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
본문 : 누가복음 12장 13~21절
설교자 : 최종혁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말합니다. 혼자 여행하기, 스카이다이빙, 번지 점프, 맛있는 음식 먹기, 유명한 여행지, 가족사진 찍기, 봉사하기, 기부하기 등등 자기가 죽기 전에는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을 적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무엇이 가장 아쉬울까요? 내가 스카이다이빙도 못해보고 죽다니 하면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될까요? 맛있다는 음식을 못 먹어보고 죽다니, 뉴질랜드가 900국이라던데, 거기도 한 번 못 가보다니 하면서 땅을 칠까요? 내 통장에 1억도 없다니, 내가 자녀에게 이런 것도 물려주지 못하다니 참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까요? 그런 외형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 죽음 앞에서 큰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런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삽니다. 그래서 그것을 더 많이 갖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희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과 싸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삶 속에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의 핵심은 15절과 21절에 있습니다. 15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명령’, 그리고 21절에서 하신 ‘경고’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소유의 넉넉함,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아 두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보겠습니다.

1. 배경 – 유산 중재(13~14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13절)”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중에 사람들이 질문하고 그것에 답하시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여기서도 한 사람의 말에 답하시면서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깨끗하고 거룩한 듯이 꾸몄던 외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만 생각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외식에 빠지는 것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어쩌면 이런 맥락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 같은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 두 사건 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하나님으로 삼은 것의 대표적인 결과들입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는 외식이고 세속적으로는 물질주의입니다. 물론 이 둘은 함께 드러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누가는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눅 16:14). 그들은 단지 외식하는 자들이 아니라 돈을 좋아하는 물질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물질주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 중 한 사람이 불쑥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 사람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는 당시 랍비들을 부르던 호칭으로 부르면서 유산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언뜻 ‘왜 예수님께 유산 중재를…’이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에 보면 상속에 관한 규정들이 있었고 그런 규정을 해석하고 가르쳤던 사람들이 랍비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랍비들에게 유산 분배에 대한 중재를 요청하곤 했던 것입니다.

“형”에게 가서 명해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동생인지 형인지는 사실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율법에 따르면 장자가 두 배의 상속을 받아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형이 동생에 대해 유산을 나누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동생이 정당하게 유산을 나누지 않은 형에 대해서 이런 요청을 했을 것입니다.

유산 분배는 언제나 그렇듯 간단하지 않습니다. 재산은 칼같이 나눌 수 없는 것인데 어쩔 수 없이 나눠야 하고, 받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동생의 경우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요청하는 것을 보면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저희가 유산을 배분해야 하는데 오셔서 좀 도와주십시오.”가 아닙니다. 이미 분배가 끝난 상황인데 형이 지금 마땅히 내가 받아야할 유산을 주고 있지 않으니 형에게 “동생한테 유산을 더 주라”고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형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지 모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유산 상속에 대한 불만이 있어서 변호사를 사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작은 사건이고 우리가 생각할 때 잘못한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이것은 이 동생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보여줍니다. 유산은 부가 수입입니다. 살기 위해서 유산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형과 자신의 관계보다 유산을 더 얻는 것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 선하고 아름다운 형제의 하나됨보다(시 133:1), 자신이 더 많은 재물을 얻는 것을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14절)”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12:4)라고 부르셨었는데, 여기서 이 사람에게는 좀 더 중립적이고 공식적인 표현(“이 사람아”)을 사용하십니다. 정황상 부드러운 호칭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하면 아무개씨라고 조금 딱딱한 표현을 쓰신 것입니다. “누가 나를 … 세웠느냐” 예수님은 이 사람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인 재판장이 되시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이런 물질로 인한 형제간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한 편에 서서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예수님께서 탐심에 대해서 말씀하시게 된 배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유산 상속과 관련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탐심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2. 명령 –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1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15절)” 단지 그 동생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것을 읽는 우리들까지 예수님은 교훈하고자 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예수님은 두 개의 명령을 말씀하셨습니다. “삼가라”와 “물리치라”입니다. 삼가라는 ‘지각을 가지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물리치라”는 ‘주의하라’, ‘경계하라’입니다. 둘의 의미는 ‘예의 주시하며 자신을 지키라’입니다. “모든 탐심”으로부터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탐심은 ‘더 많이 갖고자 하는 마음(욕망)’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필요 이상을 원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많이 가진 것’의 문제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부한 것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부를 약속하기도 하셨습니다. 문제는 ‘부하기 원하는 마음’,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가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모든’ 탐심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꼭 돈이나 재물에 대한 것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탐심에 대해서,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것이 있는지 예의 주시하며 탐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재물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5)”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는 것입니다.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은 결국 탐심이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려놓고 물질을 무엇보다 우선한다면 그것이 탐심이고 우상 숭배입니다. 앞서 예수님을 찾아 왔던 동생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가 큰 탐욕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물을 원하는 마음이 커서 형과의 관계를 뒤로 미루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가르침보다 지금 유산을 더 가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탐심이고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물리치고 자신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탐심을 물리쳐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사람의 생명”은 단지 죽고 사는 것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삶을 말합니다. 참된 삶은 유산을 더 많이 받는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데 참된 삶이 있지 않습니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면 더 좋은 집에 거하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더 많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도 있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참된 삶, 인정받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에 참된 삶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것이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정말 중요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무엇이 중요할까요? 무엇으로 그 삶이 바른 삶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결정될까요?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3. 비유 – 한 어리석은 부자(16~20절)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16절) 예수님은 부자인 사람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이미 부자였고 더 큰 부자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부자에게 넓은 농지가 있었고, 풍성하게 수확했습니다. 농사만큼 정직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부정적인 방법이나 사기 행각으로 소출을 풍성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부자는 열심히 일했고 그에 대한 결과로 풍성하게 거둔 것입니다.

농사는 특별히 농사를 짓는 사람의 성실함도 중요하지만 때에 맞춰서 비가 오고 해가 비추고 하는 것이 풍성한 수확을 얻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부자의 풍성한 수확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제로 이런 복을 약속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부자의 상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실하게 일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상황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는 언제나 그렇듯 반전이 있습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17절)” 풍년이 들어 부자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행복한 고민입니다. 쌓아 둘 곡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몇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적당히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팔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부자’라서 필요한 것은 넘치니 다른 사람에게 그냥 나눠주거나 기부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곡식을 부피가 작은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8절)” 부자는 일단 자신의 재물을 ‘쌓아두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거기에 곡식을 쌓아두는 것입니다. 헬라어에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이미 부자의 곳간이 하나는 아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자는 더 많은 곳간을 세울 계획입니다. 정말 많은 곡식을 거둬들인 것 같습니다. 자기희생적인 결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납득할 만합니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일은 아닙니다. 큰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자기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의 낌새가 보입니다. 이 부자는 지금 계속해서 ‘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곡식을” “내 곳간에”라고 계속 말합니다. 이 짧은 비유에서 이 사람은 ‘나’와 관련된 표현을 12번이나 사용합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19절)” 부자는 자기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이제 먹을 것, 쓸 것은 충분하니 나를 위해 살자, 일하지 말고 먹고 싶은 것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마시고, 즐기고 싶은 것 즐기며 살자. 이것이 부자의 계획입니다.

오늘날로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떤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잘 된 것입니다. 꾸준히 잘 되고 있었는데 어느 해에 어떤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투자를 해봤는데 소위 말하는 대박이 났습니다. 돈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계획을 세웁니다. ‘지점을 10개쯤 열고 그것을 관리할 사람을 세우자. 그리고 나는 일선에서 물러나 수익만 누리자’ ‘이제 굳이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고 나는 이제 남은 생을 즐기며 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사실 꿈같은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바라는 삶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실 돈만 충분하다면 굳이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이 부자가 그 꿈을 이룬 것입니다. 이 땅의 기준에서 이 부자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정말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 그 노력의 대가를 받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반전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20절)” 하나님이 이 부자에 대해 평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여러분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보십니까?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현명하고 분별력 있게 처신한 사람입니다. 열심히 일했고 그에 대한 결과를 누리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성공한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구약에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듯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듯이 살지만 결국 그들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에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노력한 것, 자기 삶의 기초라고 생각했던 것, 믿을 수 있다고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조차도 하나님께서 찾으시면 끝이 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부자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생각의 중심에 ‘내’가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께서 ‘가진 자’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금방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 해’를 살 것이고 그동안 쓸 것이 충분하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소유는 자신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땅에서의 삶이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는 부자에게 오늘 밤에 그 삶이 끝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소유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자에게 그 삶이 끝나면 너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냐고 물으십니다. 정말 누구의 것이 되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부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비유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통해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 속의 부자와 동일한 삶을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마치 영원한 것인 양 붙들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면 다 돌려드려야 할 그것들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붙들며 살고 있습니다.

이사 갈 집이 아직 다 준비가 안돼서 일주일 정도 원룸에 머무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원룸에 수도가 고장 나면 어떻게 할까요? 고칠 것입니다. 일주일을 사는데도 수도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원룸에 벽지가 마음에 안 든다면 어떻게 할까요? 벽지를 새로 할까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일주일이면 나가는데 벽지를 새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주일 머물 원룸을 잘 꾸미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세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고 일시적인 것을 마치 영원한 것처럼 붙들고 사는 모습을 보면서 한탄하실 것입니다. 여기 부자와 동일한 삶을 살고, 그런 삶을 추구하며, 그런 자들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도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4. 경고 –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21절)”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자는 누구나 다 이 부자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만을 위하여 재물을 땅에 쌓아 두는 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입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은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재물을 쌓아 두는 것, 다른 말로 부하게 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재물에 대한 태도, 동기가 문제인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서 밀어내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유산 중재를 요청한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이 뒷자리에 계셨습니다. 비유의 부자의 경우 그의 생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리석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참된 삶은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소유의 넉넉함에서 참된 삶을 찾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물질을 내 삶에 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삶에 물질을 더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본래의 자리에 두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도전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과 우리를 분리해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난 돈에 별로 그렇게 욕심 없는데? 난 그래도 여기 부자처럼 먹고 즐기려고 하지는 않아”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하지만, 말씀은 그렇게 보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공통점을 찾아야 합니다. 동생의 모습에서, 부자의 모습에서 내가 보이지 않는지 찾아야 합니다.

유산을 원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계속해서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누구도 ‘난 참 탐욕스러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나에게 필요 없는 건데 내가 그냥 욕심 부리는거야’라고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이건 나에게 필요해서 내가 원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혹은 ‘다들 이 정도는 하는데, 난 이것 밖에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정직하게 생각해보면 자기 합리화일 때가 많습니다. 필요의 범위를 필요 이상으로 넓힌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면 탐심을 물리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부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재물을 어디에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영원한 것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가?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썩어질 것을 포기하고 있는가? 나의 모든 생각과 계획 속에 하나님이 먼저 계신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놓은 설계도에 하나님을 끼워 넣고 있는가? 우리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면 부자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재물? 가족? 자녀? 나의 꿈? 성공? 아니면 하나님? 무엇이 제일 중요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이 끝날 때, 우리 삶을 평가하실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시면 그의 부와 성공과 명예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시작하셨고 모든 것의 끝도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리석다’고 하시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 가치를 잃습니다. 우리가 그런 자들로 나타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소유의 넉넉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이 가장 풍요롭고 부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가치를 보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이러한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가치 있고 풍요로운 분인지 계속해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