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집, 교회
본문: 디모데전서 5장 1~2절
설교자 : 이병권
이런 말이 있습니다. ‘괴로운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편안한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일이다’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하고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하는 일, 어찌 보면 우리가 세상에서 말씀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 없는 괴로운 사람에게 말씀으로 참 평안을 전합니다. 또한 세상이 주는 만족으로 편안한 사람에게는 주님 없는 인생의 끝이 어떠한지 경고합니다. 이러한 경고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사람들을 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으로 사람을 경고하는 일은 교회에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주님을 위한 괴로움을 잃어버리고 편안한 형제, 자매에게 아니면 주님이 주신 위로를 잃어버리고 괴로운 형제, 자매에게 우리는 필요한 권면으로 편안을 전하고 때로는 괴로움을 전해야 합니다.
물론, 주님을 위한 괴로움을 피하고 있는 사람에게 괴로움을 감당하라고 도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지혜롭게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지혜를 더해줄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주님을 섬기는 지체를 권면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쓴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디모데를 생각하면,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를 섬기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디모데에게 바울이 본문에서 필요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1-2)
오늘 본문을 보면 네 종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본문의 표현 그대로 하면 늙은이와 젊은이,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입니다. 좀 더 쉽게 표현을 바꾸면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섬기는 사람들, 교회를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할 수 있고 그리고 나보다 나이가 비슷하거나 적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젊은 남자였지만 디모데의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별과 연령에 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다양한 연령과 다른 성별의 사람을 대할 때 특별히 권면의 말, 그들에게 필요한 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꾸짖지 말고 권해야 합니다.
1절에 꾸짖지 말고 권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는 태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 말씀에서 ‘꾸짖다’는 단어는 좀 과격한 단어인데 때린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말로 때리는 겁니다.
우리가 손과 발로만 사람을 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입술로, 말로도 때릴 수 있습니다. 그 마음에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릴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을 직접 때리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만 상대적으로 말로 하는 폭력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말로 때리는 것도 큰 아픔을 줍니다. 폭행만이 아니라 폭언도 심각한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권면의 말을 할 때 합당한 태도는 권하는 것입니다. 꾸짖는 것이 아니라 격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권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가까이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잘못이나 고쳐야 할 부분이 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바른 길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곳에서 나오도록 그 사람을 불러야합니다.
‘그 곳은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위험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가 해야 하는 권면의 기본적인 내용이 이러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알게 하고 그 잘못에서 나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꾸짖지 말고 권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일까요? 그 대상은 1절에 나오는 “늙은이” 늙은 남자입니다. 우리 성경에 늙은이로 되어있는데 이 단어는 장로를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와 같습니다. 같은 단어가 장로가 되기도 하고 여기에는 늙은 남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성경의 문맥입니다. 어떤 성경은 이 단어를 장로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우리 성경이 번역한 것처럼 장로보다 늙은 남자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꾸짖지 말고 권해야 합니까? 늙은 남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권면의 대상은 늙은 남자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은 한 문장입니다. 꾸짖지 말고 권하라는 명령은 모든 대상에게 적용되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꾸짖지 말고 권해야 하는 대상은 늙은 남자와 여자,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와 여자도 포함이 됩니다.
우리가 이런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교회에서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보다는 나보다 나이가 적거나 비슷한 연배의 사람을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꾸짖거나 말로 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연령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지적할만한 일이 있을 때, 필요한 말들을 해야 할 때 지혜롭게 적절한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가 교회 전체에게 이야기할 때, 특히 문자나 카톡으로 말을 전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내 의도와 다르게 전달 될 수 있고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선물을 준비한다 하더라도, 그 선물이 상대방에게 정말 유익하고 가치 있는 선물이라 하더라도 선물을 전달할 때 걸레에 대충 말아서 주면 어떨까요? 악취가 나는 더러운 보자기에 싸서 주면 누가 기쁘게 받겠습니까? 좋은 것은 좋은 방법으로 잘 포장해서 전해야 합니다. 좋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다면 좋은 말에 담아서 잘 전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선물이 선물답고 가치 있는 것이 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과대포장, 실속이 없는 그런 포장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사치레로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상대방 비위를 맞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고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따른 합당한 교훈으로 필요한 권면을 해야 할 때 바람직한 태도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꾸짖는 자가 아닌 권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꾸짖는 말보다 격려하는 말이 더 좋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권면의 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로 가족에게 하듯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 “에게 하듯 하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하듯 하고, 형제에게,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주님 안에서 가족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권면이 필요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가족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가족이 아니기에 그렇게까지 하기 싫은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 가족이라면 받아주고 용납했을 부분을 가족이 아니기에 나쁘게 생각하고 안 좋게 볼 수 있습니다. 내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면 ‘아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는데, 다른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면 ‘교육을 어떻게 했니, 잘못 키웠느니’ 쉽게 이런 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어떤 상황에 대해서 더 나쁘게 보고 더 안 좋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실제 가족과 똑같을 수 없습니다. 분명 다릅니다. 갑자기 성도를 실제가족처럼 그렇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 대한 친밀함과 가까운 정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가족이 되었지만, 실제로 가족처럼 느끼고 가족처럼 대할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한 멋진 부부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부부는 서로가 첫 번째 남편과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재혼한 부부입니다. 남편도 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내도 전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배우자를 먼저 보낸 아픔이 있는 두 사람이 만나서 다시 결혼했고 다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부부를 더 멋지게 만드는 것은 결혼한 이 부부의 자녀가 모두 열한 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고, 아내에게는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니까 자녀가 합하여 열한 명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어떤 느낌일까요? 어느 날 자신에게 새로운 어머니, 혹은 새로운 아버지가 생겼고, 여러 형제, 자매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가족의 크기가 두 배가 되었습니다. 마냥 신나고 좋을까요? 늘어난 가족으로 인해 여러 수고가 따라올 것입니다. 새로 더해진 가족들과 친해져야 할 것이고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서로가 어떤 성향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가며 서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가족이 늘어나면 그만큼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유익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감수해야 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는 것입니다.
대가족이 된 이 부부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지만, 아직은 가족처럼 친밀하지 못할 수 있고 서로 맞지 않는 부분으로 인해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고 아버지에게 하듯, 어머니에게 하듯, 형제에게 하듯, 자매에게 하듯, 그렇게 가족에게 하듯 사랑으로 용납하고 권면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괜히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부친님, 모친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그냥 말뿐인 관계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가족으로 묶어주는 근거가 무엇인지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냥 가족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가족입니다. 우리를 가족으로 부르신 분도 가족으로 살도록 계획하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 주님의 뜻에 따라 가족으로 여기고 더욱더 가족답게 서로 알아가고 이해하고 세워가는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권면의 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셋째로 온전히 깨끗함으로 해야 합니다.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2) 여기 “온전히 깨끗함으로” 라는 말은 성적인 정결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죄를 짓게 될 가능성을 아예 없애는 것입니다. 성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원리를 따를 때 죄를 멀리할 수 있습니다. 젊은 여자를 자매로 여길 때 존중하고 보호하며 불순한 의도를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히 깨끗함으로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녀 관계는 참 조심스럽고 또 어려운 관계입니다.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이런 죄에 대해서 관대해지고 문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우리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이성을 대하고 말씀의 기준에 따라 지켜야 할 선을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적인 농담이나 부적절한 스킨십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성과 단 둘이서 부적절한 장소나 부적절한 시간에 만나면 안 됩니다. 이성간에게 호감이 있더라도 과도하게 친밀함으로 앞서가면 안 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교회 안에 형제, 자매가 현실남매와 같을 수 있습니다. 서로가 너무 함부로 대하고 서로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주님 안에서 가족으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해서 온전히 깨끗함으로 대하는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참 소중한 존재이기에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느끼는 욕심이나 욕구로 상대방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에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정말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에 대해서 온전히 깨끗함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 온전히 깨끗함으로 대하는 것을 모든 대상에게 확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별과 연령을 떠나서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대할 때 이기심이나 욕심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교회를 이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갑니다. 인맥을 넓히기 위한 목적으로, 사업을 위해, 출세를 위해, 성공을 위해 저마다 목적을 가지고 모입니다. 그렇게 모여서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욕심을 채우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는 곳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모이고, 우리가 모이는 목적이 주님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미 3장 15절에서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하나님의 집” 여기서 집이라는 말은 건물이 아니라 가족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형제가 있고 자매가 있고, 그렇고 한 가족이 모여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중심되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함께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면, 오늘 본문은 앞서 디모데에게 했던 말씀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말씀에 대한 실제적인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에서 디모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성도에게 뿐만 아니라 나보다 나이가 적은 성도에게 어떻게 권면의 말을 전해야 할까요? 꾸짖지 말고 권해야 합니다. 가족에게 하듯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깨끗함으로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아니라 내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가족이고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로서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서 다르게 살아갑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되면 달라집니다. 삶에서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면 달라집니다. 우리의 목적이 달라지고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린 왕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이란다“
우리에 대해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생명이란다.‘
구원 받은 우리 한 사람의 가치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주님의 생명이라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가치를 기억하고 그렇게 성도를 귀하게 본다면, 어렵더라도 필요한 권면을 할 것이고 또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를 대하는 나의 말과 행동이 나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