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께 영광 혹은 하나님께 분노
본문: 누가복음 13장 10~17절
설교자: 조정의
요즘 누가복음을 통해 매주 “죄인은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매주 특별 복음집회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자리에 계신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지 않은 분들을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저는 직접적으로 이렇게 묻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싫어하십니까? 왜 예수님께 분노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훌륭한 인품을 지녔으며 솔선수범하고 사랑과 희생과 자비의 본을 보여준 위대한 성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이렇게 묻기 원합니다. “만일 그분이 당신을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신다면 어떨까요?” “만일 그분이 당신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라고 경고한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무슨 권리로?” 예수님이 선하고 착하고 모범이 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만, 같은 사람끼리 무슨 권리로 나에게 죄인이라 손가락질 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말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분노의 마음이고 배격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궁극적인 질문을 할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내 영혼의 상태에 대해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옳고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 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영혼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든 그것을 따를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표적을 봅니다. 그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줍니다. 한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일을 보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같은 일을 보고도 정확히 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 모든 것은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누구라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본문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원합니다.
사건의 시작
사건은 한 회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와 유사하게 찬송을 부르거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안식일에 한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항상 권위가 있었습니다(4:31). 당시 율법의 전문가인 서기관의 가르침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그 가르침 때문에 예수님을 칭송했습니다. 이미 열두 살에 예수님은 성전의 학자들과 질의응답을 하실 정도로 지혜가 충만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있는 충만한 지혜가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 44절의 말씀처럼 여러 회당에서 하셨던 것처럼 전도하셨을 것입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가르치셨던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기름 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바로 나다. 나는 성경의 말씀대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고 있다. 오늘날 너의 귀에 이 말씀이 응하였다’
권위 있는 말씀으로 구약의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러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길이 있음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회개 하지 않으면 망할 것임을 경고하셨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우리는 한 여인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허리를 펴지 못하였습니다. 몸이 굽어 머리를 들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보통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척추관절 유합(붙음)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등뼈들이 서로 붙어버려 뼈가 퇴화되고 근육이 마비되어 한 순간도 똑바로 서 있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저는 과거에 척추가 꼿꼿하게 세워져 휘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겉보기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척추가 휘면 통증이 지속됩니다. 앉아있어도 서 있어도 누워도 엎드려도 통증은 계속됩니다. 이 여인의 고통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표현하면 단 한 순간도 똑바로 서지 못하고 허리가 굽어 머리를 들 수 없는 이 여인은 보기에도 흉측하고 말할 수 없는 통증을 견뎌야 했을 것입니다. 자그마치 18년이라는 세월동안 말입니다. 18년을 기지개 한 번 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여겼습니다. 뭔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런 병을 가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편견은 사회적으로 여인을 억눌렀을 것이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수치심과 자책감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경제적인 소득을 얻는 길은 오직 구걸 밖에 없었기에 가난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병의 원인도 알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누가는 의사였는데 의학적인 원인을 말하지 못합니다. 이 여인은 다른 어떤 원인이 아닌 귀신에 의해 병이 들었던 여인이었습니다. 마귀의 권세가 이 여인을 억누르고 등이 접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후에 이 여인에 대해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권세에 매여 육신의 질병으로 포로 된 이 여인, 마귀의 권세에 눌린 이 영혼을 예수님이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께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병을 낫게 해달라고 요청하거나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허리가 굽어 고개를 들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녀를 예수님이 먼저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봅니다.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여자를 멀리 했습니다. 랍비들은 공공장소에서 여성과 이야기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심지어 그 대상에 자기 아내도 포함되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수십 년간 병이 든 여인이었습니다. 더 가까이 할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 팽배했던 사회의 규율과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장벽을 깨고 예수님은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 말처럼 무책임하고 황당하며 상처가 되는 말은 없습니다. 다이빙을 하다가 하반신 마비가 된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사고로 인해 고통스러웠는데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와서 기도하면 나을 수 있다, 안수하면 나을 수 있다고 말하며 헛된 희망을 주어 수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일들이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네가 건강해졌으면 좋겠다”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네가 병에서 지금 놓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권세가 없으셨다면 능력이 없으셨다면 이 말은 고문입니다. 헛된 소망만 잔뜩 불어넣고 실현되지 않는 거짓이며 참으로 무책임하고 불쾌한 말입니다. 분노가 끓어오르게 하는 말입니다. 실패로 돌아가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실현된다면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이, 모든 가르침이 참 권위를 얻게 되는 말입니다. 그 분이 진정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며 기름부음 받은 종이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러 오신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하신 후 그녀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이는 또 다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여인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많은 조롱과 비방의 거리가 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신 후 그 말씀의 힘이 그분에게서 그녀에게 발휘되고 있음을 안수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상처받고 억눌리고 매여 가난하고 괴롭고 외로운 삶을 살았던 이 여인에게 은혜의 온기가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회당이 있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여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십 년 간 한 순간도 허리를 펴지 못했던 이 여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조용히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그 즉시 허리를 폈습니다.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펴지 못했는데 “네 병에서 놓였다”는 말씀과 동시에 예수님의 권능으로 여인은 즉시 허리를 폈습니다. 차에서 한동안 잠을 잤는데 팔이 의자에 눌리니 잠에서 깨어 팔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몇 년이나 잠을 잔 것입니까? 그러나 18년 동안 유착되어 단단히 붙었던 척추가 일순간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과연 예수가 누구시기에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걸까요?
여기 누가는 ‘놓였다’와 ‘곧게 폈다’는 말을 수동태로 사용합니다. ‘네가 병을 놓았다’가 아니라 ‘네가 병에서 놓였다’이고, ‘여인이 허리를 폈다’가 아니라 ‘여인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입니다. 누군가 그 일을 여인에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그 여인을 부르고 말씀하시고 손을 펴서 능력을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후에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여인을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십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그녀를 푸신 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탄의 권세 위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뿐입니다. 하나님은 기름부음 받은 종을 통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에게 자유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이 말씀을 읽고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오늘날 이 말씀이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인 “네가 누군데? 요셉의 아들 아니야?’라고 하며 그분을 거절했고 낭떠러지로 끌고 가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오늘 이 회당에 있었다면 그들은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죽이려 했던 예수가 18년간 사탄의 포로 된 여인에게 자유를 주고 있는 장면을 말입니다. 가난하고 눌린 그녀에게 참 자유를 주는 복음을 전하였던 이분이 참으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인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 분노를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해보십시오. 가끔 저는 유평교회 2층을 오르는 모친님들을 보며 참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능력이 있다면 모든 부친님, 모친님들의 허리를 곧게 펴드리고 싶습니다. 20세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병으로 오래 고통 중에 신음하고 계신 성도님 가정을 보면 저에게 그런 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광경을 본 것입니다. 18년간 앓던 가난한 여인에게 참으로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 이 기쁨을 완전히 망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회당장입니다.
그는 회당을 관리하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권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유평교회 예수님이 오셔서 오랜 세월 고생하시는 성도님 한 분을 고치셨는데, 목사가 일어나 분노하며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이런 행동을 할까요?
회당장은 예수님께 직접 찾아가 일대일로 자신이 가진 의문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회당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쳤다고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다 듣도록 이렇게 외쳤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그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죽이라는 엄한 명령을 하실 정도로 강조하셨습니다(출 31:15). 그가 보기엔 여인이 오늘 고치지 않는다 해도 당장 죽지 않을 것인데 왜 내일 고치지 않고 안식일인 오늘 고치냐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하루 정도 여인의 고통을 두고 봐도 되지 않냐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인 오늘 하나님의 법도 지키고 내일은 여인의 질병을 고쳐주면 아무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당장은 한 가지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6일간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루를 안식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안식일을 지켜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송하도록 하였습니다. 모든 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지만 특별히 이 안식일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구별된 날이었습니다. 그것이 본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로 매여 있다가 풀려났을 때 하나님은 안식일에 그들을 풀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5장 1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에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할 뿐 아니라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본질에서 떠나 율법의 실천에만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유대전승인 미드라쉬에 따르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 39가지 목록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목록 어디에도 예수님이 실제로 하신 일(여인을 부르신 일, 안수하신 일)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이 여인을 고치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병을 치료하는 행위는 금지하는 항목이니 그것을 어겼다고 분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너는 누구냐? 누구이길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느냐?”라고 분개하며 묻고 있습니다. 회당장만 그렇게 분개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복수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다수를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들의 무지함을 꾸짖으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39개의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을 만들면서 동시에 예외사항을 추가하였는데, ‘소나 나귀가 목말라 할 때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규정으로 2천 규빗(약 910미터) 정도는 허용이 되는 거리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자산이고 또 갈증에 시달리는 가축들을 불쌍히 보고 그러한 규정을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너희가 가축을 위해 그러한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여기 18년이 된 여인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들은 소와 나귀는 귀하게 여기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아브라함의 딸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축이 끈에 매이는 것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인이 사탄이 매임에서 풀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자신들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에는 자비를 요구하면서, 그 외의 대상에게는 자비가 주어졌을 때 분노하는 이 가식을 보십시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그들의 더 깊은 외식을 놓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께 가졌던 외식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서 18년 된 병자가, 그 당시 의술로는(지금도 마찬가지로) 절대 고칠 수 없는 불구자가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이 여러분의 눈앞에 일어났습니다. 마땅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가르친 대로 그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죄인을 구원할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회당장과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익명의 무리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사실이 마치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자기들 눈앞에 일어난 일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신경을 조금도 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그들의 마음에 바로 들었던 감정은 분노였습니다. 그들이 했던 말은 “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느냐?”였습니다.
회당장과 그 익명의 무리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백성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영혼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영생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증언하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는 거절하였습니다(요 5:39-40).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한 것은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는데 그것은 그가 하시는 모든 권위 있는 말씀과 권세 있는 기적이 보여주는바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영광의 빛을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을 찬송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안식일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사탄의 포로였던 여인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뒤틀린 육체를 곧게 펴서 건강한 육신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안식일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여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사탄의 손에서, 눌림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안식일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선포되어야 할 날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 초반에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께 도전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미워하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오늘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다면 여러분도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죄인과 사회 부적응자들을 포용하시는 그분을 왜 싫어하겠습니까? 문제는 예수님이 단지 이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모든 만물의 주인되시고 하나님으로서 모든 영혼의 주인되십니다.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일을 하십니다. 그 일을 보셨다면 여러분도 아마 기뻐하고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놀라운 표적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많은 사람들이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존재로 내가 힘들 때 위로가 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해결사가 되며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게 도와주는 존재로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을 무너뜨리고 내 계획을 그분의 계획 아래 두며 그분의 기준 아래 내 영적 상태를 파악하고 그분이 명령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회당장처럼 외식적인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찍혀 불태워질 열매 없는 나무라는 것을 인정하고 18년 된 여인처럼 그분이 나를 보시고 부르시고 만져주시기 전까지 나는 단 한 순간도 사탄의 매임에서 풀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고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분노한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거나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굴복한 자이거나 하나님의 주권이 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을 철저히 배격하는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통하여 드러낸 영광의 빛에 나아가거나 그 빛을 피해 어둠으로 돌아서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영원한 사탄의 자녀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맛봐도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포도원 지기는 금년만 심판을 미뤄달라고 부탁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하십니다. 심판은 미뤄졌으나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매주일 강단에서 우리는 회개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선포됩니다. 회개의 열매가 없는 영혼은 찍어 불태워질 그날에 그 선택의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완악하고 견고한 회당장 같은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그 영광의 주 앞에 나오십시오. 주가 여러분을 위해 하신 일을 보고 그 영광스러운 일을 찬송하십시오.
이 영광의 주를 만난 분들은 다시 그분의 영광을 보고 찬송하기 원합니다. 이 안식일(주일)에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주가 우리를 먼저 보시고 주가 우리를 불러주셨고 주가 우리를 만져주심을 잊지 마십시오. 사탄의 노예에서 풀려나게 하시고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구세주의 영광, 그분께 항상 감사하고 날마다 찬양하지 않는 죄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그 영광의 구주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