐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여기 바리새인들이 수종병 든 자를 단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미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자로서 ‘보여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식사 전에 예식으로서 손을 씻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참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어떠하심을 나타내는 데는 그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지만, 실제로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했지만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게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금식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낮아져서 전적으로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말했지만, 수많은 안식일의 세부 조항을 만들어 더욱 더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자신들은 그것을 잘 지킨다고 자랑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으로 자신들이 정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이들이 가난한 자를 구제했을까요? 당연히 했습니다. 내가 자비로운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들이 정말로 알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책잡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그 마음속까지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정말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이런 형식적인 신앙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나의 이익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은 ‘엄격함’이나 ‘율법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분이신 것처럼, 율법의 근본정신은 공의와 자비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 되니까 아픈 사람은 계속 아프게 두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보여지는 신앙을 가진 이들의 마음은 이미 냉랭해졌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었으며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6)

이번에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4절에서는 자발적으로 잠잠했던 것이라면, 여기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해서 고소할 증거를 찾으려던 그들은 도리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대답을 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한다고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왜 이 수종병 든 자에게 긍휼을 보이지 않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들 자신의 긍휼 없음이 드러나길 원하지 않았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전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유별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들이 다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에 더 신경을 씁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느 쪽에 더 신경을 쓰고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는 일은 왜 더 잘 못하게 될까요? 가까이에 있는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존경하는 일은 왜 다른 성도를 섬기는 것보다 더 어려울까요?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개인 신앙생활도 겉으로 잘 보여진다면 우리는 그런 일에도 더 열심을 내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렇다는 말은 우리에게도 형식주의, 율법주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보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그것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지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실 수 있고 그것을 먼저 보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까? 나의 유익을 위해서 합니까? 그렇다면 보이는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 눈에 띄는 일에 열심을 내고, 더 좋은 방법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퍼지게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것이 시작입니다. 사람에게 보여지는 신앙생활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었습니다. 곡식과 유사한 가라지는 세상에 정말 많습니다. 열심히 봉사를 하고 말씀을 잘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바리새인을 존경하고 그들에게 환호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들을 그런 시각으로 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보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작해서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베풀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미 6:8).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그것에 초점이 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