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본문: 창세기 4장 1-5절
설교: 이 병권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러분은 혹시 ‘내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을까?’라는 질문을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내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을까?’ 아마도 이 질문은 우리가 피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질문일 것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대해서도 하나님보다 내 위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야 어떠하든 상관없이 내가 예배를 드렸으니 그것으로 만족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배 시간에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예배 순서에 따르기만 하면, 자동으로 하나님이 내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대해서 내가 괜찮으면 하나님도 그럴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당에 앉아있다고 해서, 예배 인도에 따른다고 해서, 무조건 그 예배를 받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이 자리에 100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 100명의 예배가 모두 같은 예배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의 예배는 받으시지만, 어떤 분의 예배는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일괄적으로 한꺼번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예배를 지켜보시고 각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몇몇 사람이 예배를 잘 드리면, 다른 사람의 예배는 덤으로 받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예배를 다 받아주셨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얼마나 될까요? 주일 아침에 시간을 내고 수고함으로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잘못된 예배는 단순히 우리의 힘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이사야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런 예배를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여러분 마음속에 그런 소원이 있으십니까? 오늘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형제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예배를 받으시고 한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예배만 받으셨는지 살펴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창세기 4장은 우리 교회에서 자주 벌어지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출산입니다. 많은 자매님이 출산에 참여하셨고 또 출산을 앞두고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출산은 정말 할 수 있다면 대역을 쓰고 싶은 일입니다.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출산만큼 또 기쁜 것도 없습니다.
하와가 가인을 낳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절). 이 말씀은 ‘내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남자를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하와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러한 창조의 기쁨을 맛보며 고백하는 희망과 믿음으로 가득한 말입니다. 출산의 감격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까지 더해져서 굉장히 기쁜 것입니다.
앞선 창세기 3장에서는 가장 절망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을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불순종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와는 가인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가인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인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란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보면 또 다른 자녀의 출산이 나옵니다. 바로 아벨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의 직업이 별다른 설명이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2절).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이 왜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두 사람이 성장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형제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가인은 곡식으로 예배를 드렸고, 아벨은 양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3절). 이것은 이 사람들의 직업을 생각해볼 때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곡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양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4,5절).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히브리서는 이것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히11:4).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믿음’에 있었습니다. 아벨은 가인과 달리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시고 자신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 하나님이 예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믿음. 아벨은 이러한 믿음의 태도로 하나님께 예배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는 것처럼 그냥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 그냥 의무적으로 예배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보다는 그냥 하나의 형식적인 차원에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한 가지 조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앉아 있다고 해서 다 예배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예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까 사람들 만나는 게 좋아서 나올 수 있고, 교회에 어떤 일을 맡았으니 책임감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아니면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나왔기 때문에 나올 수도 있고, 부모님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혹은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 내 사업이나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와 동기를 가지고 예배에 나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어떤 동기로 여기에 오셨고 왜 이 자리에 앉아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것은 예배에서 우리 마음의 태도가 정말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주목하고 그것에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드러나는 무언가를 하고 그럴듯하게 모양을 내고 꾸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형식이나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외적인 형식보다는 우리 마음의 동기를 살피십니다. 아무리 좋은 건물 안에서 값비싼 장비를 가지고 사람들 보기에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를 드린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지금 이곳에 임재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권세 위에 뛰어난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온 우주와 이 세상의 역사를 다스리고 계시며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왕이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바로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로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이 나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나의 주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믿음이 있으십니까?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여러분의 예배가 그 믿음을 반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예배를 받으시기에 지극히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믿음 없이 드리는 빈껍데기 예배는 아무나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은 절대로 받지 않으십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믿음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믿음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받으실까요?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최선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묘사하면서 그것이 아벨이 드릴 수 있는 제물 가운데 최상의 것임을 말씀합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4절). 이것을 좀 더 잘 번역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벨은 자신의 양 떼의 첫 새끼 가운데서 가장 살진 것을 드렸다” 수많은 양이 있는데 그중에서 처음 나온 것, 그리고 가장 살진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처음 나온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라든지 처음 익은 열매를 제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아벨은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최상의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최선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존경과 사랑을 담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냥 대충 남는 물질과 시간으로, 그냥 반쯤 남은 마음과 에너지로 그렇게 내 마음대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내어주신 우리 구원자에게 우리의 사랑과 감사와 존경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그분께 합당한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최상으로, 최선을 다해 예배함이 마땅합니다.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기대감을 갖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내 사랑을 주님께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예배의 태도를 한번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혹시 내 직장 상사도 기뻐하지 않을 그런 태도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다섯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나 자신을 한번 점검해보십시오.
1번. 혹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에 빠지고 지각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어서 빠질 수도 있고, 특별한 이유로 늦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습관처럼 함부로 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예배 시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미리 와서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십시오. 준비된 예배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2번. 혹시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옆 사람과 이야기하고 계십니까?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여전히 떠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례입니다. 일단 예배가 시작되면 모든 것을 중단하고 예배에 집중하십시오.
3번. 혹시 예배 중에 휴대폰으로 뭔가를 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너무도 기본적인 것입니다. 휴대폰뿐만 아니라 예배 중에 하나님께 집중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지혜롭게 잘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4번. 혹시 특별한 이유 없이 자리를 이동하십니까?
우리가 예배 중에 함부로 이동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긴다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예배를 방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이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5번. 혹시 아무도 모르게 자꾸 딴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가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그분께 온전히 집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최상의 것으로 채워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가득 차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최고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만 온전히 집중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때 그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며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서 내 마음과 뜻을 다해서 예배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가 그 예배를 통해서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번의 예배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최선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조건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 존재 전체가 드려진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의 예배에 대해 다르게 반응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묘사하면서 흥미로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4,5절). 하나님께서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 즉 가인의 제물만 안 받으신 것이 아니라 가인 자체도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까요? 이것은 예배에서 드러난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예배자의 삶을 사는 사람인가를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삶이고 하나님을 향한 나 자신의 표현입니다. 예배는 기도하거나 찬송하거나 떡과 잔을 대하거나 헌금을 하거나 말씀을 듣거나 하는 모든 것 이전에, 나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나의 삶에 달린 것입니다. 그냥 여기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나가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우리의 몸이 제물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크 래버튼 교수는 “진정한 예배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고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움직이는 위험천만한 결단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높이는 사람보다 삶의 현장에서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움직이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런 사람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 저의 존재 자체가 주님을 위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움직이겠습니다”
“주님, 저의 손과 발과 저의 입술, 저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님이 가장 가치 있는 분이시기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이 정말 제 삶의 최선임을 알기 때문에,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런 고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삶에서 순종하는 예배자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자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아무리 열정적으로 찬송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기도를 잘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받으실 수 없다면 그런 예배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저는 어제 ‘영화관 의자의 위생상태가 엉망이라 진드기가 많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진드기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정말 성가신 존재입니다. 백과사전에서 진드기의 삶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무언가를 붙잡을 수 있는 그들의 앞발은 기생하는 동물이나 식물에 올라타기 쉽다. 그들은 숙주의 몸에서 안전한 장소를 찾아내어 입을 집어넣고 빨아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배가 부르면 숙주를 떠난다’ 자신들이 살아갈 만큼만 기생하다가 필요가 채워지면 떠난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다음 주일까지 살아갈 만큼 충전한 다음, 남은 6일 동안에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겁니다. 여러분은 주일에만 하나님을 방문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남은 6일 동안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안식처가 되십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것이 이곳에서의 일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계속되어야 합니다. 내 말과 행동이, 내 인간관계와 내 경제생활과 내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이곳에서의 예배가 더 감격스럽고 살아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받으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재능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예배는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신앙인인지 나타내줍니다.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인인지, 아니면 그냥 삶의 모든 초점이 나에게 있는 나 중심적인 종교인인지를 우리의 예배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예배를 점검하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최선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최선으로, 삶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겁니다.
가인은 불행하게도 그런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 예배의식만 거쳤지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잘못된 예배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기쁨과 유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잘못된 예배는 우리를 거짓된 안전에 빠뜨립니다. 그냥 하나님과의 관계도 없는데 예배당에 앉아있으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너무도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면 마음이 더 굳어져서 예배가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만 했지 나의 삶과는 관련이 없는 별개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된 예배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점검하십시오.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면 우리의 삶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