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4 – 21절

설교자: 조정의

자녀가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며 다투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편치 않다. 과거엔 부모가 불러다가 무섭게 체벌하면 그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을 다루지 않는 양육법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행동 변화를 가져오는 데 결국 실패한다. 한편 오늘날 부모는 ‘왜 또 그러니…제발 좀 그만하면 안 되겠니’라고 사정하지만, 그 말에 아무런 권위도 없다. 자녀를 교정하는 일에 실질적으로 무능력하다. 

복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낳은 아버지로서 바울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권하듯 그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분열 문제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권면한다. 우리는 그의 권면에서 성도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도를 향한 깊은 사랑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단지 말로만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으로 성도를 이끌어 간다.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함으로 보이라’라고 권면하면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삶의 본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한다(16절).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권면과 본을 우리 교회도 따르기 원한다. 곧 복음을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으로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올바른 복음 교리를 말하는 사람이나 교회는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복음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교회는 드물다. 교만이 가져온 균열을 없애고 견고한 교회로 서기 위해서 이 권면에 귀 기울이자.

1. 말이 아니라 삶으로 권하는 바울(14-17절)

글로에의 집 편으로 고린도 교회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지금까지 상당한 분량의 글을 써서(1:10-4:13) 고린도 교회 성도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권면했다. 하나님의 지혜보다 사람의 지혜를 추구하고,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인지, 복음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들에게 전달된 은혜로운 방식에서 멀어지는 일인지,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하고,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자만하는 게 얼마나 교만한 일인지 권면, 책망, 비유, 대조, 예시 등을 통하여 적나라하게 들춰냈다.

그들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을 단지 부끄럽게 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는 아니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14절). 바울의 의도는 ‘교정’ 즉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주는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 성도를 교정할 때, 바울은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아버지와 그의 사랑하는 자녀 관계로 인식했다. 그들을 향하여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라고 했고(14절, 아가파오: 강하고 깊은 사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라고 말하며 자신이 영적인 아버지라고 밝혔다(15절).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칭한 이유는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나머지를 아버지와 스승으로 구분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15절). 바울이 말한 스승은 일반적인 교사(디다스칼로스)가 아니라 자녀를 보호하고 돌보게 하려고 부리는 종(파이다고고스)이다. 자녀의 출입을 안전하게 지키고 기본적인 도덕, 예절 교육을 맡은 종인데, 부모가 아니다 보니 부모만큼 책임감을 갖기 어렵고, 부모만큼 아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맞고 틀리고 옳고 그른지 막대기를 가지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실제로 아이가 성숙하게 자라도록 애정을 가지고 삶을 다해 이끌어주지는 못했다. 어떤 문헌에는 파이다고고스 때문에 자녀가 나쁜 영향을 받는다고 불평하는 기록도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말로 교회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스승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지혜가 뭔지, 더 나은 가르침이 뭔지, 더 훌륭한 일꾼이 누군지 판단하고 평가하고 가르치고 권면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는 그런 스승이 셀 수 없이 많다. 이것은 이래야 한다. 저것은 저래야 한다. 성경적으로 무엇이 옳다.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 수많은 판단과 평가와 잣대와 기준과 주장이 가득하다. 바울은 그러한 수많은 스승과 자신은 명백히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바울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스승과 달리 자녀를 사랑한다. 아버지는 스승과 차원이 다른 애정 그리고 책임감으로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아버지는 자녀가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라며, 그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권면과 본이 되는 삶으로 자녀를 바른길로 인도한다. 말로만 아니라 삶으로 이끈다. 스승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6절).

바울은 단지 말로만 권하는 스승이 아니라 삶의 본으로 인도하는 아버지였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하여 자신이 고린도 교회 있었을 때 보여준 삶의 방식을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본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그들을 위하여 즉시 파견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7절).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 성도처럼 바울이 사랑하는 자식(아들)처럼 여긴 일꾼이다. 바울은 그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불렀고(딤전 1:2),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면서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고 평가할 정도로 신실했다(빌 2:22). 그는 바울의 “동역자”로서(롬 16:21), 바울이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가르친 복음대로 살아온 행사를(삶의 길, 걸어왔던 길, 삶의 방식)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누구보다 또렷이 일깨워주고 또 삶으로 보여줄 수 있는 믿음직한 일꾼이었다(바울의 복사판).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복음 충만한 가르침과 삶의 방식으로 돌보고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이들(자녀, 성도)에게 말로만 다그치는 스승인가 아니면 삶의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아버지인가? 당신의 권면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말로만 전달될 것이 아니라 본이 되는 삶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바울처럼. 디모데처럼 말이다.

2.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라는 권면(18-21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자신처럼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복음을 살아내기를 바랐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라고 권면한 것이다(20절). 이 권면은 가벼운 조언이 아니라 따르지 않을 때 엄격한 처벌이 가해지는 엄중한 훈계이다. 바울은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라고 물었다(21절). 조금 과장해서 의역하면, ‘맞고 고칠래 아니면 좋은 말로 할 때 듣고 고칠래?’ 정도가 되겠다.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서 “어떤 이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이라고 확신했다(18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진지한 계획을 세웠다가 연기하게 된 이유를 구구절절이 설명한다(고후 1:12-24), 아마도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서 분쟁을 주도적으로 일으킨 무리가 바울이 비슷한 이유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을 거라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교만하여졌다(18절).

바울은 그들에게 속히 나아갈 것이라고 자신의 분명한 의지를 밝히면서도,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말로 하나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기는 합당한 태도를 보인다. 주님이 허락하셔서 간절히 바라는 대로 고린도 교회 도착한다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하겠다고 선포한다: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19절). 스스로 지혜 있다고 말하고 남달리 구별하여 으뜸이 되기를 바라는 자들, 그래서 같은 부류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무시하고 가르치려 들고 함부로 판단하며 교만한 말을 늘어놓는 이들을 바로잡겠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들이 입으로 떠들어대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무리 옳은 말 좋은 말을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정말 그들의 삶에 능력이 나타나는가였다. 무슨 능력? 설교 잘하고, 지식과 지혜가 풍성하고, 언변이 좋고, 많은 일을 해내는 능력? 아니다. 그런 거라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거드름 피울만하다.

바울이 말한 능력은 하나님의 통치가 삶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절).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이미 신자 안에 시작되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법이 신자 안에서 지켜지기 때문이다. 복음의 능력은 복음의 지혜대로 도저히 살 수 없던 죄인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들어 하나님의 지혜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게 만드는 능력이다.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자 안에서 이미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바울이 보기 원하는 능력이다. 복음의 고백과 그에 따른 삶이 일치하는 능력이다. 

종종 그리스도인 중에서 “내가 교회 다닌 지 몇 년이 되었는데 그거 하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어, 내가 한 번 설명해 볼까?”라고 자신만만해하는 성도도 있다. 바울은 이렇게 응수할 것이다: “아니오, 말로 하지 말지 말고, 삶으로 보여주세요.” 

어떤 성도는 성경 교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정확히 아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상대적으로 적게 알고 부정확하게 진술하는 성도를 안타깝게 여긴다. 교회가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역 중에서 성경의 기준으로 무엇이 부족하고 연약한지 지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바울이라면 그들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 말씀은 얼마나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나요? 당신의 삶에서 복음은 얼마나 능력 있게 나타나고 있나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를 사랑하는 자녀를 대하듯 아버지처럼 사랑과 온유로 가르치려고 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나타내라고 권면했고 또 자신이 먼저 그런 삶을 살아내면서 자기의 본을 따르라고 담대하게 요청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육신의 부모(아버지/어머니)가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해야 하는 인생 교훈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아비들”에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명령한다(엡 6:4). 

죄인으로 태어나 영원한 멸망을 향하고 있는 자녀가 믿음의 부모를 만난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부모는 주의 교훈과 훈계를 말로 전달해 주는 것만으로 자녀를 양육해서는 안 된다.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부모 아래서 자라는 자녀의 진짜 특권이다. 자녀에게 주가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줄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자녀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그들이 따라갈 수 있도록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하는 능력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부모 아래서 자녀는 노엽게 될 뿐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군가에게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복음을 말로만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교회학교 교사라면 맡겨진 영적 자녀들을 부모처럼 사랑하고 삶으로 이끌어주어라. 믿음의 경주를 먼저 시작한 노년의 성도도 연소한 성도에게 든든한 본이 될 수 있다. 많은 지식을 알아서가 아니라 단순한 지식일지라도 그것을 살아내는 능력으로 강력하게 성도를 권면하고 격려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한 교회였고(고전 1:5),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다(고전 1:7). 하지만 바울은 그 풍족한 지식과 언변이 아니라 능력을 보기 원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가 진짜 건강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엔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복음을 삶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하다.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를 대하는 방식에서, 직장에서 맡겨진 일을 하는 방식에서, 친구나 동료를 대하는 방식과 삶의 여러 굴곡을 만날 때마다 보이는 방식, 말하는 방식과 주신 은사로 섬기는 방식 등 모든 삶의 방식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델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다. 

성경은 교회의 인도자가(장로, 집사) 먼저 본이 될 것을 요구하고, 그들을 본받아 모든 성도가 복음의 지식에 합당한 삶을 복음의 능력으로 살라고 명령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함께 능력 있는 교회로 세움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