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의 평강
본문 : 빌립보서 4장 6-7절
설교자 : 최종혁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전화를 거는 것으로만 사용하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이제는 수많은 일들을 그것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곧 신경 쓸 일이 더 많아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어릴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어릴 때는 부모님이 주시는 밥 먹고 입으라는 옷 입고 주어진 일, 공부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결혼을 하고 관계가 더 넓어지고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참 많습니다. 자녀가 있으신 분들은 이 말을 더욱 실감하실 것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에서부터,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 ‘어떤 일을 할까’, ‘노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등 고민이 많아집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에 신경을 안 쓰고 살면 갑자기 어떠한 상황에 닥쳤을 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삶에 대한 고민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가 책임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어떠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하는 것은 생산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걱정하고 염려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은 고사하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 상황에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염려, 걱정, 근심이라는 것은 신앙을 흔드는 이유가 됩니다.
저는 계속해서 빌립보서 4장의 말씀을 통해 “주 안에서 굳게 서라”는 주제의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 “관용을 나타내라”(5)를 말씀드렸고, 오늘은 “염려하지 말고 아뢰라”(6)는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에게는 ‘벗어야 할 것’과 ‘입어야 할 것’이 있고,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벗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은 ‘염려’이고, 입어야 할 것, 취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렇게 할 때 ‘평강’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벗을 것 – 염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6) 염려를 멈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염려”라는 단어는 2:20에서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는 구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같지 않지만, 여기 “진실히 생각하다”라는 말은 오늘 본문 말씀의 “염려”와 원어가 같습니다. 즉, ‘깊이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것’의 의미입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에도 ‘염려’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즉, 이 “염려”라는 말에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황에 따라 적절히 판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염려하지 말라”에서의 “염려”는 ‘주의’, ‘관심’ 등의 긍정적 의미의 염려가 아닙니다.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 어떤 상황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해결해야 할 일은 있지만, 염려하고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가까우심이라”(5절 끝부분) 때문입니다. 우리 가까이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우리의 ‘염려제목들’을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염려의 문제는 첫째로 생산성의 문제입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 키가 작아서 걱정인 학생들이 있는데, 키라는 것이 염려한다고 해서 더 자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성경 사본에는 “키”라는 단어가 “목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목숨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것을 가지고 염려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는것입니다. 헛된 데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고 여전히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있다가 버려지는 들풀은 내가 걸어가며 밟았는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하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찮은 것도 솔로몬의 영광으로 입은 것보다 더 영광스럽게 입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것들도 돌보고 계시고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너희를 붙들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32). 여기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필히 염려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왜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적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마 6:19-24에서 주님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지 않고 이 땅에 쌓아두는 문제에 대해 지적하시면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재물과 이 땅의 것들에 소망을 두는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 말씀의 대상은 돈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25절부터는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한 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사람은 누구나 이 땅에 소망을 두려고 합니다. 그렇게 염려하는 것은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는데 왜 이 땅의 것, 보이는 것에 매달려 있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염려”는 그것이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생산성의 문제와, 믿음의 문제, 우선순위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명령이자,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입을 것 – 기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여기서 “다만”은 “대신에”라는 말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버리면 그만이 아닙니다. 대신에 무엇을 입어야 합니다. 염려를 뺐으면 이제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입을 것은 “기도”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범위는 모든 상황, 모든 일입니다. 우리가 염려할 만한 상황은 없습니다. 염려할 제목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기도할 상황, 기도제목은 됩니다. 좋은 것이든, 슬픈 것이든, 힘든 것이든, 무엇이든지 아뢰라고 했습니다.
아뢰는 방법은 “기도”와 “간구”입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의미의 기도이고, 간구는 간절히 구하는 기도입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겨루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바알 선지자들은 자신이 믿는 신을 부르기 위해 춤을 추며 뛰어놀다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신이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기 위해 우리 몸을 상하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순례의 길을 갈 필요도 없고, 고행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화수를 떠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최면상태에 들어가서 신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적인 의식,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아뢰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의심이나 회의가 아닌 감사입니다. 이것은 응답해 주실 것에 대한 감사도 되지만, 보다 포괄적이 의미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해주신 것과 앞으로 해 주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걱정스럽고 두려운 상황이지만, 하나님이 이 상황을 허락하셨다,라는 신뢰의 태도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셔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내가 볼 때 이것은 악인 것 같이 느껴지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되더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아뢰야 할까요? “염려할 것”이었는데 이제는 “구할 것”이 되었습니다. ‘염려제목’에서 ‘기도제목’이 된 것입니다. 그 아뢰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대상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기도와 간구를 이방신에게 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기도의 대상이 잘못되었으므로 기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이 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감사할 수 있게 하시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이것은 ‘드러내라’,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의 기도내용을 모르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를 드러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필요가 있는지, 우리가 어떤 일로 힘든지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자신이 알도록 그것을 아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와서 끊임없이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의 요구를 들어주고 받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필요를 아뢰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요청했을 때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있고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아이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도 이와 유사합니다. 때로는 해결해 주시기도 하고, 우리가 그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기도 하며, 때로는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 어떤 것이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염려하는 것’과 ‘아뢰는 것’의 결정적 차이는,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 – 하나님의 평강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은 너무 힘들고 두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 안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며 평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마음속에 분노와 원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와 지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이와 같습니다. 그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 참 감사가 되었습니다. 두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때 불안한 마음으로 내 의지와는 다르게 순간순간 나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고, 그런 생각들이 저를 사로잡는다고 생각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이해를 뛰어넘는 평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지키신다”는 말은 아군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을 가리키는 군대용어입니다. 우리의 염려를 내려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여전히 나를 향한 공격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내가 처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모든 상황이 곧 좋아지리라 기대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우리의 기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쩌면 상황이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반드시 승리하도록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염려하지 말고 말만 해라, 내가 평안을 주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호기로운 남편은 아내에게 ‘나만 믿고 따라와라’고 프로포즈를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계십니까? 기도는 하나님과 단지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신뢰가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잊고 계신 것 아닙니까? 기도만 하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계신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염려하고 걱정하지 마시고, 그 대신에 하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필요를 아뢰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